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민재는 자고 있는 사이 바닷속에서 자꾸 커다란 문어한테 쫓기는 꿈을 꿨다. 문어는 무슨 속셈인지 다리들로 민재를 감고 몸을 죄어 댔는데 열 받아서 떼어놔도 계속 들러붙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민재는 그게 지환의 팔과 다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번 밀쳐 보았으나 이내 다시 들러붙는 게 영락없는 문어 괴물이었다.
어제 지환과 새벽에 잠들어서 허리가 욱신거렸다. 민재는 지환을 노려보다가 그의 콧잔등에 딱밤을 놓았다.
“아….”
지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쭉 내밀더니 민재의 몸을 더 옥죄어 왔다. 지환의 팔다리가 민재를 칭칭 동여맸다.
“야… 아파.”
민재가 작게 신음하자 지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 반쯤 일어나는 자세가 되었다.
“어디 가요.”
까치집을 지은 머리에 푹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땅을 파고드는 낮은 음성으로 심각하게 묻자 어디 테러라도 난 것 같았다.
민재는 지환의 그런 꼴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인 지환을 손바닥을 쭉 밀어냈다.
“허리가. 이 새끼야.”
“아.”
지환은 눈을 끔벅이더니 민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제 옷을 입을 생각도 못 하고 잠든 탓에 민재의 상반신은 맨몸이었다.
간질거리면서 뾰족한 감각이 들었다. 지환은 자주 이렇게 민재의 가슴팍이나 등을 물곤했는데 그게 진짜 개 같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아프다고.”
“그러니까. 가이딩 할까?”
지환이 눈을 접으면서 웃었다. 어제 가이딩 한다고 설쳐서 허리가 아픈 건데 개소리야. 민재는 정색하고는 지환의 얼굴을 다시 밀어냈다.
그러고는 침대 옆 탁상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를 틀었다. 그러자 지환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민재가 편하게 누울 수 있게 뒤통수에 팔을 밀어 넣어 팔베개를 만들었다.
신경준이 잡혀 들어가고, 민재와 지환은 몇 주째 칩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환이 먼저 제안했고 민재가 받아들였다.
둘에게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TV와 둘을 다급하게 찾는 전화와 방문으로부터만 외부의 소식을 접했다.
지환은 민재가 외부와 접하는 걸 최대한 줄이길 바랐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민재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뉴스를 확인했다.
물론 이렇게 둘이 보내는 데에는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제대로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론 민재가 능력을 공개된 장소에서 다시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능력을 찾은 건 좋은 일이었으나 SSS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가 그게 갑자기 사라지는 건 또 다른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민재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꽤 좋아했으며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뉘우쳤다. 등급이 낮아졌으니 능력이 불안정해졌을까 봐 매번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재는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현재 상태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민재는 그 자신과 싸우고 있었고, 지환이 늘 곁에 있었다. 민재는 지환의 몸 쪽으로 살짝 돌아누웠다. 그러면 지환은 민재의 정수리에 턱을 살짝 괴었다.
[신경준 전 국회의원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인 신태현은 자백한 것을 참작해 3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결국 종신형이네.”
신경준의 재판은 여느 때와 달리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국민의 여론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모두 공판으로 진행된 데다 배심원까지 동원해 내린 판결이었다.
신경준의 테러로 히어로 센터의 인물들뿐 아니라 일반인도 목숨을 잃었다. 그가 아무리 자신은 평등을 위해 싸울 뿐이었다고 말해도 거의 학살에 가까운 테러를 시도한 자로 기억될 것이다.
[센터 관리부의 대표직은 히어로 우민재에게 제안이 들어간 상황이며….]
민재는 리모컨을 들어 그대로 TV를 종료시켰다. 그간 지환의 폰을-민재의 폰이 아직 없다.- 불나게 울렸던 안건이 바로 저것이었다. 정부에는 새로운 부처가 생겼다. 센터 관리부로 센터 내의 에스퍼 및 가이드들의 지원 및 복지 그리고 관리를 정부에서 맡겠다는 것이었다.
진즉에 이루어졌어야 하는 일들이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에게 친화적 이미지가 필요하니 다시 민재가 센터의 ‘대표어쩌고’하는 마스코트가 되어 달라는 정부의 제안이었다.
민재는 지금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지환의 폰이 울렸다. 다만 이번에는 민재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늦으면 죽는다.
-야. 올 거지? 안 올 거 아니지?
두 통이나 재촉 문자를 보낸 사람은 우석이었다. 오늘은 우석의 센터장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
지난 몇 주간, 우석은 거의 제집 드나들 듯 민재와 지환의 공간을 드나들었다. 의도는 민재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네가 해야 한다니까.”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 민재는 친우인 최우석 실장이 센터장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공표를 해버렸다.
그것으로 멱살도 두어 번 잡혔고 그 후로는 다들 납득해 줄 것이라며 민재에게 센터장을 맡으라고 설득을 해왔다.
“난 솔직히 실장으로 있어도 실무를 많이 보지 않았잖아. 내가 어떻게 센터장을 해.”
“야. 나야말로 어떻게 센터장을 해. 난 반동분자야. 알잖아!”
“그러니까 너 같은 애들이 대표를 맡아야 여기가 잘 굴러가지.”
아악! 우석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지환은 자신의 몸 뒤로 민재를 보냈다. 민재는 에스퍼고 우석은 가이든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후반에 우석은 거의 울면서 민재에게 부탁했다. 요는 센터장을 맡기 싫다는 거였다.
“야… 내가 평생 센터장을 증오해 왔는데 내가 그 자리에 어떻게 오르냐.”
“누군 사랑했고?”
실험을 당했던 건 민재였다. 언제나 이용당해 최전선에 있었던 것도 민재였다. 민재가 ‘누가 더 불쌍해?’ 카드를 꺼내 들자 우석은 군말 없이 민재가 던진 폭탄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윤 비서를 다시 비서직에 앉혔다고 한 걸 보니 둘이 잘 해낼 것 같았다.
“그럼 너 실장직은 계속 하는 거지?”
라는 우석의 질문을 들었을 때 민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고, 다시 한번 그를 뒷목 잡게 했다.
민재는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센터의 이미지를 위해서 홍보 모델처럼 앞에 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서 명령을 하달하고 책임지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오라고!
우석은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식이 있기 두 시간 전부터 오라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어차피 자기 애인이 옆에서 다 도와주고 있을 텐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는데 말이다.
“또 재촉해요?”
지환이 그렇게 물으면서 민재의 허리를 은근히 쓰다듬었다.
이 새끼가. 민재는 손을 들어 올려 찰지게 지환의 손등을 내리쳤다. 착! 하고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
“좋은 말로 할 때 하지 마라.”
“이미 좋은 말로 안 했잖아요.”
지환은 툴툴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민재는 몸을 움직여 보려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허리에 힐을 썼다. 문제는 이게 외상이 아니라 완전히 낫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민재가 삐걱거리는 허리와 씨름하는 사이 지환은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정리하더니 빗을 가져와 민재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에 물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아 애야?”(내가 애냐?)
“선배 입을 옷 내가 골라놨어요.”
민재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환은 옷장에서 쇼핑백을 꺼냈다. 그러고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정장을 꺼내는 게 아닌가.
“…그게 뭐야?”
“우리가 오늘 입을 옷이요.”
지환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민재는 지환의 떼에 졌다. 떼를 어찌나 잘 쓰던지 민재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들어 올린 손과 발에 지환이 셔츠와 바지를 끼워 넣었고, 머리까지 뒤로 넘겨 주었다.
민재와 지환은 취임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우석은 매우 매서운 눈초리로 민재와 지환을 쏘아보더니 툴툴거렸다.
“야. 너희 무슨 결혼식 올리냐!”
민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환이 턱시도 같은 정장을 거의 디자인이 같은 것으로 뽑아와 누가 봐도 커플룩 같은 형태의 옷이었다.
“선배. 왔…네.”
살갑게 인사를 건네려던 은정은 지환과 민재의 옷이 거의 흡사한 걸 보고 잠시 말을 늘어뜨렸다.
“선배. 내가 선배를 몇주 만에 보는 건데 이런 꼴을 보여 주다니…! 너무 눈꼴사나워서 화가 나. 저 기둥 부숴도 돼?”
은정이 가리킨 것은 취임식에 중요하게 쓰일 강단 쪽 기둥이었다.
“되겠어? 너도 곧 올라가야 하는데… 이게 네 취임식 복장이야?”
오늘 은정은 에스퍼 실장직에 오른다. 그리고 민재의 추천으로 서연이 가이드 실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니 총 세 명의 취임식인 셈이었다.
서연은 정말 실장처럼 정장 슬랙스에 블라우스를 빼입고 왔는데, 은정은 작업복을 입고 왔다. 그것도 새것이 아니고 입던 것이라 군데군데 얼룩 같은 것이 지워지지 않은 옷이었다.
“어.”
“미친 거야?”
우석은 자신의 애인이 공들여 준비한 행사에 오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하다못해 작업복이라도 멀끔한 걸 입고 오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은정은 귀찮다는 듯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정말이지 센터에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벌써 센터장 다 된 거 같지 않아?”
민재가 중얼거리자 지환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우석의 취임사는 매우 진부했다. 어디 인터넷에서 찾아온 것인지 센터의 역사부터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고 어쩌고 한참 말이 길어졌고 대부분의 에스퍼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민재는 강단 옆쪽에 서서 계속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윤 비서를 보고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은정은 잘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만 했으며, 서연 또한 간단하게 소감을 얘기했다.
“…정말 아깝지 않아?”
다시 민재의 곁으로 와 앉은 은정이 물었다. 이제 실장이 된 사람이 묻기에 이상한 질문이었다.
“너 오늘 저기 있는 거 잘 어울리더라.”
민재는 은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정말로 아깝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아끼던 이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맑은 날씨에 축하를 위한 에스퍼들의 비행 시연식이 시작되었다. 물론 격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늘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뿌리는 에스퍼들을 보다가 지환이 민재를 끌어안았다.
“우리도 갈까요?”
민재가 웃자 지환이 날아올랐다. 꽃가루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