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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불길함을 느꼈다. 뭔가 이상했다. 김 박사가 납치를 당한 것일까? 왜지? 민재가 멍하니 있자 지환이 달래려는 듯 민재의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실험에… 쓰셨던 거 아닐까요?”
지환의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그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근데 무언가 수상쩍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늘 김 박사를 방문한 건 완벽하게 깜짝 방문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했기 때문에 민재는 3일 안에 모든 걸 준비해 온 것이다.
그러니 김 박사가 이렇게까지 집을 오래 비우는 게 이상했다. 더군다나 실험실의 상태가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환기를 해선 안 된다. 공기가 순환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
둘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민재는 기억을 더듬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어수선하다고 느낀 건 옮겨진 사물이 있다는 의미와 비슷했다. 바닥에 무언가 쏟아져 있거나 한 건 아니었으니까.
우선 실험을 진행하는 테이블의 위치가 원래는 정중앙이었는데 조금… 밀려 있는 느낌이었다. 약품들 중에 없어지거나 흔적을 지우는 데 활용된 것이 있을 수 있었으나 민재는 약품 종류까지 가려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문득 김 박사를 납치하거나 해하려 했다면 그 이유가 민재가 ‘부탁한 일’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재는 빠르게 실험실 안쪽에 있는 컴퓨터로 향했다. 그것도 뭔가 이상했다.
김 박사는 물건을 아무 데나 두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정돈을 열심히 하는 사람까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모든 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테이블에 서류나 종이 쪼가리 하나 없이 깔끔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경우가 좀 드물었다는 것이다.
“실험 진행하는 도중에는 청소를 안 해. 난 모든 물건을 내가 어디 두었는지 기억하거든.”
민재는 왜 더럽게 사냐고 타박을 하자 김 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작 자신의 집은 정리하지 않으면서 우석과 함께 지내 그런지 가끔 민재는 주변인들에게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건 자신 나름대로 친근함의 표시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실험실의 상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첫째, 김 박사는 실험을 끝내고 청소를 마친 뒤,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
둘째, 김 박사는 납치나 최소 상해를 입었거나 최악의 경우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민재는 빠르게 컴퓨터 전원을 켰다. 단서를 찾아서… 남몰래 조사를 시키면 된다. 빨리 찾아내야 한다. 컴퓨터 화면이 켜지자마자 깔끔한 바탕화면이 민재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럴 리가…?’
김 박사의 컴퓨터는 그의 실험실만큼이나 더러울 때가 많았다. 파일을 여기저기 바탕화면에 자기 마음대로 구역을 정해 뿌려 두는 수준이었다. 근데 지금 바탕화면엔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민재는 중얼거리며 빠르게 드라이브들을 훑었다. 역시 비어 있었다.
“이게….”
민재가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면서 황당해하자 지환이 뒤에서 손을 뻗어 마우스를 움직여 이것저것을 클릭해 보았다.
“다 날아갔네요. 원래 이러실 때가 있나요?”
“…있겠냐? 그럼 김 박사는 지금 울면서 우릴 맞이했겠지.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고.”
수첩 같은 데 간단한 기록을 해서 숨겨 두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민재도 찾기가 어려웠다. 찾는다고 해도 그가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나 단어들로 기록을 해 두어서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복구 안 돼?”
민재는 다급하게 물으며 지환의 어깨를 붙들었다. 지환은 어째서인지 조금 볼을 씰룩였다.
“…뭔데.”
“아니에요.”
심각한 순간에 분명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민재가 힘껏 노려보자 지환은 빠르게 대답했다.
“이렇게 깔끔하게 날아간 거면… 전문 업체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돈과 시간이 들 건데….”
“빨리 찾아야 되는데….”
민재는 혹시 숨겨진 파일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바탕화면을 마구잡이로 클릭해 보기도 하고 시작 메뉴를 뒤지고 온갖 곳을 뒤져 보았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어??”
지환은 민재의 손 위로 마우스를 겹쳐 잡고는 쓰레기통 아이콘을 클릭했다. 그 순간 민재는 쓰레기통이 비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쓰레기통에는 txt파일 하나가 있었다. 지환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민재가 그 파일을 열었다. 어차피 다 사라져 버린 판에 연다고 문제가 더 심각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마무리.
마무리라. 민재는 그 단어를 봄과 동시에 하나의 인물을 떠올렸다.
“…마무리?”
지환이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민재는 말없이 컴퓨터 앞을 벗어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닥을 샅샅이 다시 보던 민재는 서랍까지 뒤졌다. 그중 커버가 빨간 수첩이 눈에 띄었다. 민재는 곧바로 수첩을 펼쳐 살폈다.
그 수첩의 초반부에는 ‘멀티’라는 글자와 가이딩 수치에 관한 알아보기 어려운 메모들이 있었다. 거의 날아가는 글씨체로 동그라미나 엑스 표시가 쳐져 있어 김 박사가 꽤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멀티’라는 명칭은 원래 김 박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재가 어떤 종류의 실험을 당했을 거라는 추측을 그도 하고 있는 듯했으나 정확히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민재도 굳이 그걸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민재가 부탁한 부분을 연구한 과정이 메모된 연구일지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뭘 정확히 정의 내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치나 약품명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적힌 다음 페이지가 이어졌다. 몇몇 페이지에는 역효과라든가 거품 등 의미심장한 메모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첩의 중간쯤 되는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민재는 갑작스레 적힌 글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안 돼.
민재는 앞으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앞의 글자들과 필체가 거의 유사했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사람이 흥분한 상태거나 화가 난 상태라면 글씨가 조금 다르게 쓰일 순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적힌 말이 이상했다. 뭐가 안 된다는 걸까. 실험이?
그러나 민재는 김 박사가 사안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실험을 쉽게 포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안 된다는 말 뒤에는 숫자와 알파벳 몇 개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도 의미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굳이 이런 식의 글을 남겨 둔 것이 찜찜했다. 어쩌면 이것도 이 현장을 찾아온 사람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였을까? 김 박사는 살아 있을까? 민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숙소에 돌아와 씻은 다음 둘은 말없이 식사했다. 숙소에 있던 냉동 제품을 데워 하는 간단한 식사였다. 둘 다 좋은 밥을 먹을 마음도, 기력도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지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태현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지환은 태현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재의 생각은 달랐다. 굳이 이런 일을 벌인다고 태현에게 돌아갈 이득이 있을까? 그리고 그럴 예정이었다면 민재에게 준 정보들을 주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했다.
좀 무른 데가 있는 느낌인 데다 자신의 누나의 안위를 지키는 데만 일념하는 신태현은 그래도 멍청이는 아닌 걸로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들로 지환이 그를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기도 했다.
“…그건 가능성이 낮을 거 같아.”
“선배는 신태현을 믿어요?”
지환이 물었다. 믿는다고 하기에도 애매했고, 믿지 않는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신태현을 믿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공수한 정보도 믿어선 안 돼. 근데 걔가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신태현의 약점은 이서연이야. 이서연은 아직 센터에 있지. 그런 상황에서 굳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속여서 어떤 덕을 볼 수 있을까?”
“선배가 사라지기 전에 신태현이 나한테 선배를 믿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믿지 말라는 뉘앙스였죠. 선배가 사라지고, 돌아오고 나서 그 말이 계속 생각이 났어요.”
지환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신의 미간을 지압했다.
“…넌 나를 믿는다고 했잖아?”
민재는 지환이 그를 믿는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민재를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도 민재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호의가 아니었다.
“그 새낀 다 알고 있었어요. 어쩌면 꽤 오래 전부터. 어쩌면 선배를 자신이 해쳐야 하는 타깃으로 보고 처음부터 접근했는지도 모르죠.”
“…그랬을 수도 있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정작 차분한 민재와 달리 지환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지속적으로 선배 안부나 관련된 질문을 던진 적도 있어요. 나는 멍청이처럼 선배 이야길 털어놓았고. 그게 나를 얼마나 괴롭게 만들었는데요. 선배를 잃은 게 모조리 내 잘못인 것만 같아서….”
지환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재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지환의 볼이 위쪽으로 올라가 복어처럼 보였다.
“난 죽지 않았고, 넌 날 잃지 않았어.”
지환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태현의 노력도 나름 포함되어 있었다. 지환이 천천히 진정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김 박사님은… 나 때문에 무슨 일이든 당한 거야.”
민재가 담담하게 말하자 지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원래 공격 같은 걸 꽤 받았다고 하셨잖아요.”
“새희망복지회의 잭이라는 자가 한 짓이야.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 열이 뻗쳤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좀 충동적이고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그게 왜… 선배 때문이라는 거예요?”
“잭은 날 죽이고 싶어 하니까. 수첩에서 뒤에 적어놓은 글을 보면… 이미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나를 노리는 과정에서 김 박사는 운 나쁘게 걸린 분노의 표적이 된 거야.”
지환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니까, 지금도 선배의 목숨을 노리는 새끼가 있다는 거네요.”
지환의 목소리는 꺼져가는 듯 낮았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지환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배 때문 아니에요. 제발 그 말만은 더 하지 말아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지환이 말했다.
“…그래.”
민재는 순순히 대답했다. 지환의 말은 꽤 짜증스러웠지만 민재에게는 묘하게 위안을 주었다. 지환은 몸을 일으켜 민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민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