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32화 (32/181)

-------------- 32/181 --------------

늘 서 있던 주방에서 평소처럼 김밥을 만든다.

까만 김과 하얀 밥 위에 색색의 재료들을 장식한다.

이러고 있으니 문득 다연이와 같이 김밥을 만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햄은 두 개 넣을래요!'

그 때를 떠올리니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김밥을 만든다.

김밥 한 줄을 완성시키고 따뜻한 우동 국물도 담아 놓는다.

우동 국물과 김밥은 잘 어울릴 뿐더러 할머니 친구 분도 시원하다고 좋아하신다.

그 말을 다연이가 들었다면 뜨거운데 왜 시원하냐고 물었을 텐데.

잡생각은 얼른 떨쳐버리고 완성된 음식을 할머니께 서빙한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김밥 한 조각을 집어든다.

올 때마다 늘 먹던 음식인데 매번 저렇게 멍하니 김밥을 보다가 드신다.

"네 할머니보다 낫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김밥을 마저 삼켰다.

할머니의 친구 분들을 보고 있자면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느리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느려진 지금을 즐기는 것이 거나.

뒤이어 들어온 다른 손님들도 없어서 나는 주방에 앉아 느긋하게 다연이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지금쯤 다연이는 뭘 하고 있을까. 혹시 그저께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나를 감시하려고 하고 있을까.

"지훈아."

"네."

나는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요즘 여자 친구 사귀냐? 왜 이렇게 안절부절이야."

"아뇨, 다연이가 오늘 처음 어린이집에 가서요."

"아, 그 애기?"

"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안절부절 못 하는 걸로 보였나보다.

나름 티 나지 않게 행동한 건데도.

"볼 때마다 물어보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너, 할머니 기일은 안 잊었지?"

"네, 기억해요."

눈빛을 보니 이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할머니, 까칠하게 대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안 그런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이런 걱정을 할 정도로 할머니는 살아있을 적 사람들을 까칠하게 대했다.

물론 그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다.

나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서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었던 것뿐이니까.

게다가 나는 비슷한 처지였기에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너희 할머니가 기일에 찾아오지 말라 했다고 해도 가. 그게 예의니까."

"네."

"너희 할머니도 되게 힘들었어. 힘들게 마련한 건물을 너한테 준 거고."

"네."

할머니는 고아로 살아오셨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서 이 건물을 소유하게 된 거고.

할머니는 결혼도 하지 않았기에 건물을 줄 만한 핏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받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친구 분이 남은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이거 조금만 더 줄래?"

"네."

나는 다시 국물을 퍼서 가져다 드린다.

할머니의 친구 분이 여기까지 오셔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점점 잊힌다.

그게 내 옆에 있었을 당시 내게 소중하고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흐른다면 자연스럽게 잊힌다.

그건 누구나 겪는 당연한 과정이다. 내게 소중한 정도에 따라 잊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만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할머니가 걱정하시고 계신 부분이 이것 때문일 거다.

지금 할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 할머니가 남기신 건물은 내 옆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할머니의 기억은 잊히고 건물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남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잊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맛있네. 진짜 네 할머니가 한 것보다 맛있어. 나이가 들더니 솜씨가 더 줄어들어서 할매 살아있을 땐 자주 오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젊은 애가 하니까 더 좋네."

김밥과 국물을 담았던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얼마야?"

"돈은 안 내셔도 돼요."

"왜? 돈 안 벌면 어떻게 장사하려고."

"김밥 한 줄 정도는 안 받아도 돼요."

할머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시곤 바로 입구 쪽으로 향했다.

"맛있게 잘 먹었다."

"조심히 가세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러고 작게 말했다.

"너, 좀.. 바뀐 것 같다?"

"네?"

"그 애기가 오고 나서 성격이 조금 바뀐 것 같다고."

그러곤 별 다른 말없이 밖으로 나선다.

뭐가 바뀌었다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웃고 계셨으니 나름대로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오지 마. 알아서 갈 거니까."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할머니는 말없이 길을 걷다가 사라진다.

나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서 다연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니 지금쯤 다연이는 뭘 하고 있을 지 궁금해졌다.

긴장 안 하고 잘 놀고 있겠지?

나는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준다는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고선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

여기는 햇살 어린이집이다.

오빠가 가고 혼자 남은 다연이.너무 일찍 온 탓에 다른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빨리 안 걸어올 걸...."

분명 오빠가 주변을 걷다 시간 맞춰서 어린이집에 가자고 했었는데 중간에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빨리 왔다.

오빠랑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다연이가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려고 하던 때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연아."

"안녕하세요...."

다연이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래도 오빠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는 꼭 해야 한다고 말한 덕분에 잊어버리진 않았다.

다연이를 부른 선생님은 오빠 식당에 왔었던 그 언니였다.

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너무 그렇게 긴장 하지 않아도 돼."

"네에..."

그렇게 말한다고 긴장이 안 되진 않았다.

"다연이가 빨리 와서 친구들이 아직 다 안 왔거든?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네.. 근데요.."

"응."

"오빠는 오늘 언제와요....?"

그 말을 듣고 여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치사량을 넘는 귀여움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오는 아이들은 대개 비슷한 질문을 하곤 했지만 그 대상이 엄마가 아니라 오빠로 바뀌니 신선하면서도 몇 배는 더 귀여워졌다.

게다가 다연이는 이미 식당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보통의 아이들을 대할 때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빠와 각별해서 그런 건가.

여자는 다연이네의 사정이 어떤지 대충 알고 있다.

다연이가 오빠와 둘이서 살고 있다는 것과 다연이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까지.

그래서 더욱 집중해서 케어하려고 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단 건 절대 죄가 아니지만 이 나잇대 아이들은 때론 잔인하니까.

물론 걱정될 만큼 햇살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짓궂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 착한 편이다.

그 덕에 여자의 첫 직장인 햇살 어린이집에서의 나날도 생각보다 훨씬 편했다.

일단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저녁 먹기 전에 올 거야."

"시간은요?"

"4시 30분 쯤."

"그렇구나...."

다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기 옷자락을 꾹 쥐었다.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자가 본 다연이의 오빠는 조금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사람은 아니다.

그저 감정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다연이는 조금 다르다. 감정이 풍부하고 외로움이 조금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오빠를 그렇게 의지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 그런데요... 선생님이에요...?"

"응, 선생님 맞아. 왜?"

"그러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요?"

"응, 그렇게 부르면 돼."

여자는 계속되는 다연이의 질문 공세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보다 지금 이렇게 다연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처음 어린이집 교사를 하려고 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만큼 다연이는 순수했고 귀엽다.

그것도 많이.

"근데요.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

다연이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이름은 왜?"

"우리 오빠 식당에 왔으니까 이름 알고 싶어요."

그 두 가지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으나 여자는 대답해주기로 했다.

"선생님 이름은 김정인이야."

"그렇구나... 내 이름은 이다연이에요."

"그래, 알고 있어."

아직 다른 아이들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건 다연이보다 먼저 온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연아, 친구랑 인사했어?"

"친구요?"

다연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친구와 인사하기는커녕 다른 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응, 민재가 먼저 왔는데..."

정인이 고개를 돌리면서 방 안을 살핀다.

다연이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방 안을 열심히 살피던 정인은 민재가 보이지 않자 소리 내어 불렀다.

"민재야."

"네."

그 말에 민재라는 아이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방 안에서가 아니라 정인의 뒤에서 들렸다.

다연이도 정인의 시선을 따라 민재라는 아이를 바라본다.

"어디 갔었어?"

"화장실 갔었어요..."

작게 말하는 남자 아이.

다연이는 모르지만 어린이집에 처음 왔을 때 울었다던 그 남자 아이였다.

조금 마르고 소심해 보인다.

"어제 선생님도 말했고 혜원이도 말한 거 기억해?"

"네... 새 친구 온다고요..."

"응, 새 친구 왔어. 다연이야."

다연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남자 아이를 본다.

혜원이 말고는 처음으로 만나는 친구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전과는 달리 막상 친구를 만나니까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새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달리 입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인이 말했다.

"민재가 먼저 인사할까?"

"네에... 안녕."

"안녀엉."

다연이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민재라는 아이도 다연이처럼 손을 흔들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귀여워...'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아이들이 귀엽게 보이는 건 오랜만이다.

다연이는 민재라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민재는 그런 다연이의 시선을 받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민재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다.

"너는 이름이 뭐야?"

"나... 나는 김민재야..."

"나는 이다연."

그렇게 민재와 다연이가 통성명을 마치고 나서 정인이 일어선다.

"그럼 이야기하고 있어."

"네에...."

정인은 남은 업무를 보기 위해 테이블로 가서 앉는다.

방에는 다연이와 민재, 정인까지 세 명이 있었지만 다연이와 민재는 마치 둘만 방 안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연이는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민재가 말했다.

"어... 어제.. 혜원이한테 얘기 들었어... 오늘 어린이집에 오는 친구 있다고..."

혜원이. 다연이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친구들에게 말해주겠다는 혜원이의 말이.

"혜원이랑은 친해...?"

"응, 친해. 혜원이가 뭐라고 했었어?"

그러자 민재가 그 날을 잠시 떠올리다가 말했다.

"내일 예쁜 친구가 온다고...."

그렇게 말 하는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안 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