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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전된 거에요..?”
“네.”
불이 꺼지고 티비 소리가 사라지니 바깥의 바람 소리가 더 심하게 들린다.
창문을 깨뜨릴 것처럼 몰아치는 바람.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섞여서 들려온다.
"아무것도 안 보여!"
다연이의 목소리도 같이 들린다.
"무.. 무서운데···"
"그래서 수박이는 어떻게 된 거야?"
아수라장이다. 선생님은 무서워하고 다연이는 애니메이션의 뒷 내용이 궁금하다.
우선은 휴대폰으로 빛을 비추기로 했다.
"아, 오빠 찾았다."
다연이는 전혀 겁 먹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지금 이 낯선 상황이 신기한듯 고개를 까딱거린다.
선생님은 그 반대였고.
"그러면··· 불 안 켜지는 거에요..?"
"네."
휴대폰 불빛으로 계속 비추고 있을 수는 없으니 초를 찾아야 한다.
예전에 이 집에서 초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가지고 온 건 아니고 원래부터 할머니가 가지고 계신 거였다.
"다연아, 혹시 초 어디 있는지 알아?"
"응, 저어기에 있어."
나는 다연이에게 선생님 옆에 있으라고 말한 다음, 초를 가지고 온다.
정전이 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일단 오늘은 이렇게 보내고 내일 자세한 걸 알아봐야겠다.
비록 하나 뿐이지만 초가 있으니 그래도 있을 만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깥과 은은한 촛불이 대비된다. 옆에는 다연이가 내 무릎을 베고 있었다.
"으···"
무서워하던 선생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신 것 같다.
그대로 잠시 동안 아무 말없이 누워있던 다연이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해줄까?”
“무서운 이야기?”
“응.”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에 무서운 이야기를 해줬던 것도 아닌데. 혹시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다연이, 그런 것도 알고 있어?”
“네, 하민이가 말해줬어요.”
하민이라면 어린이집에 다니는 다연이의 친구다.
쌍둥이 남자아이. 특이해서 기억난다.
“해줘.”
내가 그렇게 말하니 다연이가 신난 얼굴로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표정도 무섭게 짓는다. 정말 무섭다.
“옛날에 마리야.. 엄청 무서운 호랑이가 이써때..”
다연이의 낮은 목소리가 창 밖의 빗소리와 어울린다. 그래서 더 무섭다.
정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연이도 무서운지 내 바짓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옆에 있던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무서워한다.
“근데 사람들 잡아 먹는 무서운 호랑이였대···”
다연이가 그 말을 하고서 내 눈치를 살핀다. 정말 무서운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워.”
내가 그렇게 말하니 다연이가 말을 잇는다
“무서운 호랑이 이야기를 어떤 아이가 듣고 있었는데··· 밖에서 누가 똑똑, 하더래.”
“응.”
“그래서 문을 열었는데···! 호랑이여써! 그래서 잡아먹었대..!”
다연이가 하늘 높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무섭진 않았다. 그래도 무서운 척을 해야겠지.
“무서워어···”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선생님은 진짜 무서워하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다연이는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오빠도 무섭찌?”
솔직하게 말할까, 거짓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불이 켜졌다.
“오! 불!”
그리고 티비도 같이 켜진다.
보고 있던 애니메이션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다시 불 꺼지기 전에 보자!”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재생한다.
[애벌레를 물리치자!]
티비 속의 이상한 과일들이 같은 대사를 읊고 뒤에 있던 사과의 몸에 불이 붙는다.
저 사과는 변신할 때 몸에 불이 붙는다.
여러 번 봐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구운 사과라니.
“빨리 물리쳐!”
[이얏..!]
다연이는 리모컨을 꼭 쥔 채, 다음 장면에 집중한다.
변신을 끝낸 과일들이 애벌레를 물리치기 위해 달려간다. 그리고 그 순간,
픽.
다시 불이 꺼졌다.
미처 끄지 않은 촛불만 어두운 집을 비춘다.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던 다연이는 손에서 리모컨을 툭 떨어뜨렸다.
“나 안 봐.”
그리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두 번이나 그랬으니 삐질만도 하다.
그렇게 축 쳐진 다연이는 티비보는 걸 그만두고 일찍 잠들기로 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태풍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창문을 더 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선생님도 여기서 자기로 했다.
다연이의 부탁이 컸고, 선생님도 그리 싫진 않은 것 같았다.
“민폐가 아닐까요···”
“나는 괜찮아요. 오빠도 괜찮다고 말했어요.”
“네.”
그래서 다 같이 거실에서 자기로 했다.
몰아치는 바람소리가 들리니 문득 다연이의 친구인 참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잘 있겠지.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촛불이 비추고 있는 천장을 바라본다. 형광등 없이 은은하게 비추는 촛불도 나름대로 좋은 것 같다.
이것도 할머니가 늘 말씀하셨던 새로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을 보고 있으니 방금 전처럼 다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무서운 이야기 해줘.”
“내가?”
“응.”
그 말에는 선생님이 대답했다.
“아.. 아니··· 하지 마요.. 무서운데.”
보기보다 겁이 많은 것 같다.
“선생님이 무서우면 안 해도 돼!”
나는 다연이 말을 따라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선생님이 무서워하는 건 싫으니까.
그렇게 잠시 있으니 선생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자꾸 생각하니까 궁금해요.. 안 무서운 걸로 하나만 해주세요···”
그래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사실 뭔가를 무서워했던 기억도 없어서 될까 싶었는데 일단 이야기 하기로 했다. 다연이가 그러길 원했으니까.
“그러면 해 줄게.”
내가 한 이야기는 급하게 지어낸 이야기다.
저번에 꿨던 꿈과 호랑이 이야기를 섞은 무서운 이야기.
잠에서 깼더니 아무도 없었던 꿈. 그래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무서웠던 이야기였다. 물론 그대로 말하진 않고 약간의 각색을 거쳤다.
다연이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마지막엔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다는 엔딩으로 끝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끝내니 다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서워어··· 괜히 말해달라고 해따···”
“나도 무서워요···”
다연이와 선생님이 서로 손을 붙잡고선 말했다.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자, 내일 일어나면 안 무서울 거야.”
“으응···. 대신 내 손 잡아줘.. 무섭다아..”
“그래.”
그 날 나는 다연이의 손을 잡고 잠에 들었다.
다연이는 나와 선생님 사이에서 양 손을 잡고 눈을 감는다.
.
.
.
태풍은 꽤 강하게 불었다. 거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그 덕분에 식당 외부를 청소해야 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그 날로부터 시간이 지나서 지금은 완전한 가을 날씨다.
살짝 쌀쌀하고 그 때문에 다연이도 두껍게 입혔다.
지금은 식당에 나 혼자 있다. 다연이는 어린이집에 보냈으니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던 기계를 끌고 주방으로 온다.
이유는 오늘부터 판매할 새 메뉴 때문이었다. 사실 새 메뉴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메뉴를 다시 꺼내는 것뿐이었지만.
“어묵···”
다시 꺼낼 메뉴는 어묵이다. 분식집에서는 필수인 어묵.
이걸 왜 이제서야 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지만 나름의 이유는 있다.
어묵은 여름에 팔지 않는다. 이유는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할머니가 혼자 식당을 운영하셨을 때 팔리지 않는 여름에 어묵까지 만들기엔 번거롭다면서 아예 빼버렸던 것이 버릇이 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혼자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나도 비슷한 이유로 여름엔 어묵을 팔지 않는다.
대신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는 팔고 있다. 이번 봄에는 다연이가 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조금 빨리 메뉴에서 뺐다.
하지만 가을이 돌아온 지금, 어묵을 아껴둘 필요가 없었다.
“음···”
가장 먼저 해야할 건 따뜻한 어묵 국물을 만드는 일이다.
어묵 국물은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많은 재료들이 저마다의 맛으로 우려질 때 비로소 깊은 어묵 국물의 맛이 난다.
다시마와 마른 멸치, 그리고 대파와 무 등등. 깊은 어묵 국물을 만들어 줄 재료들을 넣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탁해지는 국물의 색깔. 그만큼 맛의 깊이는 더해졌다.
나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번 맛 본다.
"음··· 맛있네."
따뜻한 국물이 목으로 넘어간다. 요즘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따뜻한 국물이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깊다,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잘 우려진 국물.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뒷 맛까지.
이 정도면 국물은 완성됐다. 이제는 적당한 양의 어묵을 국물에 담궈주면 끝이다.
국물에 어묵을 많이 담궈둔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오래 담궈진 어묵은 그만큼 더 탱탱 불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맛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끝났네."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다.
바로 손님을 기다리는 것.
다시 나온 메뉴를 손님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
여기는 예나의 학교 앞이다. 그 곳에는 예나와 친구들이 서 있었다.
예나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의 급식은 맛있는 편이다.
모두가 만족하고 입 맛에도 맞는 좋은 곳. 하지만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듯 학교의 학생들은 급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 학교를 나서는 학생들은 예나와 친구들 말고도 많이 있다.
"이렇게 많이 가면 선생님한테 안 걸려?"
"오늘은 특히 많은데..?"
예나는 왜 오늘 이렇게 학생들이 많은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인별에 올라온 학교 선생님의 사진 때문이었다.
인별의 주인은 저번에 다연이와 같이 봤던 무뚝뚝한 남자 선생님. 선생님의 인별에 다연이의 사인이 담긴 사진이 올라간 뒤로 학생들의 팔로우가 늘었다.
오늘, 그런 선생님의 인별에 올라온 건 아저씨 식당의 어묵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팔기 시작했단다. 예나와 친구들은 그걸 먹기 위해 가고 있었다.
물론 다른 학생들이 전부 아저씨네 식당에 가는 건 아닐거다.
얼마 전에 생긴 푸드트럭에 가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는 핫도그나 샌드위치, 어묵 같은 것들도 팔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거기로 가는 게 맞을 거다. 왜냐하면 아저씨네 식당의 어묵은 전부터 나름대로 유명했으니까. 거기에다가 다연이의 명성까지 더해지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빨리 가자. 자리 없겠다."
"응."
앞서 가고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위기감을 느낀 예나와 친구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도착한 식당에는 벌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요즘 들어 아저씨네 식당에는 부쩍 손님들이 많아졌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다.
아저씨 음식은 확실히 맛있어서 그런지 한 번 입소문이 퍼지니 손님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진짜 알바를 구할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아저씨가 안쓰러워 보였지만 손님이 없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있으니 문득 다연이가 생각났다. 지금이면 다연이를 데리고 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다연이 없으면 죽는 아저씨가 잊어버렸을 리는 없고, 혹시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한 건가.
아저씨는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 그렇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일순간에 줄을 서고 있는 학생들의 시선이 길거리의 어느 한 곳으로 쏠린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다연이다!"
줄을 선 학생 한 명이 크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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