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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불빛 아래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다연이에게 물었다.
"그러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있어!"
늘 이런 걸 물어볼 때마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뭔데?"
"어... 그거..! 그거 이름이 뭐더라..."
다연이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름은 모르겠어. 뭐더라.. 음... 라면이랑 비슷했는데.."
다연이는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어서 라면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다연이의 설명을 들어도 도통 뭘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뭔지 몰라."
"음.. 그거 있짜나! 라면 같은데 안 꼬불꼬불해. 그리고 색깔도 라면이랑 달라."
무슨 퀴즈를 맞추듯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불현듯 뭔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잡채?"
"아..! 맞는 것 같아! 사진으로 보고 말해줄게."
"그래."
설마 이게 맞다니. 예전에 다연이가 보던 영상이 생각나서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잡채 사진을 보여준다.
"이거 맞아! 이거 이름이 어.. 무슨 채?"
"잡채."
"잡!채! 이제 뭔지 알게써! 나 이거 먹고 싶어."
다연이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먹고 싶은 걸 적극적으로 말한다.
누군가가 잡채를 먹는 걸 봤었나.
"근데 갑자기 잡채가 왜 먹고 싶은 거야?"
"이거 저번에 오빠 휴대폰에서 본 적 있어. 어떤 사람이 호로록 하고 잡채 먹었어."
다연이는 한글도 잘 몰라서 검색해보지도 못했을 텐데 그냥 운이 좋게 그 영상이 추천에 나왔었나보다.
"그 사람이 엄청 맛있다고 해써. 호로로록 하는 게 라면보다 더 맛있을 것 같아!"
잡채. 맛있긴 하다.
나는 최근에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것만은 생각난다.
다연이가 잡채를 먹고 싶다니 당연히 해주고 싶지만 조금 번거로운데. 재료들을 사러 마트에도 가야하고.
다연이는 내 얼굴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음.. 그래도 오빠가 힘들면 난 안 먹고 싶은 거야. 오빠가 힘들다고 하면 나는 안 먹는 게 더 좋아."
사실 조금 고민했었다. 당연히 하려고는 했었지만 아주 살짝 고민했었다.
그런데 다연이가 이렇게 말하니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게 오히려 죄책감이 들었다.
번거로우면 어떤가. 조금 더 서두르면 되지.
"아니야, 해줄게. 무조건."
"정말..? 오빠 안 힘들어?"
"응, 안 힘들어. 힘들어도 할 거야."
"힘들면 안 해도 되는데."
그렇게 말했지만 다연이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으면 맛이 궁금한 법이니까.
나는 잡채를 해 본 적은 없지만 할머니가 하는 걸 도와준 적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시피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영상을 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다연이가 옆에 있으면 무조건 할 수 있다.
"안 힘들어."
"내가 도와줄게."
다연이가 안 도와주는 편이 요리를 하기엔 좋지만 다연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돼. 그러면 갈까?"
"어디?"
다연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본다.
잡채를 혼자 하는 건 처음이니까 조금 서둘러야 한다.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재료들까지 사러 가야하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마트. 재료들 사야지."
"알게써! 그러면 빨리 옷 입어야지."
다연이는 신나는 듯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다연이가 챙겨 입은 옷은 내 후드 집업이었다. 다연이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 입었던 그 옷.
좋은 옷이 더 많지만 간단히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다연이는 무조건 저 옷을 입었다.
"다연아, 여기 좋은 겉옷들 많은데 왜 그거 입는 거야? 그건 큰데."
"나는 이게 좋아. 오빠 옷이잖아."
어차피 잠깐 나갈 때만 입는 거라서 상관없긴 한데 왜 그걸 고집하는진 모르겠다.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옷이라서 정이 든 건가.
"알겠어, 그러면 가자."
"오빠는 옷 안 입어?"
"나는 괜찮아, 얼른 갔다가 오자."
"응."
물론 다연이는 집에 두고 가도 되지만 나도 같이 가고 싶긴 했고 다연이도 거부하지 않으니 굳이 집에 두고 갈 이유는 없다.
후드 집업의 소매가 바닥에 닿을 만큼 길었지만 실제로 닿진 않았다. 다연이도 그 부분을 신경 쓰기도 했었고.
다연이와 내가 같이 빌라 복도로 나와서 문을 닫자마자 반대편 끝 쪽의 문이 열렸다.
우연히 같은 시간에 나오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복도를 걸어간다. 그 때 문이 다시 닫히더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다연아..?"
"선생님..?"
오늘 봤던 다연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다.
같은 3층에 산다고 하더니 우리 집과 정반대 편에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 어디 가요?"
"어..."
다연이의 선생님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나와 다연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봤던 때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오늘은 선생님도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 다연이는 어디가..?"
"나는 마트에 가요.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다시 들어갈까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편하게 나왔는데 또 어린이집 아이를 마주친다는 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곧 결정한 듯 문고리에서 손을 뗀다.
"음.. 선생님도 마트에 가려고."
"오... 선생님도요? 왜요?"
다연이는 오늘 처음 선생님을 만났을 때처럼 계속해서 뭔가를 물어본다.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다연이를 데리고 빨리 가는 게 낫겠다.
"다연아, 선생님 힘들잖아."
"응."
"그러면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먼저 나오려고 했다.
어차피 이 빌라에서 가까운 마트는 한 곳 뿐이겠지만 그래도 빨리 사라져 주는 게 선생님께 좋을 것 같다.
물론 다른 마트도 있지만 거긴 조금 더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 곳으로 가진 않을 거다.
그냥 빨리 가서 사고 나와야겠다.
"아, 아뇨. 어차피 저도 마트에 가려 했으니까 같이 가요."
그러나 선생님은 이미 다연이와 같이 가기로 결정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하긴 많이 불편했더라면 다연이가 처음 인사했을 때 다시 돌아갔을 거다.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어린이집 밖에서까지 아이를 만난다는 게 그리 좋지만은 않을 텐데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다연이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지만.
"우리 다연이도 저녁 준비 때문에 가는 거야?"
선생님이 다연이에게 물었다.
"네, 선생님도요?"
"응, 맞아."
다연이도 그런 선생님이 좋은지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그러면서 걷다, 다연이가 선생님에게 말했다.
"나 오늘 잡채 먹을 거예요. 선생님도 같이 먹어요."
다연이는 기분이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 말에 나를 바라보다 다시 다연이에게 말한다.
"다연아, 미안. 선생님은 미리 생각해 놓은 게 있어서."
"그럼 선생님은 뭐 먹을 거예요?"
그 말에 선생님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
"다연아, 선생님 그만 힘들게 하고 이리 와."
"응..."
괜히 마주쳐서 선생님이 불편한 건 아닐지 생각하면서 다연이에게 말했다.
다연이가 불편할 정도로 막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오늘 오전에 만났을 때도 생각했듯이 오늘은 휴일이니까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괜찮아 다연아. 선생님은 그냥... 라면 먹으려고. 집에 라면이 없더라구요."
선생님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바로 대답을 안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면 선생님도 같이 먹어요. 우리 오빠 요리 엄청 잘 하는데. 오빠, 그렇게 해도 돼?"
"아니야, 진짜 괜찮아요."
나는 다연이 말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불편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연이에게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니 다연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그러면요, 선생님. 나중에 오빠 식당에 와요.. 오빠 음식 어엄청 맛있어요."
"그래, 다연아. 나중에 꼭 다시 갈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트에 도착했다.
나는 마트에 도착해서 다연이와 함께 식재료들이 있는 코너로 갈 생각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안녕, 다연아."
나도 같이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우리는 식재료들을 고르러 간다.
다연이는 선생님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 좋은 지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다연이는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
"응, 우리랑 잘 놀아주니까."
"같이 밥 먹고 싶을 정도로?"
"맞아."
오늘 처음 만났을 때도 다연이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요즘 뉴스에 어린이집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올 때마다 조금 걱정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다연이가 그런 나쁜 사람들을 만나진 않았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좋은 선생님 만나서 다행이네."
"응!"
그 때 저 앞에서 선생님의 머리가 쇽하고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가 한 말을 다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곳은 그렇게 넓진 않으니까.
"빨리 재료들 사고 집으로 가자."
"알게써!"
들어도 좋은 이야기였기에 우리는 서둘러 장을 본다.
.
.
"맛있는 과자야."
장보기를 마친 우리는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다연이의 선생님을 만나지 않은 걸 보면 먼저 집에 돌아가신 것 같았다.
"오빠, 맛있는 과자는 밥 먹고 먹어야 된다고 했었지?"
"응, 밥 먹기 전에 먹으면 안 돼."
"알겠어."
이제 사탕만 좋아했던 전의 다연이는 없다.
과자의 신세계를 맛본 다연이는 여느 아이들처럼 여러 과자들을 먹었다.
이번에 산 건 초콜릿 맛이 나는 달콤한 과자였다.
"그러며언 이거는 여기에 놔둘 거야. 나중에 오빠랑 먹어야지."
집구석에 과자를 놓아두고 나서 다연이는 다시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 이번에도 옆에서 봐도 돼?"
"응, 당연하지."
다연이는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유독 좋아했기 때문에 내가 다연이를 위한 요리를 할 때마다 늘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표정이 더 밝다.
"오늘은 꼭 봐야 돼. 여기 의자에 서서 볼 거야. 오늘은 오빠가 새로운 요리 하는 날이니까."
다연이는 내 뒤로 의자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올라선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헤.. 알겠어."
내가 재료 손질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다연이가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왜?"
"오빠가 요리하는 거 말이야... 선생님한테도 주면 안 돼?"
조심스러운 다연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왜 선생님한테 주고 싶은 거야?"
"선생님은 라면 먹는데. 라면도 맛있는데 잡채가 더 맛있을 거잖아. 오빠가 했으니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연이의 얼굴을 보니 굳이 맛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맛있는 걸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어차피 사온 재료는 양이 조금 많다.
이 곳에 있는 마트는 나름 크긴 하지만 다른 유명한 체인점만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인 가구를 위한 재료들은 팔지 않는다.
그래서 장 봐온 재료들은 나와 다연이 둘이서 먹기엔 조금 많았다.
"응? 안 되는 거야, 오빠?"
약간 애교 섞인 목소리.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안 해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남은 재료들은 보관해둔다고 해도 다 먹지도 못할 것 같으니까 차라리 옆집에 사는 선생님께 줄 것까지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우와! 고마워!"
다연이가 그렇게 말하고선 뒤에서 나를 와락 안았다.
"진짜 고마워, 오빠!"
이것 때문만이라도 다연이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다연이가 안아주면 나도 좋으니까.
좋아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