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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64)화 (16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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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와 지환은 각인을 했다. 그로 인해 달라진 것과 달라질 것은 많을 터였다. 그러나 그 변화들을 모두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의견을 달리해야 했다. 바로 조 박사를 누가 가서 어떻게 쪼아댈 것이냐의 문제였다. 

“내가 간다고.”

“싫다고요.”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각인하면 다 내 맘대로 하게 한댔어, 안 한댔어.”

민재가 각인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지환은 입을 벌리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같이 가요.”

“싫은데.”

“나도 갈 건데.”

지환은 유치한 소리를 하고는 민재를 안아 들었다. 그런 지환을 째려보면서도 민재는 얌전히 그 행동을 내버려두었다.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긴 채 민재는 지환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머리를 박았다. 

“아야.”

지환은 엄살을 부리더니 몸을 날렸다. 결국 또 노란 모자를 쓴 민재는 지환에게 안겨 센터의 비밀장소로 향했다. 

“문 고쳤어?”

얼마 전 지환이 조 박사의 실험실 문을 부쉈던 기억이 나 물었다. 그러자 지환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몰라요.”

그렇게 대충 취급해도 조 박사가 가만히 있다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재도 협박을 해 놓은 게 있으니 몸을 사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조 박사의 실험실은 여전히 부서진 채 휑한 입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안쪽에 있거나 자리를 비운 건지 조 박사가 보이지 않았다. 민재는 지환의 몸에서 뛰어내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렵하게 내려앉는 민재의 허리에 지환의 손이 안착했다. 

“바닥 조심해요.”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님 폭발과 충격의 잔해를 청소하지 않은 건지 실험실은 더러웠다. 여러 가지 물품, 찌꺼기라고 해야 할지 파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여러 조각들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민재는 그것들을 발로 쓱 쓸어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나와.”

꽤 큰 소리로 말하자 안쪽에서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조 박사가 나타났다. 커다란 양은냄비 같은 걸 뒤집어쓴 채였는데, 쌓여 있는 물건들을 헤집으며 나와서 누가 봐도 광인 같았다.

“드디어 미쳤어?”

민재가 묻자 조 박사의 눈이 일순간 험악해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던 조 박사는 이내 다시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너 때문에 망가졌잖아…. 일을 시키면서 환경을 이렇게 망가뜨리면 어떡해?”

그건 민재가 알 바가 아니었다. 애초에 폭발이 일었을 때도 이것보단 상태가 깔끔했다. 그저 조 박사가 게으른 데다 더러울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파리가 내려앉을 것처럼 떡이 진 머리를 한 조 박사를 보고 민재가 코를 부여잡았다.

“좀 씻지 그래? 그리고 결과물이나 가져와.”

“둘 중 뭐부터 해?”

이 와중에도 농담을 할 기분이 드는 건지 조 박사가 이죽거렸다. 민재는 험악한 눈으로 조 박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결과물.”

단호한 민재의 말에 조 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없어.”

“…뭐?”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민재는 눈을 깜박이고는 재빠르게 자신의 뒤쪽에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지환을 돌아보았다. 네가 책임지고 만들게 하겠다고 했잖아? 라는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텅.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지환이 자신의 옆쪽에 떨어진 빈 플라스틱 병을 조 박사 쪽으로 집어던져 난 소리였다. 윽. 하고 조 박사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잘못 들은 거 같은데.”

“깡패 새끼들 같으니라고. 난 정말 할 만큼 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공평하단 말이야.”

무슨 개소리야. 민재는 조 박사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평소 하던 대로 실험이나 하고 약을 개발하랬더니 갑자기 불평등을 논한단 말인가. 혹시 새희망복지회 쪽에서 뭔가 제안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민재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무릎으로 조 박사의 명치 쪽을 가볍게 타격한 민재는 한 바퀴를 굴러 쓰러진 조 박사 위에 올라타 팔을 꺾고 압박했다. 

“제대로 설명해.”

“아아! 놔!”

비명을 질러대던 조 박사는 민재가 놓아주지 않자 풀이 죽은 듯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가이딩이라는 게 어차피 소진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잖아. 그러니까 그걸 자연적 효과라고 생각해 봐. 그럼 그걸 가속화하는 건 쉬워. 이를 테면 얼음이 녹는 건 당연한데 그걸 빠르게 만드는 건 쉽잖아.”

“근데.”

“근데 얼음이 녹기 어렵게 만드는 건 어려워. 그래서 냉장고니 냉동고니 하는 것들이 개발 된 거잖아. 그건 단기간 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민재는 헛웃음을 흘렸다. 조 박사는 지금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민재는 조금 전 지환이 던졌던 플라스틱 병을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조 박사의 눈앞에 그것을 세게 내리꽂았다. 플라스틱 병의 입구가 시멘트 바닥에 박혔다. 조 박사의 동공이 둥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봐. 쉽잖아.”

민재는 조 박사의 볼을 손가락을 툭 쳤다. 그러자 조 박사의 몸이 퍼드득 떨렸다.

“진짜야. 그걸 무효화하는 건 민재 군 네 능력처럼 희귀한 걸 인공적으로 개발해야 하는데, 그게 되겠냐고 지금 며칠 만에!”

조 박사의 논리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더 이상 상관없었다. 문제는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과 기회가 하나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민재 군이 싫으면 다른 애라도 데려오면 속도가 더 빨라질 수도….”

더 이상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민재는 잡고 있던 조 박사의 멱살을 놓았다. 

“역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뭐…?”

민재의 중얼거림에 조 박사가 놀란 듯 되물었다. 민재는 순간 김 박사를 떠올렸다. 김 박사 말고 이 새끼가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쓸모없는 새끼.”

민재는 언젠가 조 박사와 김진성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지환이 바짝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

민재는 피로했다. 그러나 쉴 수 없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어려울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아직까진 예상범주 안에 머무르고 있는 험난함이었다. 

따라 나온 지환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지환은 얌전한 강아지인 양 민재에게 안겼다. 호흡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가이딩이 민재의 몸에 밀려들었다.

“김진성 만나러 가자.”

민재의 말에 순식간에 가이딩이 사라졌다.

“뭐라고요?”

지환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더 방법이 없었다. 민재는 지환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나를 미끼로 쓸 때가 왔어.”

민재도 지환을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한 안전하게 있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제 민재의 목숨은 온전히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 민재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곧 지환에게 문제가 생기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 센터를 지키는 일은 한편으론 지환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지킬 때는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민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는 패를 안고 들어갈 때 민재는 반드시 이기는 게임을 했다. 

어두운 얼굴로 민재의 손에 이끌려 센터 로비 쪽으로 들어선 지환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민재는 모자를 벗지 않고 그대로 센터장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입구 쪽에 늘 그렇듯 얌전히 앉아 있던 윤 비서는 모자를 벗어 버리는 민재를 보고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 그… 괜찮으시겠어요?”

처음 하는 질문에서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민재는 윤 비서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선약자 있어요?”

누가 있냐는 질문이었다. 윤 비서는 고개를 저어 보였고, 민재는 그대로 문 앞에 섰다. 그러자 윤 비서가 다가와 민재의 앞에 섰다. 혹시 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나? 민재가 생각하자마자 윤 비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드릴게요.”

윤 비서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민재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는 대부분 떨리거나,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고마워요.”

민재의 인사에 윤 비서가 설핏 웃어 보이고는 문을 열었다.

“손님 오셨습니다.”

“일정에 없는 사람은 들이지 말라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윤 비서에게 호통을 치려던 김진성의 말이 느릿하게 늘어졌다.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유심히 민재를 바라보던 김진성은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어, 인생이라는 게 말이야.”

김진성은 자신이 보고 있던 파일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앉지.”

소파 한쪽에는 민재와 지환, 맞은편에는 김진성이 앉았다. 윤 비서는 차를 내왔고, 김진성은 찻잔에 차를 따라 지환과 민재 쪽으로 내밀었다.

“그래. 그렇게 원하더니 결국 살아 있었네. 기분이 어때, 지환 군?”

김진성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지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환은 대답하지 않고 민재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민재는 지환 대신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아 있다고 떠벌려도 돼.”

민재는 본론부터 꺼냈다. 센터장으로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것이다. 지금 그만큼 특종이 어디 있는가. 죽은 줄 알았던 우민재가 살아 돌아왔다니.

김진성은 우선 덥석 미끼를 물지 않고 고민하는 듯했다.

“어째서?”

김진성은 우민재가 살아났다면 이 기회를 틈타 센터를 벗어날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민재는 센터로 돌아왔고, 심지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밝히라고 했다. 다시 센터의 노예가 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걸 파헤치려는 것일 터였다. 

김진성이 무얼 눈치채든 민재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열쇠는 모두 민재가 쥐게 될 것이다. 

“대신 당신이 내 명령 아래서 움직여야겠어.”

민재의 이어진 말을 듣고 김진성이 날카롭게 혀를 차며 웃었다. 꽤나 신경질적인 어조였다. 

“정말이지 인생이라는 게 재미있어. 안 그런가. 지환 군?”

무언으로 협박이라도 하듯, 진성이 다시 지환을 걸고넘어졌다. 지환은 김진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민재만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는 자신을 믿고 있는 지환을 건드리는 걸 더 참아줄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니잖아?”

민재의 말에 김진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E급 에스퍼. 김진성.”

민재는 침착하게 가져온 패를 꺼냈다. 김진성의 얼굴이 굳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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