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72)화 (173/181)

172

[신경준 전 국회의원의 1차 공판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죄목 지정 및 최대 형량 선고 여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경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변호사가 내민 패드를 내려다보았다. 죄다 이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만 떠들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슈가 이렇게 망가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걸 견디기가 어려웠다.

“히어로 센터는 어떻게 되었지?”

“재건되고 있습니다.”

“…누가 센터장이지?”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쯧. 경준은 혀를 찼다. 다들 물러터져서는. 오합지졸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 뻔했다. 김진성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줄 알았는데 멍청한 놈이 쉽게 죽어버렸다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든 상황이 경준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태현이는?”

“다른 쪽에서 조사 받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 입단속이나 잘 시켜.”

“…네.”

태현은 중간에 겁을 먹어 버린 것인지 경준이 한 짓이라고 자수를 해 버렸다. 아비 된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기다 태현은 조사에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준이 매번 입단속을 요구했지만 변호사 측에서도 태현에게 접촉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또 있다고?”

인상을 쓰는 경준에게 변호사가 패드를 다시 내밀었다. 거기에는 우민재가 있었다. 경준이 이를 악물었다. 

“보자. 이 멍청한 놈이 또 무슨 실언을 했을까.”

경준은 민재의 얼굴이 뜬 화면의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하얀색 제복을 입은 우민재는 마이크 앞에 서 있었고, 조명을 받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자신이 있었어야 할 자리였다. 

[신경준이 진행했던 실험은 시초의 것이 아닙니다. 히어로 센터의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왔던 만행입니다. 전 센터장인 김진성은 어린 에스퍼들을 실험체로 사용해 왔습니다. 에스퍼 능력 향상 및 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학대와 고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실험의 피해자입니다.]

경준은 패드를 집어던졌다. 이제 경준의 일은 김진성의 아류가 되었을 뿐이며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이 원했던 바와 달리 의미가 훼손되기까지 했다. 

경준은 김진성처럼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제 손익을 위해 실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새희망복지회에 왔던 자들은 모두 죽어 나갔을 것이다. 경준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희망복지회는 공평하게 그들을 에스퍼에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고, 친히 센터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죽어 나간 이들은 있었지만 경준은 그들의 장례도 치러 주었다. 목숨을 경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당장 내 인터뷰 잡아.”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선 센터에 있는 실험 건물이 수사에 들어간 상황인 데다… 여러모로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그럼 이대로 두고 보란 말이야?”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땅에 떨어진 패드를 주워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오늘 온 건 제가 변호를 포기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보수는 이전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뭐?”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국선 변호사 중 좋은 분이 사건을 맡아 주실 겁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신경준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책상에 매여 있는 수갑이 철컹거렸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의 손목은 피멍투성이였다. 자신이 묶여 있다는 걸 잊고 계속해서 움직이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변호사는 싸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는 등을 돌렸다. 가벼운 묵례 이후 변호사는 접견실을 나가 버렸다. 무거운 정적과 함께 신경준은 남겨졌다. 

***

민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새로 생겨난 창문이었다. 히어로 센터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은 숙소였다. 센터는 대부분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에게 집이었기 때문에 며칠 간은 콘크리트 조각과 철구조물이 뒹구는 허허벌판에서 다 같이 노숙을 해야 했다.

복구 전문 에스퍼와 염력, 체력계 에스퍼들의 협조를 바탕으로 건축가와 인부 몇을 섭외해 온 뒤 작업이 시작되었다. 복구 능력 덕분에 다른 건물을 짓는 것에 비해 열 배는 빠르게 다시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겉의 골조만 빨리 복구한 후 내부 작업은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재 낭비도 적었고, 새로운 센터 구상도 쉽게 할 수 있었다. 

민재는 센터 숙소 건물의 크기를 키웠다. 모두 방에 거실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제안하자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반색하며 펄쩍 뛰었다. 

최근 일주일은 꿈에 부푼 것처럼 모두가 들떠서 일했다. 자신들의 터전을 부수어 놓고 재건하면서 이렇게 즐거워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들은 잡다한 수다를 떨었다. 

창문 밖으로 해가 뜨고 있었다. 모두 포션처럼 가이딩 약품을 들이켜 가며 기나긴 하루들을 버티고 있었지만 민재에겐 그게 필요하지 않았다. 가이딩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환이 자주 붙어 있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민재는 사건이 일어난 후 열흘이 넘도록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면 텅 비었는데 바가지로 긁히는 단지가 된 것처럼 온몸이 저리면서 아파 왔다. 

처음에는 능력을 사용하길 바라던 지환도 민재가 아파하는 걸 보고는 이내 그만두었다. 그 뒤로는 계속 다가와 가이딩을 해 주기만 했다.

“여기 좋은 거 같아요.”

지환이 민재를 뒤에서 안아왔다. 등으로 간지러운 가이딩이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딱따구리인 양 지환은 민재의 뒷덜미를 자꾸 입으로 쪼아댔다. 

“응.”

“여기 우리 층 할까요?”

지환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권력 남용을 말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을 슬쩍 노려보았다. 이제는 면역이 생긴 것인지 지환은 민재가 째려보는 것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오랜만에 드라이브나 갈까요?”

지환이 물었다. ‘드라이브’라는 건 지환이 민재를 안고 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환이 민재를 안아 들었다. 민재는 자주 긴팔원숭이인 양 지환의 가슴팍에 매달리듯 안겼는데 그러는 걸 지환은 무척 좋아했다.

“하하.”

이번에도 민재가 그렇게 안기자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민재는 피식 웃고는 지환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둘은 한참 상공을 날았다. 푸르스름한 하늘이 점차 밝아오는 게 보였다. 지환은 어디서 찾아낸 건지 바다로 향했다.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민재를 내려놓은 지환이 미소 지었다.

“일출이네요.”

“이미 다 떴는데?”

해는 이미 수평선 위로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아직 중천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지환의 말에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냄새. 살짝 비릿하고 짭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민재는 발 바로 밑에서 부서지는 흰색 물보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갔다.

이대로 능력을 잃게 된다면 지환을 놓아주는 게 맞지 않을까. 지환은 여전히 S급 에스퍼였다. 그렇기만 한가. 동급의 가이드이기도 했다. 각인을 해제한 커플이 있던가. 아직은 예시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환과 완전히 남남이 된다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환이 민재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지환아.”

민재의 말에 지환이 눈을 뜨고는 왜 그러냐는 듯 민재를 바라보았다.

“가이딩 그만 해도 돼.”

민재의 손목을 오랜만에 초록색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지환이 민재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귀찮았어요? 알았어요. 이따가.”

지환은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하며 몸을 떼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의 손을 잡아당겼다. 지환의 얼굴이 민재의 곁으로 왔다. 민재는 오늘 아침 면도를 하다 베어버린 지환의 빰에 난 가느다란 상처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어? 안 아프다. 지금 아물었어요?”

지환이 호들갑을 떨었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상처 더 벌어진 거 같은데 내가 만져서.”

“…아니에요. 선배.”

민재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렇게 작은 상처도 낫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참담해졌다. 

“나 능력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지환의 동공이 부풀었다. 둘 사이에서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꺼내오지 않던 말이었다. 지환은 민재를 끌어안았다. 

“선배. 괜찮아요.”

헉. 민재가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민재는 숨을 토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흡….”

“선배.”

지환이 놀란 얼굴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너… 괜히 나한테 묶여서….”

후회하면 어떡하지. 민재는 그 말을 뱉기가 두려워졌다.

어쩌면 민재는 쓸모없어지길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계속 쓸모 있기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언제 능력이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몸 상태가 싫었던 것이다. 

지환이 민재를 더 깊이 껴안았다.

“내가 옆에 있을게요. 우린 언제나 함께야.”

“….”

“내가 묶인 게 아니라, 선배가 묶인 거야. 나 선배 없이는 안 돼요.”

민재는 눈물을 닦아 주는 지환의 손에 기대어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9살 이후로 처음 터뜨려보는 울음이었다. 멋대로 찾아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능력이 갑자기 사라졌다.

얼마 후 민재는 법정에 자신의 능력 검사지를 들고 참석해야 했다. 과거의 실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능력이 상실된 검사 결과가 나가면 그는 이제 에스퍼가 아니게 될까. 민재는 두려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