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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얼굴로 나를 보는 다연이.
뭔가를 열심히 그리다가 색연필을 툭 내려놓았다.
얼마 전에 샀던 것 같은데 벌써 저렇게나 닳았다. 다음에는 크레파스도 같이 사줘야겠다.
“그럼 나 어느 어린이집에 다녀?”
설레는 얼굴로 말한다.
지금 다연이는 엄청 긴장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했던 말 때문이겠지.
혜원이랑 같은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말.
“다연이는 어디인 것 같아?”
내 질문에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혜원이랑 다른 어린이집....”
다연이의 어깨가 축 쳐졌다.
요즘 들어 혜원이 가족이 자주 식당을 방문했다.
첫 만남 때의 인연 때문인지 정말 음식 맛이 인상 깊었는지, 아니면 다연이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자주 방문한 만큼 둘은 친해졌고 나도 혜원이의 부모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예전의 나였으면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니야, 혜원이랑 같은 어린이집이야.”
“어...? 정말?”
“응, 정말.”
다연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티는 안 냈어도 나름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우와! 우와!”
“혜원이랑 같은 어린이집 다니는 게 그렇게 좋아?”
“응! 여기에서 친구는 혜원이 밖에 없어서!”
둘은 그 사이 정말 많이 친해졌다. 서로 편하게 대화도 할 만큼 말이다.
원래 다연이는 낯선 사람들에겐 말도 잘 걸지 못했다.
지금이라고 전보다 많이 변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혜원이 가족에게 만큼은 조금 달랐다.
“우와!”
다연이는 펄쩍펄쩍 뛰더니 나한테 와락 안겼다.
“오빠, 고마워! 같은 어린이집 다니게 해 줘서!”
“그래, 열심히 잘 다녀야 돼. 친구랑 잘 놀고."
"응!"
다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나도 잊지 말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다연이가 품 속에서 펄쩍 뛰었다.
"안 잊어! 오빠는 절대 안 잊어!"
"그래."
그리고 다연이가 내 품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아까와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은데.
"오빠."
"응?"
"나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이랑 잘 놀 수 있겠지? 혜원이도 있으니까."
"그럼. 잘 놀 수 있을 거야."
다연이도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낯을 많이 가린다는 것 때문이겠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다연이가 배시시 다시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오빠도 나 없을 때 울면 안 돼."
"안 울어."
"내가 우는지 안 우는지 보고 있을 거야."
"그러면 어린이집은 어떡하고?"
"헤헤."
다연이가 가볍게 웃고선 내 품을 벗어난다. 그러곤 테이블로 걸어갔다.
"내가 엄청 좋은 그림 그려줄게! 이거 있으면 지켜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 그림이길래 감시까지 할 수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당한 태도의 다연이를 보는 것도 재밌다.
“다연이가 그림 그리는 거 보고 있어도 돼?”
“응! 상관없어.”
다연이는 빈 스케치북을 펼쳐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밑그림이라고 해봤자 색연필로 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연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스슥.
하얀 스케치북이 다연이의 손짓에 따라 채워져 간다.
마치 빈종이 위에 열정을 쏟아내는 화가 같은 손놀림이다.
수십 번 색깔을 바꿔가면서 가장 완벽한 색을 찾는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강렬한 색의 선택과 추상적인 그림을 선보인다.
모두가 탄성을 내지를 만한 실력이다.
“다 됐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나야!”
네모난 다연이였다.
정확하게는 다연이라고 주장하는 그림. 몸은 네모고 얼굴은 동그랗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그냥 6살짜리 여자아이가 그린 그림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진짜 잘 그렸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연이가 처음으로 그렸던 그림과 비교하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오빠 표정은 안 그래.”
“아니야, 진짜 잘 그렸어. 나보다 훨씬 잘 그리는데.”
그 말에 다연이가 살짝 미소 지었다.
“오빠는 그림 못 그려.”
다연이 말대로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저번에 다연이와 같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가 다연이에게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그려 줄게. 오빠는 그림 못 그려도 괜찮아. 내가 그려 줄 거니까.”
그리고 자기가 그렸던 그림을 뜯었다.
“오빠, 테이프 줘.”
“응.”
나는 익숙하게 테이프를 내밀었다.
이런 부탁은 이제 너무 익숙하다.
다연이는 테이프 조각을 들고 주방 안 쪽으로 들어간다.
색칠놀이 책과 색연필을 사 준 뒤로 다연이는 그림에 잔뜩 재미가 들려서 이것저것 그리기 시작했다.
색칠놀이 책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스케치북도 사 줬는데 그림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저렇게 테이프를 들고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물론 완성된 그림이 다연이 마음에 들어야 벽에 붙여질 자격을 얻게 되는 거지만.
“여기에서 내가 지켜볼 거야.”
다연이가 그림을 붙인 곳은 주방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복도와 주방이 붙어있는 곳.
“그렇게 하면 나를 볼 수 있는 거야?”
“응! 눈을 이렇게 감고 있으면 보여.”
다연이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웃긴지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나도 그런 다연이와 어울려 주고 싶었다.
“그럼 눈 감아봐. 다연이는 눈 감아도 볼 수 있으니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응! 그러면 내가 눈 감을게!”
그리고 다연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보여?”
“응!”
다연이가 큭큭대면서 웃는다.
“내가 뭐하고 있게?”
“음....”
내 말에 다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생각을 하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그냥.. 나 보고 있어!”
다연이가 답변을 기다리면서 침을 꼴깍 삼킨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맞았어.”
“와! 내가 맞췄어!”
다연이가 방방 뛰면서 좋아한다.
하긴 내가 다른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을 테니.
“오빠는 가만히 있어서 맞추기 쉬워!”
“다음에는 다연이 못 맞추게 다른 행동 해야겠다.”
“그래도 맞출 수 있어!”
다연이는 뭐가 그러게 웃긴지 큭큭 거리면서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 품에 폭 안긴다.
이제 나에게 안기는 건 다연이가 틈만 나면 하는 행동이었다.
정확하게 안기는 것 보단 기대는 거지만.
“어쨌든 내가 저기서 오빠 보고 있을 거니까 그림 떼면 안 돼.”
“안 땔 거야. 다연이가 때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울어도 안 돼.”
“안 울어.”
다연이가 내 다리에 기대서 나를 올려다본다.
“울면 놀릴 거야.”
“나도.”
다연이와 처음 만났을 때 울었던 걸 말해줄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말았다.
“그러면 나는 언제부터 어린이집에 가는 거야?”
“이틀 뒤에.”
“이틀...?”
“아, 미안. 두 밤 자고 나서.”
“두 밤..!”
다연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하나, 둘 하면서 센 다음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
다연이는 조금 긴장되는지 내 손을 꾹 잡았다.
꾸욱.
많이 긴장되는 모양이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딸랑.
분식집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다.
“안녕, 아저씨!”
“혜원아, 아저씨 아니고 오빠야. 그리고 존댓말 써야지.”
“아, 맞다..! 안녕하세요, 오빠!”
식당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혜원이 가족이었다.
오늘은 엄마, 아빠, 혜원이 모두 왔다.
“어서 오세요.”
“안녕 하세요. 다연이도 안녕.”
“안녕 하세요!”
다연이가 이렇게 밝게 인사를 하는 데 까지만 해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내 옷자락을 잡은 채 작게 인사했지만 혜원이와 친해질수록 자신감도 늘어갔다.
혜원이의 엄마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젊었다.
자세한 사정 같은 건 모르지만 꽤 일찍 결혼해서 혜원이를 낳게 된 것 같다.
“혜원아!”
“응?”
내가 바쁘게 인사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혜원이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 두 밤 자고 햇살 어린이집에 다닌데!”
잠깐 멍한 얼굴을 하던 혜원이가 이내 무슨 말인지 깨닫고 가득 미소를 지었다.
“우와! 진짜? 오빠 진짜요?”
“응, 정말로.”
“우와!”
혜원이가 펄쩍펄쩍 뛰었고 다연이도 웃었다.
저렇게 뛰고 있으니 꼭 개구리 같다.
“혜원아, 식당에서 뛰는 거 아니라고 했지?”
“응, 그랬어.”
엄마의 경고가 떨어지고 나서야 혜원이는 뛰는 걸 멈췄다.
혜원이의 엄마는 지난 번, 혜원이와 처음 만난 이후로 종종 우리 분식집에 방문했다.
그 때 마다 혜원이를 데리고 있었고,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가면서 꾸준히 왔다.
혜원이가 다연이와 놀고 싶다고 했다는데 같은 어린이집에 갈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혜원아, 우리 안에서 놀래?”
“그래!”
그래서인지 둘은 만날 때마다 이렇게 놀곤 했다.
“오빠, 나 혜원이랑 놀아도 돼?”
그럴 때마다 이렇게 묻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응.”
“뒷마당도, 2층도 가도 돼?”
“응, 돼. 대신 2층에는 어지럽히면 안 돼. 알지?”
“응, 알겠어.”
늘 똑같은 질문이다. 이렇게 물어봐도 2층에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엄마, 나도 다연이랑 놀아도 돼?”
“응, 대신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알겠어!”
“잠깐, 가기 전에 뭐 먹을지 말해야지.”
“나는 아무거나 다 좋아!”
혜원이는 그렇게 말하고선 다연이 뒤를 따라 쪼르르 사라진다.
그렇게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니 이 곳에는 나와 혜원이 부모님만 남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조금 어색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연이 진짜 햇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거예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첫 만남 이후로 이런 상황이 자주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혜원이 가족과도 많이 친해졌다.
“다행이네요. 혜원이도 매일 여기 오자고 난리였는데.”
“다연이도 친한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죠.”
얼핏 들은 바로는 혜원이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많은 정도고.
일찍 결혼해서 혜원이를 키운다고 고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혜원이 부모님이나 나나 이걸 고생한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는 혜원이를 저렇게 착한 아이로 키울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다연이는 이틀 뒤부터 온다고요?”
“네,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여기에 더 자주 와야겠네. 이제 많이 마주칠 거 아니에요. 더 친해져 놔야지.”
혜원이 부모님들이 서로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왜 결혼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서로 도와주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네, 안 잊었어요.”
둘은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줬다.
다연이 어린이집 문제부터 시작해서 실질적인 식당의 매출까지도.
정말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고 싶다.
“지훈 씨도 무슨 일 있으면 저희한테 말하세요. 다연이 잠시 맡아주는 것쯤은 할 수 있으니까요. 연락처 삭제 안 했죠?”
“네, 아직 있습니다.”
자주 만나다보니 어느 새 연락처까지 교환하는 사이가 됐다.
아직까지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혜원이 엄마의 말을 이어서 아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전화 안 받으시면 안 돼요.”
“네.”
둘은 내가 보기에도 조금 신기한 부부였다.
보통 내가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행동하면 이상해서라도 거리를 두기 마련인데 둘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가끔 이렇게 장난을 치기도 했다.
왜 혜원이가 저렇게 착하게 클 수 있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뭘 주문하시겠어요?”
“아, 그렇죠! 주문하는 걸 잊고 있었네.”
둘이 메뉴를 결정할 때까지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다.
“저희 주문할게요!”
“네.”
“김치찌개 하나랑 밥 하나, 김밥 한 줄, 떡볶이 이 인분 주세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조금 복잡하게 시켰죠?”
“괜찮습니다. 그럼 얼른 해드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김치찌개라.
김치찌개는 손님들이 식사로 많이 찾는 메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 나는 그 냄새가 요리를 더 즐겁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배가 고파졌다.
그러면 시작해볼까.
김치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