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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혜원이가 여기로 가자고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말하는 바람에 왔어요.”
자리에 앉은 혜원이의 엄마가 말했다.
이 가족은 늘 웃는 얼굴이다. 혜원이가 부모님의 성격을 많이 닮은 것 같다.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니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헉.. 귀에서 피났어요..?”
그 말에 다연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그렇지는 않았기에 혜원이 엄마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아니야, 그 말이 아니라 그만큼 혜원이가 많이 말했다는 말이야. 다연이 오빠가 한 음식이 맛있어서 혜원이가 여기 오자고 계속 말했어.”
“와.. 정말요?”
“응, 정말.”
그 말에 혜원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선 말했다.
“오늘 소풍에서 다연이 김밥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어린이집 친구들 전부 다 맛있다고 했어요!”
“오빠도 알아! 내가 말했거든!”
“그렇구나!”
혜원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니 다연이도 덩달아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역시 혜원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길 잘한 것 같다.
다연이가 나한테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혜원이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 같으니까.
“혜원아, 나랑 놀자! 우리 2층으로 이사해써!”
“우오... 나도 갈래! 엄마. 나, 가도 되지?”
“응, 대신 어지르지 말고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아무거나 막 만져도 안 돼.”
“알겠어!”
둘은 밝게 말하고 나서 도도도 달려 사라진다.
딱히 할 것도 없을 텐데 만날 때마다 매번 저렇게 온 열정을 쏟아서 논다.
그만큼 친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아, 뭐 먹을 지 안 물어봤네.”
“매일 먹는 거 있잖아. 그거 시키자.”
“응.”
둘은 잠시 상의하더니 혜원이 엄마가 일어서서 나에게 직접 주문을 하러 온다.
“앉아서 말씀하셔도 돼요.”
“저희 제육덮밥 하나랑 김밥 두 줄, 떡볶이 이 인분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 그리고 할 말 있는데.”
할 말이라니. 뭘까.
“별 건 아니고요. 저번에 김치찌개 하는 법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아, 별 말씀을요. 진짜 별 거 아닌데요, 뭘.”
혜원이 엄마에겐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김치찌개를 하는 법에 대해 알려줬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요리 실력이 심각해서 내가 직접 김치찌개 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별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 때 이후로 남편이 여기서 김치찌개 먹는 횟수가 줄었어요. 제가 한 김치찌개가 진짜 맛있었다는 말이죠.”
혜원이 엄마는 조금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어찌됐든 혜원이 가족이 만족스럽다니 나도 좋았다.
“다행이네요.”
“다행이죠.”
그 말을 나에게 전하고 나서야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나도 요리를 시작한다.
김치찌개를 올려놓고 충분히 끓을 때까지 김밥을 한다.
습관처럼 김밥을 썰던 중에 혜원이의 아빠가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지훈 씨도 처음이랑은 많이 달라진 것 같네요.”
“제가요?”
“네.”
내가 달라졌다니. 나는 도저히 모르겠는데.
다연이와 같이 살기 전에 비하면 확실히 달라진 것 같긴 하다. 물론 그것도 나만 느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다연이가 내게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밖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니까. 안 좋은 쪽으로.
“어디가요?”
그래서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더 궁금해졌다.
이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음... 전체적인 분위기..? 아무튼 그런 게 달라졌어요. 예전에 병원에서 만났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차가워 보였는데.”
“얼음왕자, 뭐 그런 거야?”
그 말에 혜원이 엄마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둘은 큭큭 거리며 웃었다.
얼음왕자라니. 내 생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다.
“지훈 씨, 웃긴 했지만 농담은 아니에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바뀌었다니. 할머니가 들으면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다.
옆에 다연이가 있었다면 좋아했을까.
“좀 더... 다연이를 닮아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래요.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더 좋네요.”
“뭐야, 오글거리게.”
혜원이의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을 한 대 툭 친다.
다연이를 닮아가는 거라면.. 나도 좋다.
그 때 위층에서 다연이가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오빠!"
"응?"
"나, 혜원이랑 옥상에 가도 돼?"
우리가 이사 온 이 집에는 옥상이 있다.
할머니가 같이 있었을 때도 옥상이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은 없었다.
옥상에는 내가 갈만한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때의 나는 그랬다. 이유가 없는 건 하지 않았다.
뒷마당은 할머니가 종종 일을 시켜서 자세히 알고 있지만 옥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다연이, 예나와 같이 이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와중에 다시 알게 됐다.
뭐가 있는지 대충 확인만 하고 옥상 청소는 나중에 하려고 했다.
옥상에 있던 건 낡은 의자 하나와 식물들이었다.
식물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무슨 식물인지 알고 있었지만 하나는 모르겠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죽어가고 있었으나 다시 돌본다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어쨌든 그건 이번 주말에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올라가도 돼. 대신 난간에는 기대고 그러면 안 돼. 알겠지?"
"응! 알겠어!"
사실 난간은 다연이 키보다 높아서 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당부하고 싶었다.
"우와, 옥상도 있었어요?"
혜원이 아빠가 내게 물었다.
"네, 있더라고요. 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와... 자기야, 우리도 주택으로 이사 갈까?"
툭툭 치며 말하자 순식간에 반응이 온다.
"뭔 소리야. 주택이면 관리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사 갈 돈도 없고."
"그냥... 목표로 하자는 거지... 아니면.. 지훈 씨 옆집으로 갈까?"
둘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어댔다.
그렇게 있다 보니 음식이 완성됐다. 그 때에 맞춰서 다연이와 혜원이도 내려온다.
혜원이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에게 갔고 다연이는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앉았다.
"재밌었어?"
"응! 혜원이랑 옥상에서 막 뛰어다녔어! 혜원이는 아줌마가 집에서 못 뛰게 한데!"
"우리도 이사 가기 전에는 그랬잖아."
"맞아! 근데 지금은 뛰어다녀도 된다고 오빠가 그래써!"
다연이는 그 사실이 그렇게나 좋은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귀여워라.
"오빠, 근데 옥상에 있는 풀은 무슨 풀이야?"
다연이라 말하는 것은 풀이 아니라 할머니가 키우시던 식물이다.
화분에 심겨 있던 식물들. 두 개뿐이었지만.
"하나는 방울토마토 같은데 하나는 모르겠어. 나중에 확인해보자."
"알게써."
다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낸 혜원이네가 식당을 나선다.
다연이는 늘 그랬듯 혜원이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건 혜원이도 마찬가지였고.
식당 앞에는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저녁 장사를 할 때도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렇게 거리를 멍하니 보다가 다시 들어가려던 때에 다연이가 물었다.
"그런데.. 예나 언니는 언제 와?"
"예나? 왜? 바빠서 못 온다고 그랬잖아."
"아니야. 언니가 그랬어. 올 수 있다고."
"정말?"
"응, 그러면 나 언니한테 전화해 봐도 돼? 언제 올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
지금 학교일 텐데.
나는 잠깐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저녁 시간일 것 같다. 전화해 봐도 될 것 같은데.
"그래, 한 번 해봐."
나는 예나의 번호를 찾아낸 다음 다연이에게 건네준다.
"전화했어. 받기만 하면 돼."
"응."
다연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받아들고선 예나가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
전화는 나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해놓았다.
뚜르르.
신호가 길게 이어진다.
아무래도 아직 수업 중인 모양이다.
"다연아, 예나 수업하고 있나 봐. 나중에 다시 전화하자."
"응..."
다연이가 조금 실망한 얼굴로 휴대폰을 다시 주려던 때 예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니!"
".........귀여운 목소리야..."
그러나 흘러나온 건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누.. 누구세요..?"
"아, 예나 화장실 갔어요. 저는 예나 친구고요."
예나 친구라는 학생은 지금 전화를 하고 있는 상대가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면식이 없었기에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어... 나는 다연이에요. 6살이고요."
친구의 자기소개에 다연이도 덩달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답을 기다렸지만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전해진다.
"헉.. 너무 귀여워... 뭐야, 예나는 동생 없다고 했는데..?"
"나는 언니 동생이 아니라 오빠 동생이에요."
그런 다연이의 대답에 휴대폰 너머에선 죽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연이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한테 전화해달라고 말해주세요, 이렇게 말해."
"알겠어."
다연이는 휴대폰 건너편의 숨소리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한다.
“어... 언니한테에.. 전화해달라고 말해주세요.”
“네에...”
그리고 다연이가 전화를 툭 끊었다.
“방금 언니 친구들이야?”
“그런 것 같아.”
“오... 그렇구나. 나도 언니 친구들 보고 싶다.”
다연이는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본다.
“오빠, 이거 내가 가지고 있다가 언니 전화 받고 다시 줘도 돼?”
“그래도 돼.”
“알겠어. 전화 받고 오빠한테 줄게.”
다연이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고이 잡아서 복도 안 쪽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나는 그런 다연이에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밥 먹을 거야. 어디 가지마.”
“알게써!”
다연이의 활기찬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
“뭐야, 방금 누구야!”
한편 예나의 학교에선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방금 이상한 아이와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하다기 보단 엄청나게 귀여웠던 거지만.
“그 애 아니야? 오늘 공원에서 봤던 애?”
“그런가..?”
“이름도 다연이라고 하던데. 6살이고.”
“아까 그 부분에서 귀여워 죽는 줄 알았어. 진짜...”
예나의 친구들은 그렇게 귀여운 자기소개는 난생 처음 들어봤었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자기소개를 이렇게 귀엽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예나 오면 물어봐야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나가 교실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손에 묻은 물기를 떨어내면서 오던 예나는 순식간에 친구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들.
사실 뭔가 짐작 가는 건 있었다.
바로 휴대폰을 놔두고 갔다는 것. 혹시 친구들이 배경화면으로 해놓은 다연이 사진을 본 건가?
어차피 다연이와 얼마나 친한 지에 대해 대강 털어놓긴 했지만 사진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묵이 흐른다. 교실 안을 시끄러웠지만 예나와 그 친구들 사이에는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작은 그 숨소리 하나가 이 상황을 터뜨릴 기폭제가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그 안에서 예나의 친구가 오랜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늘 다연이 만나러 가자.”
나만 가지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