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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빠르게 숙소로 돌아온 후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몇 번이고 창문을 열어젖혔다가 다시 닫았다. 혹시나 누군가 숙소로 찾아오나 싶어 현관 쪽에 귀를 댄 채로 계속해서 소리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민재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공중에 뜬 채로 팔을 벌려 안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환이 보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기다렸구나?”
지환은 현관 앞에 내려서서 신발을 벗고는 쪼그려 앉은 상태인 민재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무릎이 접힌 상태라 마음껏 발버둥 치기도 어려워 민재는 지환은 째려보았다.
“약 개발 제가 하게 만들게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해 보이는 지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가 했던 말이 민재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현재 상황이 급박하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것도 있었지만 민재는 지환의 태도와 생각이 궁금했다.
지환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정말로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 걸까?
민재는 지환에게 조 박사에게 약 개발과 관련한 거래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환에게 그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 몰래 해결하고 싶었다. 근데 지환은 꽤 빠른 시간 안에 곧바로 조 박사가 있는 공간으로 민재를 찾으러 왔다.
망설임 없이 문을 부숴대지 않나. 허를 찌르는 말로 사람을 멍하게 만들지 않나. 민재는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뭐가요?”
지환은 수건으로 민재의 발을 꼼꼼하게 닦은 다음에야 침대에 그를 내려놓았다.
“내가 실험실에 있는 거.”
민재의 말에 수건을 빨래통에 넣던 지환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서늘한 기색을 띠는 얼굴이었다.
“선배가 또 날 두고 몰래 움직인 거면 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째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는 느낌이었다. 취조 받는 기분이 든 민재는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말했잖아. 너한테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선배는 조 박사랑 어떤 거래를 하려고 했는데요?”
지환이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민재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양손 사이에 민재를 두었다. 민재의 상체가 뒤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김진성 이야기 하고 있었어.”
“또 이상한 거 해주려고 했던 거 아니고?”
“야. 아니라고.”
지환은 민재의 손목을 살피고 그다음으로는 팔목, 어깨, 목 등을 세심하게 뜯어봤다. 주사 자국이나 별다른 흔적이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가 문 폭파시키기 전까지는.”
잠시 민재를 가만히 쳐다보던 지환이 민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삼 일이면 될 거 같아요. 선배가 원하는 거.”
“…약?”
“네.”
삼 일 안에 그게 된다고? 쉽지 않을 건데, 지환은 조 박사를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평온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본인한테 불리하다는 걸 조 박사가 빠르게 계산해낸 건가? 그렇다기에 조 박사는 사회성이 꽤 부족한 인간이었다.
“…조 박사가 뭐래?”
민재가 묻자 지환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민재의 눈썹을 엄지손가락을 살살 쓸었다. 간지럽고 따듯한 감각이었다.
“뭐가 불안해요?”
불안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민재는 조금 전부터 초조해하고 있었다.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초조함은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지환과 조 박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고 싶었다.
“각인할까요? 가기 전에?”
지환이 달래듯 헛소리를 했다. 민재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지환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민재는 분명 지환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지환은 그 모든 것이 상관없다는 듯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런 게 스스로 난 영웅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목격시키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민재는 눈을 감았다.
“잭을 만나고, 지금 일을 해결하면서 나를 잘 봐.”
“네.”
“잘 보고도 괜찮은 거 같으면 그때… 하자.”
“그럼 이번에 새희망복지회 다녀와서인 거죠.”
민재가 살짝 얼버무린 시기를 지환이 조금 앞당겼다. 지환의 눈빛은 늘 그랬듯 곧은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전 자신 있어요.”
어떤 자신이 있다는 걸까. 민재는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지환과 이렇게 다정하게 마주하고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
민재의 대답에 지환이 입을 맞춰왔다.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
매우 못마땅해하는 태도로 지환은 민재를 회의실로 데려갔다. 새벽 시간, 아무도 없을 때였다. 물론 민재는 걷지 않고 지환에게 안긴 채였다. 그곳에서 민재는 강지훈과 맞닥뜨렸다.
“헐 미친. 대박.”
강지훈은 연신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사와 욕을 쏟아냈다. 지환은 망설이지 않고 지훈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선배 마음대로 쓰세요.”
지환이 말했다. 민재가 상황파악을 하는 사이, 지훈이 갑자기 민재의 손을 덥썩 붙잡고 악수하듯 위아래로 붕붕 흔들어댔다.
“선배님. 완전 전설이시던데요? 여기 오고 나서 저 완전 팬 되었어요!”
“…어어….”
“역시. 전설은 전설이야… 거의 신 강림급 아니냐고요.”
지훈이 다다다 말을 쏟아내자 지환이 그의 팔을 퍽 하고 손날로 내리쳤다. 덕분에 민재의 손을 잡고 있던 지훈의 손이 떨어졌다.
“괜찮아요?”
분명 지훈의 팔을 꽤 세게 내리쳤는데 정작 지환은 민재의 손을 붙들고는 팔을 이리저리 살폈다. 민재는 조금 민망해졌다.
“야… 나도 에스퍼야.”
그것도 높은 등급이었다. 그러니까 지훈이 몇 급이던 간에 좀 세게 악수를 한다고 해서 민재가 크게 다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환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민재는 피식 웃으며 울상이 된 지환의 머리를 다른 손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잘했어.”
싫다고 했으면서 지훈을 활용할 수 있게 데려온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지환은 입을 살짝 모으더니 민재의 손에 머리를 슬쩍 더 들이밀었다.
“…어….”
멍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경악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지훈이 보였다. 민재는 자신이 워낙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 보니 지환을 예뻐하는 게 의외인가 보다 싶어 슬쩍 손을 내렸다.
“하… 하던 거 마저 하세요!”
근데 그러자마자 갑자기 지훈이 화들짝 놀라더니 손사래를 치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지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민재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얼마나 설명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우리가 잠입해야 하는 곳이 꽤 위험하거든.”
“네? 아… 네.”
“지환이 말로는 네가 실력이 괜찮다던데.”
민재가 슬쩍 칭찬을 하자 지훈의 눈이 빛나는 게 보였다. 지훈은 금세 처음의 당돌한 태도를 되찾더니 흐뭇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럼요. 제가 그래도 제1팀인데요.”
1팀이라는 것에 꽤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지환이 팀을 잘 이끌었나 보다 싶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지환아. 지도 좀.”
지환은 준비해둔 듯 자연스럽게 약도를 꺼냈다. 민재가 본 원본과 좀 다른 형태인 것을 보니 지환이 따로 제작한 듯 보였다. 약도는 새희망복지회 건물의 내부를 표시하고 있었다.
“너 염력이지?”
“네.”
“우리 쪽에서 연락을 주면 바로 들어가서 여기 표시된 카메라 전부 파괴하고, 바로 보고해.”
우선 잭은 기계를 꽤 잘 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카메라 해킹을 시도할까 했으나 위험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민재는 조금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양쪽의 시야를 모두 차단하는 것이다.
“그냥 다 찌부러뜨리면 되는 거죠?”
지훈이 물었다. 민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확실하게 해. 어정쩡하게 남겨두지 마.”
“네.”
“그리고….”
민재는 지훈과 눈을 맞추었다. 긴장한 건지 연신 표정이 다양하던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거기서 뭘 보든, 네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무시하고 네가 할 일만 하고 나와.”
“…네?”
지환이 어디까지 설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환의 밑에서 일하는 놈이니 제 동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었다.
“제가… 뭘 보게 되는데요?”
지훈이 물었다. 민재는 지환을 슬쩍 쳐다보았다. 지환은 잠시 고민하더니 민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떻게 하든 민재를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납치된 에스퍼들, 기계에 갇힌 에스퍼들.”
“….”
“어쩌면 네가 아는 동료들.”
“…거길, 그러니까 그 새끼들이 누군지 찾으셨다는 거죠.”
지훈의 눈이 커졌다가 가라앉는 게 보였다. 지환은 아마도 새희망복지회 쪽을 혼자서 조사했을 것이다. 강지훈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지훈은 이내 민재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민재는 순간적으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민재가 없는 사이, 지환은 민재가 하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혼자 책임을 지고 감당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민재는 어쩌면 그 방식이 지환을 비롯한 주변 친구들을 힘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우석과 은정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밝혔고, 방금도 상황에 대해 솔직해지기로 했다.
“선배님.”
지훈이 민재를 보며 무언가 결심한 듯 그를 불렀다. 민재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번에 지시하신 거 잘 해내면, 복귀하셔도 팀에 남겨주세요.”
꽤 비장한 표정이었다. 지환이 무슨 말을 했나? 민재가 돌아오면 팀이 원래대로 돌아가 지훈이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래.”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싸.”
지훈은 신이 난 듯 미소를 짓더니 지환을 바라보았다.
“짜증 나게 하네.”
지환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민재가 바라보자 지환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 이제 가요.”
지환이 민재의 허리를 안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민재가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회의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