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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은정이 자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 서연의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최근 계속해서 예민한 상태였던 서연은 첫 음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서연은 숨을 죽였다. 모르는 번호였으니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보고 싶어.”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태현의 목소리는 너무 지쳐 있었다. 어릴 때의 모습처럼 땅으로 꺼질 것 같은 목소리에 서연은 마음이 아팠다.
“어디야.”
서연이 속삭이듯 물었다.
“훈련실.”
태현이 센터에 왔다. 서연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은정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여태 은정에게 숨긴 것 없이 모든 것을 전달했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민재 실장은 자신의 생존 여부를 공개했다. 커다란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아마도 서연은 절대 결심하지 못할 방식이었다. 그래서 서연은 그런 민재가 부러웠다.
멋있다는 말로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그렇게 망설임 없이 자신을 허공에 내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게 남아 있다는 게 서연은 부러웠다.
서연에게 그 정도 가치를 가진 대단한 것은 일찌감치 없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복수를 위한 증오와 원망, 후회만이 가득했다.
미운 것도 많았지만 태현은 서연에게 동생이었다. 사실 미운정이 있어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의 위치에 있는 아이를 두 번 잃으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웅으로서 우민재의 결정은 한없이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태현은 위험해졌을 것이다. 새벽이 넘어가기 전, 서연은 신경준의 연락을 받았다. 정확히 맥락을 다 짚어내기 힘든 그의 분노를 받아내는 동안 서연은 태현을 생각했다.
서연은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이 에스퍼는 아니지만 복도와 바깥을 걷는 동안 속도는 올리되 기척은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현은 훈련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서연이 다가가자 태현이 고개를 들었다.
“누나.”
태현이 눈을 깜박였다. 양쪽 볼이 붉게 부어 있었다. 아마 뺨을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서연은 빠르게 태현을 끌어안고 가이딩을 넣었다.
“나 가이딩 수치 괜찮아.”
“그래도. 많이 맞았어?”
“아니. 그냥.”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태현이 문득 서연을 뒤쪽으로 살짝 밀었다. 서연은 당황해 태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마셔.”
태현이 작은 병을 내밀었다. 물처럼 투명한 액체였다. 병을 받아 들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뭔데?”
“물이야.”
“나 목 안 말라.”
서연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태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나 못 믿어?”
“물이 아닌가 보지?”
서연의 말에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 아니야. 제발 마셔 줘.”
“….”
태현은 불안해 보였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그의 눈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이게 독약일 가능성이 얼마가 될까 혹은 수면제일 수도 있었다. 신경준은 성정이 잔인했다.
얼마 전 서연은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정확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태현은 자신을 제거하라는 명을 받았을까? 그걸 받아들였을까?
“이걸 마시면 내가 잠에 들까?”
서연이 돌려 물었다. 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누나. 제발. 태현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서연은 뚜껑을 열고 안의 액체를 마셨다. 그러자 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연은 목을 넘어가는 액체를 느끼며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태현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지금이야. 도망가자.”
태현이 몸을 일으키고는 서연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지금 아니면 늦어. 도망가자.”
태현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서연의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민재와 지환은 한 몸처럼 꼭 붙어 있었다. 민재는 실험에서 빠졌다. 저번에 이미 폭주할 뻔했기 때문이다. 민재에겐 효과가 아주 뛰어나다는 걸 입증한 셈이었다. 민재는 지환의 가슴팍에 몸을 기댄 채였다.
지환의 팔을 끌어당겨 살살 쓰다듬자 지환이 민재에 어깨에 턱을 괴었다.
“나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환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민재가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게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좀 전에는 아프다고 계속 엄살을 부려댔으면서 지금은 또 괜찮단다. 민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디에 장단 맞춰.”
민재가 말하자 지환이 그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간지러운 감각이 민재의 등을 타고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선배가 날 더 가엽게 여기면 좋겠어.”
지환이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동정이 받고 싶은 거야? 민재가 고개를 돌려 지환과 마주하려 하자 지환이 민재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선배가 날 불쌍하게 보고, 나만 보면 좋겠어요.”
지환의 목소리에는 알게 모르게 불안이 섞여 있었다. 간이로 진행되었던 실험에서 민재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도 눈치챈 탓일 것이다. 날이 밝으면 민재는 은정을 불러 확인을 해 볼 셈이었다.
민재는 어쩌면 이 상황에 자신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물테러는 예정되어 있다. 잭을 자신이 제거한 데다 신경준이 지니고 있던 패 중 하나를 조용히 뺏어버렸으니 지금쯤 계획을 앞당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 시간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 민재는 지환이 좀 더 애틋했다.
“넌 불쌍하지 않아.”
민재의 말에 지환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애교스러운 서운함의 표시였다. 민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내 중심에는 네가 있어.”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지환의 시선은 언제나 그랬듯 곧장 민재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민재 역시 그러했다. 지환을 곧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각인했다는 사실을 지환과 민재는 센터장에게 알리지 않았다. 우석과 오준만 알고 있는 셈이었다. 민재는 이미 각인이 끝난 참인데도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었다. 자신의 상태가 불안정할 때 지환을 어떻게 지킬까 하는 문제였다.
“위험해지면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해.”
민재가 말하자 지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누가 할 소리를요.”
“요즘엔 네가 더 무리하잖아. 뭐든지 일단 나 대신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
“선배가 자꾸 위험에 뛰어들잖아요.”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아기냐.”
민재는 위험에 뛰어드는 타입은 아니었다. 불나방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환은 매번 어쩜 그렇게 민재를 노심초사하면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지환의 태도가 못내 기분이 좋은 것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선배 아기 할래요?”
지환이 장난스레 민재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민재는 빠르게 그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민재는 지환의 품에 기대어 조금은 낙관적인 상태가 되어갔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모두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모든 게 안전하게 넘어가고 나면 넌 어떡하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몸을 살짝 뒤로 돌려 지환의 얼굴을 양손으로 쥐었다. 지환의 볼이 살짝 찌그러지면서 입술이 툭 튀어나온 상태가 되었다. 민재는 지환의 얼굴이 이럴 때가 좋았다. 귀여운 복어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 마무리되고 나면 네가 센터장 할래?”
지환은 내내 히어로가 되고 싶어 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김진성이 센터장을 계속하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지환은 꽤 잘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싫어요.”
지환의 목소리는 의외로 단호했다. 덕분에 민재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선배는 어쩌고 싶은데요?”
지환이 다시 물었다. 어쩌고 싶냐라. 생각해 보아도 답이 잘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냥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돌아다니면 좋겠다.”
못 가본 데나 가고, 뒹굴고, 위험에 대해 그만 생각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지환은 어려운 일을 쉬운 것이라는 듯 답했다. 대수롭지 않게끔 미래 계획을 세우는 태도에 민재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센터는?”
“알 게 뭐야. 어쨌든 선배는 나더러 센터장 맡기고 도망갈 생각하기만 해요.”
지환이 장난조로 협박을 했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하던 지환이 이제는 알 게 뭐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자신 때문에.
아마도 문제가 생기면 지환은 망설임 없이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분이 좋아도 되는 걸까. 민재는 자신의 양심이 크게 고장 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가면 어쩔 건데.”
“안 보내요. 내가.”
참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환은 선배에게 너무 건방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는 지환이 자신의 가이드인 것을. 각인한 후로 민재는 원래 느끼던 기분이 더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편인데도 지환은 귀여웠다.
그리고 지환이 무슨 말을 하든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붕 떠올라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 계속되어서 스트레스를 받을 법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크게 긴장되지도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순간순간 옅어졌다.
둘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있을 때였다. 민재가 가지고 있는 지환의 폰이 울렸다. 민재는 잡고 있던 지환의 얼굴을 놓고는 폰을 확인했다.
-시작될 거예요.
가이드 이서연, 이라고 적힌 연락처였다. 언제라는 시기가 정확히 적히지 않은 글자. 경고가 담긴 메시지. 민재는 몸을 돌려 지환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환아.”
“선배. 저를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소중히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민재가 지환을 부르자 그가 먼저 속삭였다. 지환은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없으면 민재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민재는 지환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