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같이 살게 된 후로, 민재는 지환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있었다. 사실은 원래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지환은 상당히 집요한 면이 있었다.
우선 지환은 한번 꽂히면 마음에 들 때까지 청소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구역별로 광이 날 때까지 청소를 하는 타입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청소를 해 두었다가는 괜히 잔소리를 들었던 민재는 그 후로 청소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지환은 정말이지 민재에게 집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에는 지독하다 싶으리만큼 민재에게 들러붙었는데 처음엔 좀 짜릿하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지환의 체력을 민재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민재는 이제 조금 있으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러나 반면 아직 지환은 이십 대 초반이었다. 그러니 민재가 지환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지환이 민재의 몸 위로 팔과 다리를 올렸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지만 여름 날씨라 아침에도 더웠다. 민재는 지환의 팔을 슬쩍 밀었다.
그러자 이번엔 지환이 민재의 배를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쪽. 쪽 어깨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또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민재는 그렇게 예감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 왜에.”
지환이 칭얼거리듯 말하며 민재를 다시 눕히려고 애썼다. 최근 들어 지환은 은근히 고집과 어리광이 늘었으며 그와 비례하듯 반말의 횟수도 늘었다. 딱히 신경 쓰이는 건 아니고 연인 사이에 굳이 그런 상하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내버려 두었더니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일해야 돼.”
하아. 지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은 못내 아쉬운 듯 민재의 허벅지와 허리 쪽을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민재는 참다못해 지환의 팔을 걷어차고 말았다. 악. 지환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아. 공벌레다. 지환이 이렇게 웅크려 있을 때는 풀어주기가 어려웠다. 세게 걷어차려던 게 아니었는데. 간지럽다 보니 발이 먼저 나갔다. 그걸 지환 또한 모르기 어려울 텐데.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민재는 또 속아 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봐봐.”
힝. 지환이 우는 소리를 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지환의 허리가 휙 하고 펴졌다.
“반칙이에요, 선배.”
“네가 먼저 했잖아.”
“나 아픈데.”
지환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지만 민재는 그 웃음에 약했다. 어쩔 수 없지. 민재는 지환의 가슴을 밀어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나서야 민재는 지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땀에 젖은 몸으로 헉헉대고 있는 걸 지환이 따듯하게 데운 수건으로 닦아 주고 있을 때, 민재는 늘어진 채 현재 법안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 민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에스퍼의 위치가 달라질지도 몰랐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나은 교육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지환은 민재가 모든 걸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선배가 모든 걸 하려고 들지는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게 쉬운 건 아니었다.
그래서 민재는 최후의 수단을 생각했다.
“이제 바쁘니까 스킨십 금지야.”
따듯한 수건이 몸 위를 배회하다 딱 멈추었다. 경악으로 물든 지환의 얼굴을 보면서 민재는 밀려오는 수마에 빠졌다.
***
지환이 원했던 동거 생활은 이것과는 좀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재와의 생활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지환은 민재의 여러 모습을 독점할 수 있었다. 잘 때 아기 같은 모습이라든가, 막 일어났을 때 살짝 부은 얼굴이라든가 하는 것들. 그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 안길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어떤 몸짓을 하는지까지도 모두 지환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환의 애인님은 자꾸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왜냐면 우민재는 모두의 히어로니까.
무엇이든 지환은 민재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싶으면서도 이따금 자신만 좋아하는 우민재가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양극의 생각은 수도 없이 지환의 안에서 요동쳤다.
최근 법안 제정 관련해서 바쁜 것만 해도 그렇다. 지환은 민재가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것이 좋았다. 민재가 집중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했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자신의 애인이라는 것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법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지환 또한 알고 있었다. 민재는 나이가 들어 은퇴가 가능한 에스퍼의 세상을 원했다.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에스퍼들에겐 힘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자잘하게 민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환이 최근 속상한 이유는 바로 민재의 몸이었다.
민재는 최근 말라가고 있었다. 지환이 매번 끼니를 챙기는데도 안으면 척추뼈가 다 느껴질 정도였다. 지환은 민재의 척추뼈 개수를 헤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민재는 좀처럼 자신을 살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의 작은 상처는 그렇게 쉽게 마음 아파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선 정말이지 눈치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지환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물론 자신이 좀 자중하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서도 그래도 민재와 붙어 있는 시간을 줄이고 싶지는 않았다.
민재를 만질 때, 민재와 함께 있을 때 지환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우민재가 지환의 삶의 많은 이유이자, 구원이자, 행복이었다. 말라가는 데다 스킨십 금지까지 외친 상황만 제외하면 지환의 삶은 우민재로 충분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센터장실을 찾아간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비서인 윤오준을 찾아간 것이지만.
“…센터장님 부재중이신….”
“안 궁금해요. 어차피 있는 거 다 알아요. 저 들이지 말라고 한 것도요. 저는 비서님 만나러 왔어요.”
“…저를요?”
“네.”
윤 비서의 표정은 얼떨떨했으나 지환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무슨 일로 저를….”
“그… 비서 업무를 좀 배우려고요.”
무슨 소리야 이게, 라는 말이 윤 비서의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은근히 표정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최근 민재 선배가 대표직을 맡아서 너무 바쁘니까…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자 윤 비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비서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민재 선배의? 그것도 좋을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지환이 원하는 건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따지자면 그런 거죠.”
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업무 목록을 간략히 정리해서 주기로 했다. 지환은 고맙다고 하며 목록을 받아 들었다.
“나중에 최 실장… 아니 센터장님이 힘들게 하면 저한테 말해주세요.”
지환은 늘 윤 비서가 왜 최우석 센터장을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왔다. 멀쩡하고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 왜 싸가지 없는 사람을 좋다고 만날까 싶은 것이다.
그러자 윤 비서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석 씨랑 비슷한 소리 하네요.”
“…제가요?”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표정을 어필해 보았으나 윤 비서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윤 비서가 다음으로 한 말은 지환을 슬프게 했다.
“우석 씨도 민재 씨가 너무 아깝다고 그러거든요. 지환 씨한테 코 꿰어서 각인했다고요.”
센터장 잘라 버리라고 조만간 민재 선배 꼬셔야겠다. 지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환은 살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윤 비서가 뽑아 준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서류 감사합니다.”
“뭘요.”
윤 비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것도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표정이었는데, 좋은 쪽으로 윤 비서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지환은 센터장실을 나왔다.
지환이 보기에 비서의 업무는 집사의 업무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선 민재의 일정을 모두 확인하고, 민재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사실 평소에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던 일과 많이 다르지도 않았다.
조금 더 추가된 것이라면 영양분을 고려해서 식단을 짜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랄까. 이동도 지환에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지환은 우선 윤 비서의 도움을 받아 법안제정 회의 관련 자료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윤 비서의 추천 메뉴였던 샌드위치와 웰빙김밥을 포장해 집으로 향했다.
민재는 소파에 늘어진 채 종이를 얼굴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지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민재에게 다가갔다.
“선배. 밥 먹어요.”
“으어….”
민재는 거의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평소 보고서 등 서류라면 질색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저렇게 애를 쓰고 있지 않나. 지환은 마음 아픈 것과 별개로 그런 민재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서류에 파묻혀 있는 지환은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지환은 민재의 곁에 다가가 서류를 순서대로 정리해서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두고는 음식의 포장을 열었다.
그러고는 민재의 입에 한 조각씩 넣어 주기 시작했다. 거의 감은 눈으로 민재는 우물우물 음식을 씹었다.
“너 삐진 줄 알았는데.”
“삐졌는데.”
아무리 그래도 스킨십 금지는 좀 심하긴 했다. 지환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삐졌다고 말하자 민재는 그런 그를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이거 먹고 나서는 선배 어제 말한 미팅 가요. 인터뷰 있다면서.”
“아….”
민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높은 등급을 홍보하듯 하던 인터뷰였으니 싫어할 만했지만 최근 민재는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이 있어 보였다.
에스퍼 쪽 입장을 밝히는 데 필요하다면 인터뷰에도 진지하게 임했다. 에스퍼 법안의 세부 사항들은 모두의 관심을 꽤나 사고 있는 부분이었으므로 민재의 어깨가 더 무거울 터였다.
“그리고 내일은 옷 좀 사고요. 맞춤으로.”
“응.”
“중간에 쉬고 싶으면 말해요. 내가 다 알아서 해 준다.”
지환의 말에 민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우물거리던 걸 멈추고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재가 이따금 그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그의 눈빛이 어떠한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마 본인은 모를 것이다. 지환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고마워.”
“…네?”
“고맙다고.”
꼭 두 번 말하게 해. 투덜거리는 민재의 볼에 지환은 입을 가져다 대었다. 민재는 그러자 또 작게 웃었고, 지환은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지환은 민재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민재의 곁이라면 비서가 아닌 무엇이 되든 상관없다고 지환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