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순식간에 많은 가능성이 민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뭔가 꼬여서 김진성 쪽 사람? 그러나 그렇다면 이렇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조 박사가 무언가를 꾸민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면 조 박사가 저렇게 멍청하게 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잠갔어.”
민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들어오면서 실험실 문을 잠가 두었다.
조 박사가 있는 건물은 웬만한 공격이나 외부 침입을 견딜 수 있는 소재로 건축되어 있었다.
특히 실험실 문은 더 그랬다.
혹시 모를 암살자나 스파이를 대비해 이 실험실 문은 안에서 잠그면 이곳을 드나드는 비밀번호나 카드를 알고 있어도 잠금을 밖에서 해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안에서 열고 나가지 않는 이상 그랬다.
그런데도 조 박사는 구석으로 가 벌벌 떨고 있었다. 귀를 막고는 쪼그려 앉은 게 가관이었다.
“좀 어떻게 해 봐….”
조 박사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민재에게 구해달라고 말하고 있을 때였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민재의 몸에서 빛이 뻗어져 나갔다. 어떤 게 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문이 일그러진 뒤로 무언가 튀어 들어오진 않았다.
구겨진 문 뒤로 상처투성이가 된 지환이 서 있었다. 그제야 민재는 이 소란이 왜 일어났는지 짐작이 갔다.
온몸에 난 생채기와 지환의 발 주변에 흩어진 파편들로 미루어 보아 저 미친놈은 지금 소형 폭탄을 배구공 던지듯이 문 앞에 꼴아 박으면서 자신도 폭발의 충격을 받은 걸로밖에 안 보였다.
미친 새끼. 민재가 중얼거렸다.
“선배. 오늘 일정에 바람피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난 몰랐네.”
지환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물었다. 피를 질질 흘리는 게 상당히 기괴한 모양새였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조 박사는 뒤에서 어. 어. 같은 감탄사만 계속 내뱉고 있었다. 민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할 말이냐. 이 커다란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 박사가 지내고 있는 건물의 정체를 들킬 위험도 있거니와 민재의 정체가 들킬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민재는 지환이 자신 때문에 조 박사를 만나러 이렇게 급하게 와서는 제 몸까지 다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환은 노려보는 민재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천천히 걸어와 민재의 손목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가이딩 수치를 확인했다.
“내가 안 모자라게 늘 챙기는데.”
지금 할 말이냐. 민재는 지환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지환은 생각보다 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까불래? 네가 여길 왜 와.”
지환이 조 박사와 맞닥뜨리는 일을 늘이고 싶지 않아 한 것인데 이렇게 극적인 상황이 펼쳐질 줄이야. 민재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지환을 혼냈다. 그러나 지환은 그런 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걱정했단 말이에요.”
지환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꽤 풀이 죽은 목소리여서 보기 안쓰러웠다.
민재는 대량의 욕과 한숨을 삼키며 지환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지환의 마음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환은 민재가 돌아온 이후로 내내 그가 사라질까 봐 불안해했다.
지환은 민재가 어떤 실험을 당했는지도 대강 알았다. 자신도 당했으니까. 그러니 그가 조 박사의 공간에 있다는 걸 알고는 저렇게 제 몸을 해쳐가면서까지 뚫고 들어온 것이다.
민재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퍼졌다. 지환의 상처들이 아무는 게 보였다.
“넌 어쩌다가 이렇게 모지리가 된 거냐.”
“선배가 이러니까….”
지환이 민재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무어라 웅얼거렸다.
뭐? 민재가 묻자 지환은 말없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지환의 코가 민재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는 낯 뜨거운 소리도 함께였다. 뒤에 조 박사가 있음을 자각한 민재가 밀어내려고 했지만 지환은 민재의 손을 더 깊이 끌어당길 뿐이었다.
“야….”
민재가 다시 한번 부르자 지환은 손을 뗐다. 그러고는 실험실 테이블에 있는 거즈를 꺼내 민재에게 내밀었다.
“저 아파요.”
지환의 상처는 방금 다 아물었다. 고통이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한번 시작한 거 끝까지 뻔뻔하게 어리광 부려 보자 이거냐.
민재는 거즈로 지환의 얼굴과 목을 벅벅 문질렀다.
“아아!”
지환은 진짜로 아픈 듯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했다. 당황한 민재는 지환의 상의를 들춰 그의 목 아래와 등 쪽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뒤쪽에 있던 조 박사가 갑자기 히익!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는 게 아닌가.
민재가 노려보자 조 박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까딱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 제 놈도 알 터였다.
“상처 없는데? 어디가 아픈데. 뼈 나간 거 아냐?”
“…괜찮아요.”
민재가 지환의 갈비뼈 쪽과 어깨 쪽을 눌러 보았으나 지환은 다행히 뼈에 이상이 생기진 않은 듯했다. 괜찮다는 걸 확인한 민재는 지환의 볼을 꼬집었다.
“으어….”
“너 조금 이따가 보자.”
볼을 잡힌 채 또 울상을 지어 보이는 지환에게 으름장을 놓고 민재가 돌아서서 조 박사와의 일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선배. 누구 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숙소 가 있어요.”
지환이 민재를 다시 한번 끌어당겼다.
“너… 설마 폭탄 그냥 꼬라박았어?”
“소음제거용 장치 썼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럼 네가 주변 둘러보고 있어. 해결하고 가야 하는 거 있으니까.”
“제가 할게요.”
지환이 다급하게 민재의 손을 붙들었다. 민재는 망설였다. 지금 조 박사에게서 얻어내려는 걸 지환에게 시키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민재가 하는 게 더 효과적일 터였다. 민재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지환의 얼굴을 잡았다.
“너한테 시키고 싶지 않은 일이야.”
“약 개발 제가 하게 만들게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민재의 눈이 잘게 떨렸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민재는 조 박사와 자신이 ‘거래’하는 상황을 지환이 모르길 바랐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작은 허세 같은 것이기도 했다. 민재는 지환에게만큼은 어느 정도 멋진 ‘선배’로 남고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박지환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선배가 저 새끼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어요….”
지환이 애원하듯 속삭였다. 그는 민재가 무얼 하려고 한 건지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다만 그는 정말로 괴로워 보였다. 주사를 맞고 왔다는 날보다 더 그 모습이 애처로웠다. 민재는 지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민재의 얼굴을 꽁꽁 감싸 가리다시피 해 밖으로 보내고 숙소에서 보자고 인사까지 건넨 지환은 뒤를 돌아 이제는 몸을 일으킨 채로 얼어 있는 조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말의 눈치는 있으니 다행이네. 입 열면 찢으려고 했는데.”
지환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 박사가 문 앞에 끼워 두는 바람에 다리가 찌그러져 더 이상 의자가 아니게 된 걸 발로 차 그의 앞으로 가게끔 했다.
“앉아.”
조 박사는 의자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민, 민재 군 살아 있는 거… 진짜였네? 어쩐지 네가….”
“부르지 마.”
조 박사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지환이 싸늘하게 웃으며 조 박사의 말을 잘라먹었다.
“부르지 말라고. 선배 이름.”
“…그, 그, 뭔가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환과 둘이 남겨지자 두려움을 느낀 건지 조 박사는 급하게 민재가 말하던 쪽으로 화제를 돌리며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지환은 비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조 박사.”
지환이 부르자 조 박사는 약간 눈치를 보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조 박사 그렇게 후졌어?”
그의 말에 조 박사의 입이 헤벌어졌다.
“…뭐라고?”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럴 만했다. 본인이 개발해대는 것마다 역작이니 어쩌니 지껄이는 놈이니까.
지환은 이죽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지환은 민재가 어떤 의도로 어떤 지점을 파고들어, 조 박사를 자극하려고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민재는 계속 모를 테지만 지환은 이런 일을 하는 건 오히려 더 쉬웠다.
“지금 가이딩 소진시키는 약이 얼마나 개발이 된 건지 알아? 조 박사 밑에서 일하던 새끼가 센터 조지겠다고 그걸 개발해서 뿌린다던데. 조 박사 그거 알았어?”
“…내… 내 밑에?”
조 박사는 처음 듣는 이야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내 밑에 있던… 다 죽었는데….”
“살아 있던데?”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이 새끼는. 지환은 멍청한 표정의 조 박사를 보면서 확인을 시켜 주었다.
“잭이라고. 지금 다 죽어가는 꼴로 센터로 복귀하는 에스퍼도 다 그놈이 개발한 장치 때문이던데.”
“뭐?”
조 박사의 눈이 번뜩였다. 이럴 줄 아니 김진성은 짐작 가는 게 있으면서도 조 박사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거다. 조 박사는 제대로 나사가 빠진 놈이라 잘못 건드리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기 때문이다.
“그… 그 새끼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건 잭이나 조 박사나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왜 의미 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걸까. 지환은 조 박사의 눈에 이채가 도는 걸 보고는 말을 이었다.
“삼 일 줄게.”
“뭐?”
“그 약 막을 방도를 고민해 봐. 적어도 5가지는 제대로 된 루트로 뽑아 놔야 할 거야.”
“아니… 샘플은?”
조 박사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지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밀봉되어 있는 작은 주사기를 조 박사에게 내밀었다.
“이거 다시 네 몸에 주사해.”
“이게 뭔데?”
“좋은 거.”
경계 어린 눈으로 지환을 보던 조 박사는 그게 자신이 개발한 약품 중 하나라는 걸 알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개발시키면서 내 몸을 또 실험체로 써?”
“가이딩 소진 약 막는 약도 네 몸에 처넣을 거니까 똑바로 해. 장난질 치면 죽는 거야.”
조 박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내가 아니면 방도가 없으니 날 찾은 거 아냐?”
“있어. 근데 너한테 시키는 게 제일 편해서.”
지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조 박사는 바깥세상을 잘 모른다. 그러니 지환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였다. 제 자존심도 있는 놈이니 이제 삼 일간은 개발을 할 것이다.
만약 개발이 실패한다면 어쩌지? 지환은 민재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 가장 안전하면서도 민재가 만족할 만한 아늑한 곳.
지환은 자신이 터뜨린 폭탄의 잔해와 일그러진 철문을 발로 툭 차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민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