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비상시에는 우선적으로 가이딩 약품을 섭취 후 자신의 몸을 보호하며….”
이전과 달라진 내용의 안전교육을 하는 목소리가 교실 안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호영은 칠판 크기의 패드에 글씨를 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그만 좀 잘래?”
그러자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던 것을 멈추고 안 잤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호영은 코웃음을 쳤다.
“다 봤다. 이놈들아.”
“선생님. 너무 졸려요.”
호영은 센터에 머물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한때 센터의 실장이었지만 지금은 갓 센터에 입성한 어린 친구들의 안전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민재의 배려로 호영의 퇴임은 조용히 묻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가 어째서 실장 자리에서 내려가게 되었는지 그의 능력 여부가 까발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선생님 재밌는 이야기 해 주세요.”
매주 있는 수작이었다. 호영은 한숨을 삼키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재밌는 이야기.”
“민재 대표님 이야기요!”
아. 호영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매번 민재 선배의 이야기 아니면 호영의 첫사랑 이야길 해달라고 했다.
사실상 호영에겐 딱히 첫사랑이 없는 편이니 해 줄 수 있는 건 민재 선배의 이야기밖에 없었다.
호영도 예상한 결말이었지만, 결국 우민재는 센터관리부 대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상징적으로 센터는 완벽하게 정부 소속이 되었고, 관련해서 여러 가지 지원이나 복지 및 규제를 함께 받게 되었다.
오히려 에스퍼에게 좋지 않아졌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이제 에스퍼의 존재가 어정쩡하게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은 아니게 된 셈이었다.
이전의 에스퍼는 정확히 정부 소속이라 하기도 애매하며 사립 센터 소속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하게 정부 소속이 되었고, 테러 사건 수사 및 구조 관련 업무를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점이 달랐다.
이와 관련된 사항은 이서연과 신태현 그리고 우민재가 법정에 낸 자료들을 통해 그간 센터 운영자금이 타국에 신무기를 판매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과 비리를 저지른 대기업이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큰 변화를 이루었다.
어찌 되었건 변화의 중심에는 우민재가 있었으니 알맞은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표직을 맡았지만 우민재는 최근 신출귀몰했다.
팀장직을 버리지 않아 종종 구조 활동에 참여하는 모양이었지만 이전에 비해 테러의 빈도가 많이 줄어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신비주의’ 같은 콘셉트가 되고 말았는데 호영이 수업을 할 때면 아이들은 언제나 민재에 대한 가십을 듣고 싶어 했다.
물론 호영은 많은 시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 그런 여러 가십에 대해 이야기할 마음은 없었다.
“민재 선배는 말이야. 힘이 엄청 세신데… 너희 은정 실장님 알지.”
“네!”
“그분한테는 못 이긴다?”
“와! 진짜요? 그럼 은정 실장님이 더 세요?”
“근데 은정 실장님은 민재 대표님 말로 못 이겨.”
“뭐야 그건.”
“그럼 누가 이겨요?”
호영은 아이들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얼른 잘 배워서 임무 나간 다음 이기면 되겠네.”
“좋아요! 저 은정 실장님 이길래요!”
“그럼 안전을 잘 알아야겠지?”
우우. 야유가 튀어나왔다. 호영은 웃으면서 다시 패드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이젠 더 이상 히어로 임무를 하지는 못하는 몸이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적어도 히어로를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재는 호영에게 이 일이 가장 어울릴 거라고 말했다. 민재의 방식으로 하는 커다란 인정이었고 호영은 그게 고마웠다.
호영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 아이들은 나중에 우민재나 여은정 같은 히어로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하다는 걸 호영은 꽤나 뒤늦게 깨달은 셈이었다.
***
민재는 사무실을 되찾았다.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공간이지만 최근 민재는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었다.
다른 커다란 사연이나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다만 나가기 귀찮아서였다.
지환은 집고양이인 양 민재가 있는 공간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시간을 보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이 좋으면서도 걱정되었다.
“너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네.”
지환은 이번 일이 있고 난 후로 요직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지환은 팀원으로서 민재의 곁에 있긴 하겠지만 자신은 민재의 ‘가이드’로서 활동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민재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당차게 외치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긴 가이드로 살고 싶다며 뒹굴거리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민재는 보기 싫은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다가 이내 지환의 곁에 가 앉았다. 그러고는 지환의 손목과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네?”
지환은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때 나 없을 때 김진성이 많이 괴롭혔어?”
“….”
지환은 잠시 민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 괴롭혔어요.”
지환의 대답에 민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환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민재는 최근 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었다. 지환이 갑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라든가 지환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다쳐오면 어떡하지 하는 뜬금없는 공포였다.
심지어 지환이 어느 순간 예쁜 여자애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제야 민재는 자신이 지환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환을 특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환도 처음부터 남자인 민재를 특별하게 여겼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민재는 지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환이 나른한 한숨을 흘리며 민재의 허리를 껴안아 왔다.
지환은 이럴 때 꼭 민재의 허리께를 간지럽혔다. 민재가 몸을 부르르 떨자 쿡쿡 지환의 목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선배가 이럴 때가 좋아.”
지환의 목소리가 민재의 볼과 이마에서 울렸다. 옅은 진동이 따듯하게 민재의 얼굴을 덥혔다.
“선배는 모두를 구하려 드니까.”
지환이 중얼거렸다. 누가 할 소리를. 민재는 지환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두고 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민재에게 화를 내면 모를까.
민재는 문득 지환이 자신에게 화를 냈던 날을 떠올렸다. 까마귀 단체에 갇힌 아이들을 바로 빼내지 못했다고 화를 냈지. 지환은 누구보다 빠르게 사람들을 구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할 소리를.”
“가끔은 선배가 나만 불쌍해하면 좋겠어요.”
지환은 졸린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도 했던 말 같은데. 민재는 그 의미가 무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진짜 많이 힘들었으니까… 맨날 걱정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해야 돼요.”
지환의 말이 웃겼다.
“그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해 줘야 한다고요.”
“알겠어. 네가 안 질리면.”
민재가 그렇게 말하자 지환이 갑작스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가.”
“질린다는 거. 무슨 소리냐고요.”
민재는 꽤 심각한 지환의 얼굴에 당황했다.
“아니… 계속하다 보면 네가 귀찮아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선배는 귀찮을 거 같다는 거예요?”
뭐야. 지금 왜 내가 추궁당하고 있는 건데. 민재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귀찮을 거 같다고 했어?”
“선배가 그렇게 느끼니까 내가 그럴 것 같다는 거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되나?
“…안 귀찮은데.”
민재의 목소리는 작았다.
“…뭐라고요?”
“안 귀찮다고. 너 걱정하고 쓰다듬는 거.”
지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따지고 보면 각인을 응한 것 외에 민재가 이런 식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일은 잘 없었기 때문인 듯했다. 민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아… 진짜. 귀여워 가지고.”
지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민재의 허리께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가이딩 안 필요해요?”
필요할 리가. 하루의 대부분 가이드랑 붙어 지내는 에스퍼가 바로 우민재였다. 더군다나 여긴 센터였다. 방음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안 돼.”
“필요한 거 같은데. 손목 봐봐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환은 은근슬쩍 민재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민망한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야. 나 잘라줘.”
대뜸 자신을 잘라달라고 우석이 찾아왔다.
지환의 볼이 불룩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혀로 입 안쪽을 굴리고 있는 것이었다.
뭐라고 생각하는지 다 보였다. 민재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우석을 바라보았다.
“왜 또.”
“…너희 일 안 해?”
소파에 꼭 붙어 앉아 있는 둘을 보고 우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누군 대표님 때문에 기념일도 제대로 못 챙기고 일.하.고 있거든요? 나 잘라. 빨리 잘라.”
우석은 꽤 억울한지 민재의 앞에 실제로 사직서를 내밀었다. 민재는 빠르게 그 서류를 낚아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우석의 입이 헤벌어졌다.
“무슨… 짓이야?”
“또 오준 씨랑 싸웠어?”
민재의 말에 우석이 잠시 침묵했다. 꼭 본인 애인이랑 싸우면 와서 나한테 화풀이하더라. 민재는 한숨을 삼키고는 선심을 쓰듯 말했다.
“오늘 퇴근해. 둘 다.”
“…진짜?”
“어. 서류 업무 뭐뭐 있어. 주고 가.”
우민재가 서류 업무를 해 준다는 건 말을 다 한 것이었다. 우석은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결재 받을 게 많았지. 이 새끼야. 기다려라.”
우석은 신나서 팔을 팔랑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민재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아.”
“네?”
“문 잠글래?”
민재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지환은 눈을 빛내며 후다닥 문을 잠그고는 소파로 다시 뛰어들었다.
민재는 여전히 늘 결정하는 자리에 놓여 있었고, 버거운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이따금 바보 같은 짓을 함께할 지환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지환의 입술이 닿아오는 걸 느끼면서 민재는 눈을 감았다. 저 잠긴 문은 아마도 곧 우석이나 은정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 그때까진 지환과 달콤한 키스를 즐기리라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