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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날, 그러니까 다연이가 캠핑을 다녀온 그 다음 날에 다연이는 오빠랑 같이 누워서 티비를 봤었다.
오빠는 옆으로 돌아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었고 다연이는 그런 오빠의 다리를 베고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티비를 보는 중이었다.
“아, 끝났다.”
그 때는 해가 지고 난 뒤였는데 다연이는 오빠의 다리에 기대어 수박이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때마침 애니메이션이 끝났다. 그래서 오빠가 다연이에게 물었다.
“뭐 보고 싶은 거 없어?”
“오빠 보고 싶은 거 보자.”
“보고 싶은 게 없는데.”
다연이는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오빠가 원하는 걸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채널을 몇 번 돌리다가 어떤 채널에서 리모컨을 누르는 손가락이 멈췄다.
“저게 뭐야?”
“사극.”
티비로 보이는 장면은 어떤 엄청 큰 모자를 쓴 사람이 넓은 방 안에 앉아있는 장면이었다.
오빠는 저 사람이 왕이라고 설명했다.
[이리 오너라.]
왕이 낮은 목소리로 위엄있게 말하니 문을 열고 신하가 들어온다.
[네, 폐하..]
"오···"
다연이는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왜인지 멋있어 보이는 말이었고 멋있어 보이는 빨간 옷이다. 왕은 멋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왕은 왜 이리 오너라 라고 말해?”
“음··· 저 때는 왕의 말이 최고거든.”
“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연이는 그 말이 기억에 남았다. 계속 생각날 만큼.
지금 다연이는 옥상에 올라와 있다. 그리고 사극 속의 왕처럼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오너라!”
당연한 말이겠지만 옥상에는 아무도 없다.
있을 리도 없고 누군가가 오지도 않는다. 그 대신 참새 한 마리가 푸드덕하며 날아와서 옥상 난간에 앉는다.
다연이는 그 모습을 보고서 미소 지었다. 작은 참새는 다연이를 찾아오니까 이번에도 올 거라고 생각했다.
“참새야, 내가 이리 오너라, 라고 말하면 참새는 나한테 가까이 와야 돼. 왕이 그랬단 말이야.”
다연이가 참새에게 말했다.
싱긋 웃으면서 참새를 봤고 참새는 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연이의 행동을 살핀다.
“이리 오너라!”
참새와 눈을 맞춘 다연이가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이번에는 참새가 올 수 있게 손까지 뻗었다.
그러자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참새가 곧 다연이에게로 날아온다.
“잘했어!”
당연하게도 참새가 다연이의 말을 이해한 건 아니지만 타이밍이 잘 맞았다.
뻗은 다연이의 손 위에 올라간 참새는 곧 총총 거리면서 다연이의 머리 위로 올라간다.
“아, 아니지. 왕은 이렇게 말 안 했어.”
다연이는 잠시 그 때 사극의 대사를 떠올리고선 다시 말했다.
“잘해꾸나! 상을 주게따!”
말을 잘 들은 참새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자, 상이야!”
다연이가 꺼낸 것은 참새가 먹을 먹이였다. 예전에 다친 참새를 돌보면서 줬던 참새 밥.
사실 참새가 잘했든 못했든 주려고 했던 거다.
“맛있게 먹어!”
먹이를 바닥에 뿌리니 참새가 날아와서 먹기 시작했다.
다연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신하다.
다연이는 좋은 왕이었고.
하지만 다연이가 옥상으로 올라온 이유는 왕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왕 놀이 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옥상에 있는 빨강이와 파랑이. 오늘 쯤이면 방울 토마토와 블루베리가 완전히 익었을 것이다.
맛있는 빨강이와 파랑이를 먹기 위해 지금까지 많이 기다렸다. 오늘이면 먹을 수 있을 거다.
“오..!”
식물을 확인한 다연이는 큰 눈으로 자기가 본 게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우와···”
선명한 빨간색을 띠고 있는 방울토마토. 그리고 보랏빛 블루베리까지.
사진으로 보던 색깔과 똑같다.
사진이랑 똑같다는 말은 이제 먹을 수 있다는 뜻.
마음 같아선 모두 따서 가져간 다음 오빠랑 같이 먹고 싶지만 혹시 모른다.
사실은 누가와서 색칠한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하게 익은 건지 모른다는 말.
다연이 혼자서는 알 수 없다. 오빠한테 물어봐야 하는 문제다. 그래서 몇 개만 따간 뒤, 오빠한테 물어볼 거다.
“신기하다아..”
다연이가 작은 손으로 방울 토마토를 툭툭 건드리다가 똑하고 딴다.
“사진이랑 똑같아···”
사진처럼 선명한 빨간색이다. 다연이가 붙여준 빨강이라는 이름처럼 새빨갛다.
다연이가 가지고 있는 색연필 색깔 같기도 하다.
“먹어 볼까..?”
예쁜 빨간색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그 색에 홀리는 기분이다.
당장이라도 한 입 먹고 싶은 색깔.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다.
“오빠한테 물어봐야 해.”
다연이는 방울 토마토 두 개와 블루베리 두 개를 따서 1층으로 향했다.
“많이 먹어, 참새야.”
참새에게 많이 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
“후..”
밀린 주문을 모두 끝내고 의자에 앉아서 다음 주문을 기다리는데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다연이다.
양 손에는 뭔가를 쥐고 있었다. 다연이가 할 게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나에게 말하길 기다린다.
“이거 받아.”
다연이가 뭔가를 내밀었다.
잘 익은 방울 토마토와 블루베리 두 개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잠시 다연이를 바라본다.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웃고 있던 다연이는 하늘을 가리켰다.
“아, 옥상에 있던 거구나.”
벌써 먹을 수 있을 만한 열매가 열린 모양이다.
다연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거야?”
알맞게 익은 방울 토마토. 먹을 수 있다.
“응, 먹어 볼래?”
“응!”
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다연이에게 건네준다.
“오빠도 먹으라고 두 개 가져왔어. 먹어.”
“그래.”
나는 다연이 말을 따라서 방울 토마토를 먹는다.
물자마자 팍 터지는 토마토. 겉도 적당하게 단단하고 내용물도 맛있다.
마트에서 사 먹는 일반적인 방울 토마토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처음으로 키워본 방울 토마토가 이렇게 잘 클 줄은 몰랐는데.
“맛있어?”
“응, 콜라 먹는 것 같아.”
아마도 입 안에서 터지는 방울 토마토가 그렇게 느껴진 모양이다.
탄산이 터지는 것처럼 상큼하게.
뒤이어 블루베리도 먹어 본다.
너무 작아서 맛 볼 것도 많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키운 거니까.
“이거는 너무 작아서 아기 같아. 이거 다 큰 거야?”
“응, 다 커서 먹을 수 있는 거야.”
다연이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블루베리도 먹었지만 곧이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너무 작아서 맛을 모르겠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하나만 먹으면 원래 그래. 나중에 따서 주스로 만들어 줄게.”
그래봤자 몇 번 밖에 만들 수 없겠지만 블루베리가 충분히 모이면 그렇게 만들어 줘야겠다.
“응!”
다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크게 말했다.
.
.
.
“하늘이가 어두워.”
여름이라 더운 날씨다. 게다가 다연이 말처럼 하늘이 흐리기까지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
그 말은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찝찝하기만 한 장마가.
분명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지만 장마는 아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비 오겠다."
"응."
다연이가 바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빠는 비 오면 좋아?"
"너무 많이 오면 안 좋아."
"음···"
다연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가 비 안 오게 해줄까?"
"응?"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내가 되물었지만 다연이는 신경쓰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 오지 마!"
그렇게 말해도 비가 안 올 리는 없었다.
나는 다연이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서 그런 다연이를 멍하니 보고 있다.
"아, 비 맞았다."
하늘을 노려보던 다연이가 얼굴을 부비면서 말했다.
"미안해. 비는 오고 싶나봐."
"그런가 보네."
싱긋 웃는 다연이를 보니 그냥 그러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다연이를 키우고 있지만 가끔 아이들의 행동은 전혀 예측 못하겠다.
하지만 귀여우니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한참 바깥을 보며 앉아있던 다연이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급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온다.
"오.. 비 많이 온다아."
그러면서 몸에 튄 빗물을 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좋은 기분이 든다.
한 두 번 봤던 모습도 아닌데.
"우오··· 오빠 방금 웃었어?"
"음··· 아니."
다연이가 놀란 눈으로 물었지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나는 모른다. 내가 웃었는지.
"아.. 아닌데? 오빠 웃었는데?"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많이 놀랐나 보다.
"아닌가..?"
다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신은 안 서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기에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못 느꼈다.
다연이가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식당으로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안녕."
들어온 손님은 예나와 친구들이었다.
지금 예나는 다연이처럼 방학 중이다. 그럼에도 알바 때문에 우리 식당에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시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연이는 그렇게 친한 예나가 왔는데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다연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내가 의심이 갈만한 행동은 한 것 같다.
"다연아..?"
"음···"
예나가 살짝 서운한 얼굴로 물었지만 다연이는 계속해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다.
한참을 그러다가 예나가 어깨를 툭 건드리고 나서야 깜짝 놀라서 예나를 바라본다.
"어.. 안녕, 언니."
"무슨 생각 했어?"
"으응··· 오빠가 웃은 것 같아."
"정말..?"
"응."
그 말을 들은 예나도 다연이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딱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대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온 것일테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계속해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주르륵 내리는 비.
이렇게 장마가 시작될 때면 할머니가 해주던 음식이 있었다.
평소의 할머니가 그랬듯 뜬금없는 메뉴 선택이었지만 그렇기에 기억에는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 음식은 파전이다.
비 오는 날이면 단골 손님들에게 종종 서비스로 주시곤 했던 음식.
앞으로도 계속 내릴 비를 보고 있으니 나도 할머니처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으음···"
아이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만해.."
내가 이렇게 말할 때까지 그러고 있다.
"아니.. 너무 말이 안 돼서요."
다연이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격하게 인정하고 있을 때 또 다시 식당으로 아는 얼굴이 들어온다.
직접 마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다연이 덕분에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탓에 우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바닥을 적신다.
나는 그 빗물을 보면서 바닥을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와..! 언니 선생님이다!"
식당으로 들어온 둘을 본 다연이가 그제야 갸웃거리던 고개를 멈추고 둘을 가리킨다.
"..."
저번에 다연이의 일기장에 댓글을 달아줬던 예나 학교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다연이가 나랑 비슷하다고도 말했었던 기억이 난다.
"..."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남자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으니 다연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 선생님도 오셨네요?"
예나가 뒤에 있는 여자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다연이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번에 봤던 언니 선생님들이야."
두 분 다 다연이가 학교에서 봤다던 선생님 같다.
학교에서 놀던 중에 봤다던 남자 선생님과 여자 선생님.
"그런데.. 왜 같이 오세요..?"
둘을 유심히 보던 예나가 그렇게 물었다.
여름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