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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음식 중 하나다.
강렬한 맛과 냄새. 그리고 공통적으로 사랑을 받는 음식.
물론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우선 재료들을 꺼내 놓는다.
'일단 이것들부터 썰어 놔.'
기억 속에서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할머니가 가리킨 돼지고기와 김치를 썰기 시작한다.
김치를 조각낼 때마다 특유의 톡 쏘는 향기가 올라온다.
그리고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다 썰었으면 볶아.'
할머니는 딱딱한 성격이었다.
요리하는 법을 가르칠 때도, 그런 나를 지켜볼 때도.
그렇기 때문인지 할머니는 요리에 문외한이던 나에게 레시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그저 이것저것을 해라 말만 해줄뿐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말에 따라서 김치찌개를 만들어간다.
돼기고기를 먼저 볶다가 그 위에 김치를 추가해준다.
한참을 볶다가 물을 끼얹는다.
치이익.
뜨겁게 달궈진 뚝배기에 물이 들어가니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소리도 잠시 후 멎는다.
그 다음 재료들을 추가한다. 준비한 재료는 송송 썬 대파와 다진 마늘 등등.
아무래도 재료가 풍부해질수록 맛도 좋아지니 추가로 넣을 것들을 더 늘어놓았다.
가정에서 만든다면 기호에 따라 여기에서 두부를 넣는다던지 조금 더 맵게 먹고 싶다면 고춧가루나 청양고추를 넣는 방법도 있다.
식당이 아니라 나 혼자 집에서 가끔 해먹을 때는 오히려 재료를 최소한으로 해서 먹는 편이지만 이 곳에선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니 만큼 할머니가 말해준대로 착실하게 요리를 한다.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조금 기다리니 물이 끓기 시작한다.
그냥 물이 끓을 때와 비교해서 묵직한 소리다.
연주를 듣는 것처럼 묵직하고 경쾌한 소리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 거기다 어우러지는 붉은 김치찌개는 지금 듣고 있는 이 연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이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김치찌개의 향이 주방을 덮고 홀과 복도 구석구석까지 번진다.
나는 조금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대파를 넣는다.
이제 조금만 더 놔두면 완성이다.
그렇게 김치찌개를 거의 완성시켜 놓고 다른 음식을 시작하려는데 머릿속에서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 때와 똑같은 요리를 하는 중이라서 그런 건진 모르겠다.
그냥 버릇처럼 머릿속에서 기억이 피어오른다.
'됐어. 김치찌개 다 했으면 그만 해.'
기억 속의 나는 네? 라고 되물었다.
'그만하고 좀 나가서 놀아. 여기서 요리만 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
솔직히 지겹진 않았다.
놀 사람도 없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힘들었지.
그래서 네, 라고 대답했다.
'야, 네가 아직 꼬맹이라서 모르나 본데 세상은 잘 먹고 잘 사는 게 끝이 아니야. 사람들이랑 어울려야지.'
그러는 할머니는 왜 계속 식당에만 머무르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을 한 할머니가 나를 밀쳐냈기 때문이다.
'나가서 놀다 들어와. 헛짓거리를 하든 뭘 하든 저녁 먹기 전에 들어오면 두고 봐라. 자, 돈. 놀다와. 아니면 나처럼 되고 싶냐.'
그 말에 무슨 의미로 나를 밀어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분명 친구가 계셨지만 그냥 동네의 친구 분들이 다가오는 것일 뿐, 할머니는 다가가지 않으셨다.
그건 싫다는 의미보단 이 쪽에서 다가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의미가 더 컸다.
그렇다고 연륜이 있으신 친구 분들이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남들한테 다가가는 법도 모른 채 살지 말고 뭐라도 해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기억 속의 나는 이 곳에서 나름 번화가라고 불리는 곳에 서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왜 이런 생각이 나는 거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다연이와 같이 그 곳에 가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단순하게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 걸까.
어떤 이유에서든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다른 요리를 하던 사이 김치찌개가 완성 됐다는 것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를 집어 들어서 서빙을 한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간단한 인사말이 오가고 돌아서니 다연이와 혜원이가 복도에서 걸어 나왔다.
"잘 나왔네. 밥 먹어."
"응."
밝은 얼굴로 함께 나온 혜원이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다연이는 늘 앉던 의자에 걸터앉는다.
다연이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혜원이가 올 때마다 늘 궁금했던 거지만 오늘따라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둘은 뭘 하면서 놀았을까?
"오빠는 요리 엄청 잘해. 그렇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그렇게 물었다.
미소를 가득 띠우고 있다.
"엄청 잘하는 진 모르겠는데 다연이한테는 제일 맛있게 해줄 수 있지."
"아니야, 오빠는 요리 잘해. 그림은 못 그리는데 요리는 잘해."
다연이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혜원이랑 이런 이야기를 했었나.
갑자기 궁금해져서 다연이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어봤어?"
내 질문에 다연이가 밝게 웃었다.
***
다연이는 오빠의 질문에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혜원이랑 둘이서 복도에 놀러 갔던 때부터 찬찬히.
"다연아! 이건 뭐야?"
다연이를 열심히 뒤따라오던 혜원이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혜원이의 손가락 끝에는 오늘 다연이가 직접 그린 자신의 첫 번째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
"저거 나야!"
"우와...! 여기에 붙여 놔도 돼?"
"응, 오빠가 된다고 했어."
다연이의 말에 혜원이는 그림을 멍하니 바라본다.
"멋있다...."
"여기도 많아."
"응."
다연이의 말에 뒤따라 복도로 들어간다.
혜원이에게 이 복도는 익숙하다. 그만큼 자주 왔고, 다연이와 자주 놀았다.
복도에도 간간이 그림이 붙어있었다.
물론 혜원이에겐 익숙한 광경이지만 저기 주방 입구에 붙어있는 그림은 조금 달랐다.
밝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더 눈길이 간다.
"나도 엄마한테 붙여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복도에 붙은 그림을 보고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이건 조금 다르다.
"우리 그림 그리자!"
다연이가 그렇게 말했다.
"응."
복도 한 가운데엔 돗자리가 깔려있다.
예전에 썼던 돗자리와는 다르다. 전의 것이 많이 오래된 깔개에 불과했다면 지금 복도에 있는 것은 보통 돗자리가 아니었다.
폭신폭신한 재질의 돗자리로 다연이는 여기에 누워있는 걸 좋아한다.
혜원이도 익숙한 듯 다연이와 나란히 엎드렸다.
"자, 내 스케치북 떼 줄게."
"고마워."
그렇게 두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슥.
둘은 말없이 하얀 스케치북을 채워 나간다.
그렇게 한참 그림을 그리던 다연이가 색연필을 툭 내려놓았다.
오늘 오빠에게 두 밤뒤부터 어린이집에 가게 된다는 말을 들은 뒤로 많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혜원아."
"응."
혜원이는 여전히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집에서도 원한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어쩐지 다연이와 같이 있으면 그림에 더 집중하게 된다.
"어린이집은 어때?"
다연이의 말에 혜원이가 고개를 들었다.
늘 밝은 목소리로 말하던 다연이와는 조금 다르다.
"좋아.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좋아. 전부 좋아서 계속 있고 싶은데 내년이면 우리는 유치원에 가야 한데."
하지만 다연이는 유치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이틀 뒤부터 햇살 어린이집에 가야하는데 그 사실이 좋으면서도 조금 긴장된다.
"왜?"
"어린이집 가는 건 좋은데...."
다연이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끝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혜원이가 말했다.
"괜찮아! 친구들 다 착해! 선생님도 좋아! 그래서 나는 유치원 가기 싫어."
"그래..."
혜원이가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좋은 것 같다.
그래도 긴장은 됐지만.
"그러면 친구는 누구 있어?"
사실 이 질문이 다연이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였다.
혜원이가 착하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좋은 친구들이 있을까.
혜원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소연이도 있고, 지민이도 있고...."
그렇게 계속 읊던 혜원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휴... 엄청 많아서 다 못 말하겠다."
"전부 착해...?"
"응! 다연이 오면 다 좋아할 거야!"
정말 좋아할까.
문득 다연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만난 적도 없어서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혜원이는 정말 운이 좋게 친해진 거였지만.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다 같이 놀면 재밌어!"
"응..."
그래도 조금 걱정된다.
아마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는 이런 기분이 사라지지 않겠지.
좋으면서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진짜야! 그러면 내가 어린이집에 어떤 친구들 있는지 말해줄게!"
"정말?"
"응."
다연이는 그 말에 조금 관심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그 곳에 있는 아이들이 어떤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말해줘."
"음... 일단 지민이는..하민이랑 쌍둥이야! 지민이는 여자고 하민이는 남자."
"쌍둥이?"
그 말을 듣고 다연이의 눈이 커졌다.
난생 처음 듣는 말이다. 6살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말.
"그게 뭐야?"
"음.... 쌍둥이는... 동시에 태어난 거라고 선생님이 그랬는데...."
혜원이는 자기도 잘 모르는 듯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랬는데.... 잘 모르겠어."
"그러면 나중에 오빠한테 물어봐야겠다."
정확한 답변을 못해서 살짝 힘이 빠져있던 혜원이는 다시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둘이 나이가 똑같아!"
"그러면.... 누가 오빠고 누나야?"
"어..... 지민이가 하민이한테 오빠라고 하던데... 나이는 똑같아."
둘은 점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나이가 똑같은데 오빠라니. 특히 다연이는 더 모르겠다.
"아무튼! 지민이랑 하민이도 착해! 조용하긴 한데 엄청 착해!"
조용하다면 오빠 같은 걸 말하는 건가, 하고 다연이는 잠깐 생각했다.
오빠 같은 친구가 있는 거면...
"엄청 좋을 것 같아!"
좋다. 그것도 많이.
오빠는 착하고 다연이한테 잘해준다.
"근데 전부 설명하면 하루 종일 걸려!"
"그러면 그만 해도 돼."
"내일 어린이집가면 다연이 온다고 말할게!"
"응, 고마워."
혜원이가 말해준다면 좋은 거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 익숙한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온다.
다연이와 혜원이는 이야기를 그만두고 그 냄새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냄새야?"
잠깐 냄새를 맡던 혜원이가 물었다.
다연이는 이 냄새가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요 며칠 간 지겹도록 많이 맡았던 냄새. 하지만 정말로 지겹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군침이 흐르게 한다.
"김치찌개다아...."
다연이는 오빠가 만들어준 모든 음식이 그렇듯 김치찌개도 엄청 좋아했다.
물론 맵고 자극적이라고 오빠가 한 숟가락 밖엔 안 줬지만.
실제로도 매워서 한 숟가락 밖에 못 먹겠다.
대신 오빠는 고기를 줬다.
"고기.."
그래서 이 냄새를 맡으면 고기가 생각난다.
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