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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73)화 (17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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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준이 변호사를 잃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공판은 2차까지 열릴 예정이었지만 이미 끝난 거나 다름이 없다는 소문 또한 빨랐다.

서연은 꽃집에서 백합을 샀다. 하얀색이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다기보단 그녀의 엄마가 꽃병에 자주 백합을 꽂아 놓았던 것이 생각이 나서였다. 

경준은 세 번 만에 서연의 면회 요청을 받아들였다. 정확한 의도나 기분을 알 수는 없지만 태현이 그를 검찰에 넘긴 것이 서연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 듯도 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 날, 서연은 태현을 돌려세웠다. 자신을 끌고 나가려는 그를 붙잡고 자신은 할 수 있는 걸 할 테니 너도 그러라고 했다. 태현은 언제나 서연의 말을 잘 들었다. 서연의 부탁이라면 두 손 들고 나서는 타입이었으니 그 날도 그러했을 것이다. 

태현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고, 그래서 신경준은 지금 감옥에 있다. 

서연에겐 복잡한 일이었다. 단정하게 정장을 입은 옷매무새를 만진 서연은 심호흡을 하고는 면회실로 들어갔다. 

신경준은 면회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일반 면회라 따로 개별실을 마련할 수는 없었으나 정치범이라 일어질 트러블이 있어 일반 면회실을 비운 상태로 진행하게 되었다. 서연은 천천히 걸어가 신경준의 앞에 백합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네 어머니가 좋아하셨다고 한 거구나.”

의외로 신경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좀 어떠세요?”

“어떠냐고?”

신경준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서연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신경준은 죄가 많았다. 그리고 그 죄를 저지르는 데에 자신도 가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서연에게 신경준은 은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것을 정리하고 싶었고, 그래서 세 번씩이나 면회 신청을 하며 신경준을 찾아왔다.

“…태현이 소식은 좀 알고 있어?”

“태현이는… 종종 제가 찾아가고 있어요. 그래도 다행히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아요.”

“…쓸모없는 놈.”

신경준은 제 아들의 소식을 궁금해했으면서 혀를 차며 이내 서연의 말을 잘랐다. 서연은 한숨을 삼키며 말을 그만두었다.

“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

뜬금없이 신경준이 말했다. 서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구었다.

“이곳의 사람들이 날 비웃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신경준의 턱이 떨렸다. 그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서연은 씁쓸한 마음을 가진 채 몸을 일으켰다.

“건강 잘 챙기세요. 태현인 제가 끝까지 챙길게요.”

“…그래. 가라.”

신경준은 서연이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서연은 그런 신경준 앞에 놓인 꽃을 잠시 바라보다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감사했어요.”

신경준은 서연을 이용했다. 필요할 땐 모든 일을 시키다가 한순간에 그녀를 내치기도 했다. 그러나 서연은 어릴 적, 자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 밥을 챙겨 주고 엄마와 동생의 빈 무덤을 만들어 준 신경준을 완전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한때는 그가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신경준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감옥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건 신경준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의 선지자와는 전혀 다른 것이리라. 서연은 묘한 안도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며 면회실을 벗어났다.

***

민재는 왜인지 신이 난 채로 자신의 머리를 말려 주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의 손길에 따라 민재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신경준의 1차 공판이 지났다. 민재는 능력 검사에서 B급 판정을 받았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민재를 동정했다. 그러나 등급과 별개로 민재는 힐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 약물에 노출되었던 이후로 정말로 능력을 잃게 된 건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고 나니 지환은 센터가 완공되어가는 사이 민재를 데리고 다니는 걸 즐겨 하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옷까지 골라준 지환은 민재를 안아 들고 또 ‘드라이브’를 나섰다. 날아다니면서는 정말로 다른 커플들이 그러하듯 둘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주제는 조금 무거운 센터 운영에 관한 것이긴 했다.

“왜 싫은데요?”

“야. B급이 뭘 해.”

지환은 계속해서 민재에게 센터장을 맡으라고 했다. 이럴 땐 아주 우석과 죽이 잘 맞았다. 

“아님 네가 하든지.”

“전 가이드로 살 거예요.”

지환은 민재에게 들러붙는 다른 존재가 없는지 감시해야 한다며 눈에 불을 켰다. 그럴 때마다 민재는 지환이 자신 때문에 기회를 마다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그럼 우석이 시켜.”

“좋아요. 최 실장님 일 잘하시니까.”

“그리고 은정이 실장 시켜.”

“그것도 좋네요. 은정 누나가 군기는 잘 잡으니까.”

당사자들이 들으면 기겁하며 싫어할 이야기를 하며 지환과 민재는 놀았다. 이따금은 카페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실제로 운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둘이 일반인처럼 산다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아니. 커피를 밖에서 공수해 오면 카페를 왜 해요. 직접 타야지.”

지환이 핀잔을 줬다. 민재는 억울했다.

“야. 너 커피 잘 만들어? 못 만든 커피를 손님한테 내놓으면 어떡해.”

“아니….”

지환의 오늘 코스는 절벽인 모양이었다. 이전에 우석과 은정과 재회했던 곳이 좋다고 말한 뒤로 지환은 종종 민재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절벽에서 둘이 있다 보면 꼭 천국에 온 것 같다며 주접을 떤 것도 여러 번이었다. 

지환은 절벽 위에 민재와 함께 착지했다. 둘은 손전등을 켜고 웅크려 앉아 서로의 몸을 맞대었다. 낮이었지만 풀숲이 우거져 살짝 어두운 탓에 손전등을 켜두면 분위기가 요정이 사는 숲처럼 특별해져서 민재가 좋아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투닥거리다가 지환이 품에서 민재가 좋아하는 과자를 꺼냈을 때였다. 비명 소리가 민재의 귀에 들렸다.

민재는 혹시 자신에게만 들리는 것인가 싶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도 들리는 것인지 소리가 난 방향 쪽을 살피고 있었다. 

“…등산객인가 봐요.”

절벽 구석에서 조금 아래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중년 여성이 보였다. 그 위쪽은 등산로였는데 난간이 덜렁거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오래된 부분에 기대었다 떨어진 것 같았다.

크게 다친 건지 발목이 향하면 안 되는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정도면 고통이 심각할 터였다.

지환은 빠르게 그쪽으로 날아가 몸을 띄운 상태로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박지환!”

민재가 지환을 불렀다. 그러자 지환이 빠르게 민재 쪽으로 다시 날아왔다.

“같이 가.”

“…괜찮겠어요?”

지환이 물었다. 현재 민재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잠시 고민하던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힐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민재의 말에 지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재를 안아 들고는 절벽 구석으로 다시 날아갔다. 여자는 정신을 거의 잃은 것인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돌에 기대어 있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

여자는 아예 말을 할 수도 없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민재는 여자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불안정한 데다 느리고 희미하기까지 했다. 이대로 병원에 간다고 해서 이 여자가 살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만요.”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안내를 한 민재는 지환이 자신을 제대로 안도록 놔두고 입고 있던 셔츠를 손으로 북 찢었다. 그러고는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손에 힘이 실릴까 봐 민재는 긴장했다.

‘안 아프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민재는 우선 여자의 제대로 고쳐 누이려고 했다. 민재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았을 때였다. 민재는 여자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고 머리 뒤쪽 상처를 빠르게 살폈다. 그때였다. 갑자기 민재의 손에서 빛이 일었다. 

9살 때 첫 발현을 했을 때처럼, 빛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몸 안에 있는 샘에서 새어 나와 움직이듯이 빛은 유유히 여자의 돌아간 발목을 치료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목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말라붙어 가던 피딱지를 제외하고 여자의 피부는 멀끔해졌다.

다시 힐을 쓸 수 있다. 민재는 멍하니 여자의 멀끔해진 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재를 바라보다 눈물을 떨구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변화를 곱씹어 보기에는 시민이 있는 위치가 너무 위험했다. 민재는 여자를 안아 들고 지환과 함께 비행해 위쪽 등산로 중 안전한 곳으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한참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는 머뭇거리다가 민재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우민재 씨 맞죠? 세상에… 이 귀한 손을 그 나쁜 것들이….”

여자는 우민재를 알아보았다. 

“힘내요.”

구해준 건 민재인데 도리어 응원을 받은 것도 민재가 되어 버렸다. 민재는 실험 사실을 고백한 후 부러 대중들과 마주칠 만한 현장과 상황을 피했다. 능력 발휘가 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여태까지 시민들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민재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게 뭐야. 민재는 최근 지환과 다니다 보니 울보인 것도 옮았나보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인사와 덕담을 끝내고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러운 발길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민재와 지환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재는 갑자기 뒤를 돌아 지환을 보았다. 그러고는 지환의 얼굴을 붙잡고 힐을 사용했다. 하얀 빛이 옅게 일었다. 지환의 뺨에 새로 생겨 있던 생채기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괜찮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지환의 눈도 빨개져 있었다. 

내내 저주라고 생각했던 능력이었다. 그러나 민재는 해방감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 내내 끔찍한 상실감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을 구했다. 내가 사람을 구했어. 평소처럼. 원래 하던 것처럼. 

그 사실을 자각하자 민재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다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누군가 살려달라고 할 때, 그곳으로 갈 수 있다. 상처를 안고 돌아온 동료들을 치료해 줄 수 있다.

“사람을 구했어.”

민재가 속삭이자 지환이 맑은 하늘처럼 맑은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히어로니까요. 선배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지환이 마주 속삭였다. 

민재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민재가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 지환이 갑작스레 허공으로 민재를 던져 올렸다. 헹가래를 하는 듯한 자세였다. 

“야!”

허공으로 솟아오른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지환이 다시 그를 받아 드는 게 느껴졌다. 그다음으로는 지환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민재가 여러 번 구했으며 그를 구한 입술이었다. 그 입술이 달콤하게 입 맞춰 왔다.

민재는 밀려 들어오는 가이딩을 느끼며 빛을 내뿜었다. 둘의 머리맡에 있던 죽은 묘목에서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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