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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짙은 어둠이 도사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환은 민재를 안고는 그의 옆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묻다시피 하고는 잠에 들어 있었다. 꽤 오랫동안 불면에 시달리던 지환이 찾은 대책이었다.
“선배 냄새 맡으면 잠이 와요.”
진짜 개도 아니고. 민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일 씻기 때문에 몸에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해 보았지만 지환은 단호했다. 그게 어이가 없었다.
아무튼 지환은 팔로 민재의 가슴께를 끌어안고는 다리로 한쪽 다리를 슬쩍 감고 있는 자세를 좋아했기 때문에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썰매 개처럼 민재의 몸에 착 붙어서 체온을 나누었다.
평소라면 민재도 잘 자고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환에겐 괜찮다고 수가 날 것이라고 말해두었지만 점점 초조해졌다.
고민할수록 문제가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잭은 민재에게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이전에 신태현이 조작한 것과 달리 잭 본인이 한 짓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교묘하게 자랑하고 싶은 심리가 티가 나는 행태가 그러했다.
김 박사를 살릴 수 있을까? 내가 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의문과 불안이 민재의 머리를 휘저었다.
민재는 남은 옵션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았다. 내키진 않았지만. 민재는 눈을 감고 자는 지환을 힐끔 쳐다보았다. 잠깐이면 된다. 민재는 신속히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지환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눈을 붙였다.
“네?”
잠에서 덜 깬 지환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우석이한테 김 박사 이야기 전해서 추적하라고 언질해 두고 와. 그리고 우선 그 컴퓨터 속에 있는 자료부터 복원해 보고. 무조건 빨리.”
“어… 잭이라는 그자가 한 짓이 확실하다면서요?”
지환은 그냥 오늘 밤에 새희망복지회에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절대 안 돼. 너 혼자 가는 건.”
“거기 지리는 선배보다 제가 더 잘 알아요.”
민재는 일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잠시 침묵했다.
“근데 넌 잭을 모르잖아.”
민재가 말하자 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지환은 또 ‘질투’할 때의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황당해진 민재는 어이없음을 표하며 그의 콧잔등을 손가락을 살짝 쳤다.
“야. 내가 원수랑 뭘 한다고 그런 말을 해. 너 진짜 바보냐?”
“그럼 우석 선배한테는 왜 말해야 해요.”
“혹시 모르니까 언질을 해 두는 거지. 그렇게 말해 두면 은정이나 그 뭐냐. 1팀 그… 막내? 걔 두 명 지원으로 보내달라고 할 수도 있고.”
“아.”
지환은 갑자기 머리칼을 두 손으로 틀어쥐며 짜증을 표하더니 순식간에 더벅머리가 된 상태로 민재 앞에서 입을 비죽 내밀었다.
“왜?”
민재가 묻자 지환이 민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고는 그의 목을 깨물었다.
“야! 야 이 새끼야!”
“막내라고 하지 마요. 이름 기억 안 나면 염력이라고 불러요.”
“너는 왜 사소한 거에 집착을 해.”
또 한 번 지환의 이가 민재의 목을 파고들었다. 민재는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지환을 떼어냈다.
“아!”
그대로 다시 민재의 얼굴을 잡은 지환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거의 뽀뽀나 다름없는 행태였다. 곧이어 지환은 민재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정확히 민재의 손이 뻗어나가기 직전에 멈추었다.
“빨리 갖다 올게요.”
지환은 마침내 몸을 일으키더니 세수를 하고, 대충 작업복을 걸친 뒤 밖으로 향했다.
민재는 잠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지환에게 손을 휘저으며 인사를 해 보였다. 지환은 한두 번 정도 문을 열었다 닫으며 민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휙 날아서 사라졌다.
그 뒤 민재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작업복에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다음 빠르게 숙소를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민재는 빠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뒷길로 향했다. 어쩌면 이제는 지환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센터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이었다.
‘내가 스스로 여길 다시 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민재는 조금만 잘못되어도 지금까지 숨기면서 버티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꼭 민재가 조 박사를 만나러 가야 했다. 민재가 무얼 쥐여 주더라도 그는 조 박사를 숨 막히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평소 이것저것 실험만 당했던 지환은 조 박사의 속내나 성격을 잘 알지 못할 게 뻔했다. 그 문제 때문이라도 가서 좀 조져놔야겠다고 결심한 민재는 지환이 맨날 가지고 숨겨두던 자신의 ID카드를 창문 없는 건물 입구에서 사용했다.
지환이 워낙에 난리를 쳐놨다고 하니 이것도 해지되지 않았을 거란 판단이었는데, 정확히 들어맞았다. 애초에 이걸 굳이 출입 통제하겠다고 시스템에 손을 대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생길수도 있으니 죽은 사람 출입 통제를 굳이 걸어 두진 않았겠지 싶었다.
어쩌면 조 박사는 민재가 죽지 않았으니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도 잭만큼이나 비열하고 미친놈이었으니 자신이 실험하다 만 샘플이 갑자기 사라진 걸 못마땅해했을 수도.
민재는 자연스럽게 조 박사의 실험실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 아니면 그 새끼는 있을 데도 없었다.
“어. 어. 박 팀장~ 잠시만~”
느글거리는 목소리는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지환이 온 것이라 예상했는지 박 팀장이라고 지칭했다. 그래도 팀장이라고 부르긴 하나 보네.
민재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틈만 나면 지환이 붙어대니 지금도 역시나 가이딩 수치는 양호였다.
민재는 목을 돌려 관절을 꺾는 소리를 냈다. 간만에 몸을 풀 차례였다.
“이거 봐. 내가 개발한….”
뭔가 또 개 같은 걸 개발한 건지 조 박사는 조그마한 비커 컵을 들고 헐레벌떡 나오며 자랑을 해대다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민재 군?”
나한테는 꼬박꼬박 군 자 붙이면서 친한 척 이름을 불렀지. 죽여 버리고 싶게.
민재는 턱을 살짝 올리고는 꽤 구부정한 자세의 조 박사를 내려다보다시피 했다.
“반가워?”
민재가 묻자 조 박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 와중에도 떨어뜨리지 않고 자신의 비커를 책상 위에 올려두더니 민재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민재의 팔을 턱하니 잡았다.
“세상에. 세상에! 민재군. 아픈 데는 없어? 어떻게 살아난 거야?”
아픈 데는 없냐는 질문과 뒤의 말이 민재가 확실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났는지 내 신체를 후벼 보고 싶다는 말이군.
민재는 조 박사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러자 조 박사의 몸이 휘청였다.
“아이. 매정하게 왜 그래?”
매정은 무슨. 민재는 비소를 지으며 조 박사를 바라보았다.
“시킬 거 있어서 왔는데.”
“…시킬 거?”
조 박사의 눈가가 씰룩였다. 꼴에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그럼 안 되지, 민재 군. 나한테 찾아와서 뭔가 부탁하게 되었다는 건 스스로가 지금 절박하다는 거 아니겠어?”
조 박사가 께름칙한 얼굴로 웃었다. 민재의 약점을 잡았다 싶어 신이 나는 게 다 보였다. 민재는 조 박사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무슨 말일까, 그게?”
민재가 여유를 부리자 조 박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몰아붙였다.
“센터장이랑은 인사했어? 민재 군 많이 그리워했어!”
하하. 민재의 입에서 날카로운 웃음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조 박사는 흠칫 몸을 떨더니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가 첫 번째 카드부터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김진성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그게 조 박사랑 연관이 있더라고?”
눈을 끔벅이던 조 박사는 의아함을 표했다. 민재는 그의 얼굴 앞에다가 가이딩 수치를 드러내는 손목을 내밀었다.
“어떻게. 가이딩 수치 표시 안 되는 에스퍼는 돌보기 어려워? 어때?”
조 박사의 입이 잠시 헤벌어지다가 닫혔다. 자신의 표정이 이미 사실을 말해 주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건지 끝까지 변명하려고 들었다.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민재는 그대로 조 박사의 어깨를 밀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파일을 집어 들었다. 이 새끼는 민재와 지환, 아주 가끔 김진성 말고는 들어오는 이가 없어서 그런가 경계심도 없었다.
“오래된 파일이지? 정신계 에스퍼. E급.”
민재가 파일을 들어 보이자 조 박사가 다급하게 그걸 낚아채려고 했다. 그러나 민재는 파일을 높이 들었고, 결국 조 박사는 휘청거리기만 한 꼴이 되었다.
“그, 그거 아니야!”
“내가 당신을 그냥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내가 뭔가를 내보일 땐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거 몰랐어?”
그제야 조 박사의 얼굴에 약간의 공포가 서렸다. 자신으로 인해 센터장의 극비가 위험 인물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 조 박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연 대신 조 박사에게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으로 둘러댈 수 있으니 좋은 거래를 진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그… 원하는 게 뭐야?”
조 박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민재는 잠시 조 박사를 보다가 그를 좀 더 자극시킬 심산으로 언제나 민재를 눕혀두고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혹시 센터장이 그것도 알아? 조 박사 형편없는 거?”
“…뭐?”
아니나 다를까 조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당 못할 탐구열과 제 결과물이 최고라는 광적인 믿음을 건드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민재는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한 번 더 그를 건드렸다.
“뭐. 멀티를 개발했니 어쩌니 하는데 밖에 지금 에스퍼들이 일반이 돼서 센터로 다시 돌아오잖아.”
“그, 그건 비윤리적인 짓이야!”
푸하! 조 박사의 말에 민재는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씹새끼가. 민재는 볼 안쪽을 짓씹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장치 개발한 사람. 조 박사도 알걸? 네놈보다는 실력이 더 나은 거 같던데?”
“누군데?”
조 박사가 두려움도 잊은 듯 민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눈이 번질거리는 게 보였다. 이 새끼들은 뭐가 문젤까. 짧은 상념을 망치고 민재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쾅!
엄청나게 큰 소리가 건물을 울렸다. 건물 외벽이 진동할 정도였다. 이건 이 건물이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쾅!
한 번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조 박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민재를 바라보았다.
“어떡해!”
뭘 어떡하긴 좆된 거지. 민재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