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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신음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민재의 입에서 새어 나갔다. 이미 늦었다. 김 박사를 구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민재의 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민재는 다급하게 장치를 조작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김 박사의 몸에 힐을 쏟아부었다.
지환은 민재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그가 얼굴을 묻게 했다.
“놔. 나… 힐 해야 돼.”
“선배. 미안해요.”
지환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환이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민재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굳이 숨어 살고 있는 김 박사를 찾아가서 중요한 일이라며 위험한 일을 부탁했다.
김 박사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찾아간 것이었다. 민재는 이기적이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민재는 숨을 들이쉬는 게 힘겹게 느껴졌다. 또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살리는 빌어먹을 힐이라는 능력을 달고 태어났으면서, 우민재는 사람을 죽인다. 자기혐오와 무력감이 민재를 덮쳤다.
“선배. 숨 쉬어요. 괜찮아.”
지환이 민재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좀처럼 숨을 쉬는 게 쉽지가 않았다. 아무런 장애물도, 공격도 없는 상황에서 민재가 헐떡이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만나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였다. 민재의 헐떡임이 멎었다. 민재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잭을 바라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다리 한 짝과 목발을 짚은 남자. 잭은 지금 상황이 매우 달갑다는 듯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우민재.”
잭이 말했다. 기다렸다는 어투였다. 그럼 혹시 지금 상황이 함정인가? 계속 민재가 오길 기다렸다는 걸까? 그럼 김 박사는… 미끼였나. 민재는 화가 났다. 김 박사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민재가 목격한 죽음은 적지 않았다. 참사 속에서 끔찍한 몰골로 이미 생을 다해버린 존재들을 많이 마주했다. 임무 중에 목숨을 잃는 바람에 훼손된 시체로 센터로 돌아오고만 동료들의 죽음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몇몇의 폭주를 목격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죽음은 민재에게 멀지 않았다. 그는 사람은 모두 목숨을 쉽게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 박사의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친하거나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사이였다. 그래도 민재가 지금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생존여부를 망설이지 않고 터놓을 수 있을 정도로 믿는 사람이긴 했다. 그렇게 믿는다는 건 민재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김 박사는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적인 부분과는 달랐다. 물론 성격도 나쁘진 않았으나 그는 그만의 신념이 있는 자였고, 그 신념이 늘 바른 쪽으로 향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민재는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어느 순간 약간의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네가 죽였어?”
그렇게 물어보는 민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랬지. 처음이라 좀 서투르긴 했어도 꽤 잘 해냈다고 생각해.”
잭의 대답 또한 덤덤했다. 마치 별 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민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왜 죽였냐고? 그야 당연하잖아. 내 계획을 방해하려 들었으니까. 널 이렇게 쫓아오게도 만들고. 일석이조지.”
일석이조라고? 민재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죽였다고? 그리고 이렇게 박제한 것처럼 전시해두고?
민재는 이를 갈았다. 자신을 불러들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박지환.”
민재가 낮은 목소리로 지환을 불렀다.
“네.”
지환이 단숨에 대답했다.
“넌 지금부터 계획 실행해. 할 수 있지?”
“네.”
민재는 지환에게 지시했다. 떠나지 않고 민재 곁에 머물고 말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지환은 의외로 곧바로 대답했다. 민재는 잭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지환이 민재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뒷목에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다치지 마요.”
지환은 그 말을 남기고는 빠르게 뒤쪽으로 멀어졌다. 지환이 공간을 벗어나는 걸 확인하자마자 민재는 앞으로 몸을 튕기듯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발로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
민재가 움직이자마자 잭은 물총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집어 들고는 마구잡이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일반 총알이 아니라 레이저의 일종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닿는 자리마다 부식이 되는 게 보였다. 개발한 새로운 무기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에스퍼에겐 꽤 치명적일 것이다. 그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재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센터에서 가장 많이 다쳐도 상관없는 사람은 우민재였다. 능력이 빌어먹을 힐이니까.
레이저가 민재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고 쓰라린 감각이 일었다. 민재의 몸에서 빛이 일었다. 이내 민재의 어깨는 찢어진 소매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멀끔해졌다.
“예전에 비해 반응 속도나 능력 응용력이 늘었네.”
잭은 재수 없는 소릴 지껄였다. 민재는 그대로 자신의 근처에 있는 레일 위에 놓인 큰 부품 중 하나를 집어 잭의 몸 쪽으로 세게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바닥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민재가 던진 물건을 피한 잭은 자신의 옆쪽에 있는 유리 부스 쪽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무언가 조작하기 시작했다. 민재는 유리부스 가까이에 다가와 유리를 깨기 위해 발을 날렸다. 그러나 특수 소재로 이루어진 듯 벽은 너무 단단했다. 도리어 다리에 타격감을 입은 민재는 작은 신음을 흘리고는, 다시 힐을 사용했다.
날카로운 무언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민재의 눈에 거대하고 날카로운 집게날이 포착되었다.
집게날은 빠른 속도로 민재의 몸을 향해 움직였다. 공중에 레일이 부착된 형태였는데 집게의 개수는 총 3개로, 공간 내부의 대부분까지 닿을 만한 길이와 크기였다. 민재는 계속해서 지그재그로 다리를 박차며 그 공격을 벗어나야 했다.
바닥에 박힌 집게날이 콘크리트에도 계속 흠집을 가해 표면이 울퉁불퉁해졌다. 바닥을 디디면서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벽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저기 누워 있는 작자가 꽤 중요한 사람이었나 봐?]
잭은 마이크를 키고는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웅웅 울렸다. 그때 민재는 집게 중 하나가 김 박사가 있는 기계 쪽으로 빠르게 향하는 걸 보았다. 민재는 튀어 올라 그 집게 매달린 다음 발로 차 방향을 꺾었다. 그러고는 집게와 기다란 팔의 접합부에 무릎을 대고 있는 힘껏 발을 내질렀다.
웬만한 타격으로는 문제가 생길 것 같지 않던 집게가 부러졌다. 안의 전선과 연결부들이 늘어지며 스파크가 튀었다. 민재는 다시 몸에 힐을 사용한 다음 부러진 집게의 부분을 곧바로 잭이 있는 유리부스로 던졌다.
쾅!
이번엔 다른 쪽의 집게가 그걸 막아내기도 전에 유리벽에 충격이 가해졌다. 유리에 작은 금이 간 게 보였다. 집게가 떨어지며 일그러진 잭의 얼굴이 보였다.
[개자식이!]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잭은 욕을 지껄이며 미친 듯이 무언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집게의 속도가 빨라지며 벽에서 뜬금없이 총구가 드러났다. 총 5개의 총구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서 랜덤으로 날이 서린 뾰족한 칼날들이 솟구쳤다가 떨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민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잭의 상상력은 안타깝게도 실험실 안에서 지내며 개발했던 시뮬레이터의 현물화 정도밖에 발전하지 않은 듯했다.
물론 이렇게 공격을 퍼부어 대면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부러 공격에 규칙성을 파악하기 어렵도록 시간대나, 장소의 패턴을 복잡하게 설계한 듯 보였다. 민재는 계속해서 공격을 피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잭은 멍청했다. 민재는 김 박사를 제외하고 자신을 박사라 칭하며 연구를 하겠다고 설치는 놈들 중 정말로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제 욕심에 못 이겨 미쳐 가는 미치광이들일 뿐이지 그들이 정말로 머리가 좋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 삶을 제대로 살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싸움을 못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건 자신도 위험에 처하거나 공격을 되받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성인이 되던 해, 테러를 막기 위해 몸싸움을 하던 민재는 그런 의미에서 센터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여기던 자신의 능력이 징그러울 만큼 무서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민재는 대단한 공격력을 가진 에스퍼는 아니었다. 그러나 되돌아올 타격에 강했다. 그런데 잭은 어떠한가.
이렇게 공격이 퍼부어지는 공간에서 분리된 유리부스 안은 깔끔했다. 혹시 모르니 그쪽까지 공격이 닿지 않도록 설계해 두었을 것이다.
제 자신을 너무 믿은 처사다. 이렇게 되면 저 유리부스가 있는 쪽은 완전한 안전지대가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걸 뜻하기도 했다. 민재는 김 박사가 누워 있는 기계가 덜컹이는 소리를 들었다. 탄환이 튕겨 나갔다.
민재는 그 기계를 안아 올렸다. 무게가 엄청났다. 발에 칼날이 박히고, 팔과 다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민재는 할 수 있는 한 피하며 김 박사를 끌고 유리부스 쪽으로 향했다.
몸에서 계속해서 흰빛을 뿜어내는 민재는 마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같았다. 민재의 몸에서 나온 흰 빛이 그가 안고 있는 기계에도 미치고 있었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민재는 그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김 박사님.”
민재는 속삭였다. 이렇게 시체가 되어서도 난사를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민재는 자괴감에 휩싸인 채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유리부스 입구 쪽에 다 닿았을 때, 민재는 무거운 기계를 잭이 들어간 문 앞에 내려놓았다. 잭이 벗어날 구멍을 막기 위함이었다. 민재는 유리부스 앞에 놓인 집게를 집어 들고 마구잡이로 정면의 유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빠른 속도로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민재의 뒤편에선 총이 집게를 쏘고 칼날에 총알이 튕겨 기계 몇 가지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고장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침내 파열음과 함께 유리벽이 무너져 내렸을 때였다. 잭의 눈에 공포가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