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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이와 나는 집에서 나와 빌라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할머니에게 인사드리러 같이 갈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수박 인형은 엄청 귀여워."
다연이는 나에게 방금 전에 본 인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수박 인형은 어떻게 생겼는데?"
"오빠 아까 안 봤어? 내가 오빠 무릎에 앉아서 수박 인형 동영상 봤는데."
"못 봤어. 설명해줄래?"
사실 봤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힐끗 봐서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다연이 입으로 인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다연이 입으로 듣는다면 엄청 귀여울 것 같다.
"그럼 내가 설명해줄게!"
다연이는 자기가 나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듯 환한 얼굴로 말했다.
"수박 인형은 엄청... 어.. 수박이야!"
내 생각대로 엄청 귀엽다. 다연이에게 물어보길 잘한 것 같다.
"진짜?"
"응! 엄청 수박이라서 빨간색이고 초록색이야."
"그렇구나."
"얼굴은 빨간색이고 몸통은 초록색. 근데 엄청 조금만 초록색이야."
다연이가 양 손으로 삼각형을 만들어서 나에게 설명했다.
"여기가 빨간색, 그리고 여기가 초록색."
원래라면 이쯤해서 다연이에게 '사 줄까?' 라고 물어봐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선물은 깜짝 놀라야 더 좋으니까.
"그래서 수박 인형은 여기에 팔이랑 다리가 있어서 이렇게 걸어."
그리고 다연이가 인형이 걷는 모습을 흉내낸다.
뒤뚱뒤뚱 내 주변을 걸어다녔다.
"그걸 어떻게 알아?"
"동영상에서 언니가 수박 인형 팔 잡고 이렇게 걷게 했어."
다연이가 영상을 정말 인상 깊게 본 모양이다.
내가 슬쩍 봤던 그 영상 속 인형과 똑같이 걷고 있었다.
"어..?"
빌라 입구를 뒤뚱뒤뚱 걸어다니던 다연이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선다.
그리고 빌라 안 쪽을 본다.
"다연아, 왜 그래?"
"선생님이야.."
"응?"
"선생님..!"
그리고 다연이가 안 쪽으로 쏙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나도 다연이의 뒤를 따라서 급하게 안으로 간다.
거기엔 다연이의 말처럼 햇살 어린이집의 선생님이 서 있었다.
우리 식당에 오기도 했던 그 사람.
"어..."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왜 여기 있어요?"
다연이 선생님은 편한 복장으로 계단 앞에 서 있었다.
설마 여기 사는 건가.
"어.. 다연이구나.. 선생님은 여기에 살아. 그런데... 다연이도 여기 살아?"
"네, 오빠랑 같이 살아요."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면 여기에 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을까.
그리고 다연이의 선생님이 물었다.
"어... 다연이랑 오빠분.. 원래 여기에 사셨어요?"
"네."
"그런데 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죠..."
"그러게요."
다연이는 신기한 듯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이랑 같은 곳에 사는 줄 몰랐어요."
"나도. 그런데 오늘 다연이는 어디가길래 그렇게 예쁘게 입었어?"
그녀는 어린이집의 선생님답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말투로 다연이에게 물었다.
"오늘 오빠랑 같이 할머니 만나러 가요."
"할머니?"
"네, 할머니."
"아.. 그렇구나. 그러면 재밌게 놀다 와."
선생님은 할머니댁에 놀러 간다는 말로 받아들인 것 같았따.
다연이는 그 말을 듣고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할머닌 돌아가셔서 재밌게 못 놀아요."
"아.."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약간 당황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어.. 미안해 다연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다연이를 만나서 당황스러울 텐데 이런 말까지 들으니 더 불편해 할 것 같아서 나는 다연이를 불렀다.
"다연아, 이리 와. 선생님 어디 가는 중이잖아."
"응."
귀엽게도 다연이는 내 말에 쪼르르 달려왔다.
달려온 다연이는 내 다리에 기댄다. 다연이는 그래도 계속 궁금한 것들이 생각나는지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디에 살아요?"
"아, 선생님은 저기 3층에 살아."
"우와! 나랑 오빠도 3층에 사는데!"
같은 층에 사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다니.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납득은 할 수 있었다.
다연이가 오기 전의 나는 집과 식당만 왔다갔다 했었고 그마저도 식당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러니까 집은 그냥 잠을 자러 오는 곳일 뿐이었다.
그래서 마주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도 거의 없었으니까.
게다가 다연이가 오고 난 뒤에도 출근과 퇴근 시간이 달라서 마주치지 않은 것 같다.
다연이와 만난 적이 없는 건 순전히 운이 안 좋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정말? 그렇게 가까이 살았어?"
"네."
다연이는 그 사실이 좋은지 히죽히죽 웃었다.
"선생님이랑 같은 곳에 사는 줄 몰랐는데. 맞지, 오빠?"
"응, 맞아."
다연이의 선생님도 흐뭇하게 웃었다.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다연이가 귀여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 기분이 그렇거든.
"선생님은 지금 어디가요?"
"앞에 마트에 가려고."
그래서 그런지 복장이 간편했다.
다연이도 처음보는 선생님의 복장이 신기했던 건지 선생님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었고.
"다연아, 이제 선생님한테 그만 물어봐. 선생님 어디 가야 한다고 하셨잖아."
"아, 맞아."
다연이는 그렇게 말하고선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그래. 다연아, 우리 월요일에 보자."
"네에."
"다연이 오빠 분도 그 때 봬요. 아니면 식당에서 만날 수도 있고요."
"네, 조심히 가세요."
선생님은 갑작스런 만남에 당황했을 텐데도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
다연이는 그런 선생님이 좋아서 더 열심히 손을 흔들었고.
"다연아, 선생님 만나서 좋은 거야?"
"응, 선생님은 엄청 착하고 나한테도 잘해 줘. 그리고 오빠가 만든 음식도 좋아해."
다연이 말처럼 우리 식당 음식을 좋아해서 그 때 이후로도 가끔식 찾아왔었다.
포장할 때도 종종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아서 그랬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랑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는 줄 몰랐어. 엄청 신기하다."
"그러게. 신기하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연이에게 덧붙여 말했다.
"다연아, 아무리 선생님이 좋아도 집에는 찾아가면 안 돼. 알겠지?"
"응, 나도 알고 있어. 그렇게 하면 선생님도 안 좋아할 거야. 어린이집에서도 놀고 또 나랑 놀면 힘들 거니까."
"그래, 다연이 착하네. 오빠가 말 안 해줘도 알고 있었네?"
"알고 있었어. 예나 언니도, 오빠도, 선생님도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건 싫어."
다연이가 너무 기특했다.
아직 이렇게나 어린데 벌써부터 배려를 할 줄 알다니.
이렇게 예쁘고 착하니 누가 안 좋아할 수 있을까. 주책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나 때문에 힘들면 나를 싫어할 수도 있잖아. 이제 다연이랑 안 놀아! 라고 할 수도 있고."
이런 말까지 들으니 조금 속이 쓰렸다.
다연이는 분명 착하지만 주눅은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힘들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만큼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음... 다른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응."
"오빠는 안 그럴 거야. 그러니까 오빠한테는 투정부리고 놀아달라고 해도 돼."
그러자 다연이가 내 다리에 더 몸을 기댄다. 그리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맞아. 오빠는 계속 내 옆에 있겠다고 했찌."
"그래."
그렇게 웃고 나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면 오빠랑 매일매일 놀아달라고 해야지. 어린이집에서도 같이 놀자고 할 꺼야. 그래도 돼?"
"음... 매일 같이 놀면 돈은 누가 벌어?"
"아무도 안 벌어! 다 같이 놀면 돼. 오빠만 같이 있으면 상관없어."
"그래."
그래도 돈은 벌어야 겠지만.
그렇세 한참을 웃다가 다연이는 내게 물었다.
"오빠, 근데 우리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돼?"
"음... 조금 늦네. 왜? 추워서 그래?"
"아니, 그건 아닌데 빨리 가고 싶어서."
"그러면 빨리 오라고 전화할까?"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전화 받고 뛰어오다가 넘어지면 안 되잖아."
"그래, 그러면 집에 들어가서 기다릴까?"
"그것도 아니야내가 밖에서 기다리자고 했어."
우리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빨리 이 곳에 있던 이유는 다연이가 그러자고 했기 때문이다.
집에만 있기 심심하다고.
"그것도 아니면... 조금 걸어가 볼까?"
"음... 언니가 오는 길 쪽으로?"
"응, 거기로 걸어가 보자. 도중에 만날 거니까."
"알겠어."
오늘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은 예나였다.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기도 했기에 내가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자기도 가겠다고 말했었고.
우리는 예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잠시 걷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것들에 관심을 주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다연이가 나에게 슬쩍 물었다.
"오빠, 우리 이사는 언제 가?"
예전에 다연이에게 언질을 했었던 이야기였다.
식당이 있는 건물로 이사를 갈 거라는 이야기.
"3주 뒤에."
"3주면 몇 밤이야?"
"스무 밤."
간단하게 말해서 3주지만 정확하게는 20일이다.
그 때 원룸의 계약이 끝난다.
"그러면 선생님이랑은 또 헤어지겠네."
"그래도 어린이집에서 계속 만나잖아."
"맞아."
다연이는 이사가 조금 기대되는 모양이다.
이사라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이사하면 재밌을 것 같아. 집에서 내려오면 바로 식당이잖아."
"그래."
그게 왜 재밌는 건진 모르겠지만 다연이가 이사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거리도 얼마 안 돼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걸어가니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익숙한 그것은 손을 번쩍 들어서 나와 다연이를 향해 흔들고 있었다.
"언니맞지?"
"응, 맞는 것 같아."
그러자 다연이도 손을 번쩍 들어서 열심히 흔들었다.
"언니! 나 여기있어!"
안 그래도 뛰어오고 있던 예나가 다연이의 손짓에 더 빠르게 달린다.
"뛰지마."
"언니, 뛰지마! 넘어지면 아파!"
그렇지. 넘어지면 아프다.
그것만으로도 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다연이는 기다리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헉... 죄송해요... 급하게 나온다고 휴대폰을 안 챙겨와서.."
우리 앞에 도착한 예나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말했다.
"괜찮아, 얼마 안 기다렸어. 그리고 다연이랑 놀고 있어서 시간도 금방 지나갔고."
"맞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오빠랑 놀고 있었어."
진짜로 예나는 얼마 늦지 않았다.
한 3~4분 정도 늦은 것 같다. 우리가 일찍 나와 있었던 거지.
"택시는요?"
"방금 막 불렀어. 너 보이자마자."
"휴.. 진짜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안 늦을 게요."
다음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언니! 나 그거 또 해줘. 슈웅하는 거!"
"알겠어. 손."
그러자 다연이가 예나의 손을 잡았다.
"그럼 시작한다."
"응!"
누가 봐도 설레는 얼굴로 다연이가 대답했다.
잘못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