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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걸 하고 있었길래 가이딩을 하게 되었냐고요. 싸웠어요?”
지환은 우석과 둘이 있었던 것에 대해 물고 늘어졌다. 때문에 민재는 또 분노를 억눌러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왜인지 지환에게 센터를 앞으로 누가 책임질 건지 이야기하다가 내가 싫다고 했고, 덕분에 패닉이 왔다고 하면 쪽팔릴 것 같았다.
민재는 얼마 전 지환에게 팀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니 팀장으로서의 면모도 다시 보여주고픈 마음이 있었다.
“아니, 좀 테스트 해 볼 게 있어서.”
“뭘요. 그러니까 나 말고 꼭 최 실장이랑?”
“어. 걔는 그냥 가이드니까.”
지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묘하게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을 내비춰서 민재는 아차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각인 문제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어떤 걸요?”
지환의 눈이 아래로 깔렸다. 지환은 정말이지 불쌍한 척을 잘했다. 민재가 조금 열 받는 기미가 보이거나 답답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 즉시 눈을 내리깔면서 불쌍한 특유의 표정을 지었는데, 민재는 그것에 약했다. 약한 자신이 싫었지만 뭔가… 크게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게 있었다. 지금 지환은 서운함을 어필하고 있었다.
자신과 각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걸 확인하려고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이드들은 원래 이렇게… 잘 삐지나? 민재는 우석이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럼 가이드가 되면서 좀 감정이 더 풍부해졌나?
민재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 지환이 민재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재촉하는 거였다.
“우석인 너랑 내가 각인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던데. 난 네 몸이 걱정되니까….”
“그래서 아까 안 되니 어쩌니 한 거예요?”
지환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그럼 아까 다 듣고 있던 거였어?
민재는 이렇게 당당한 지환의 태도가 어이없었다.
“들었으면서 나를 떠봐?”
“선배는 왜 저한테 확신을 가져주지 않아요?”
지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재는 당황해서 지환의 등을 토닥였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안 그럼 내가 왜 너랑 여기서 살아.”
민재에겐 이렇게 달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환은 점점 코도 붉어지고 있었다.
“선배라는 호칭이요.”
“어어.”
“저한텐 선배는 우민재밖에 없어서 다른 사람은 선배라고 안 부르는 거예요. 저한테는 선배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지환의 말은 낯 뜨거웠다. 민재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지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최 실장’, ‘누나’라고 칭하던 게 그런 이유였다고? 꽤 황당한 이유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몸을 아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이 답답한 자식아!”
민재는 지환의 멱살을 살짝 틀어쥐고는 그를 탈탈 흔들었다. 은정을 밀칠 때와 달리 지환은 힘이 빠진 건지 일부러 그러는지 달랑달랑 그의 손에 흔들렸다.
“아끼지 마요. 난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다고. 민재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지환이 민재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춰왔다. 입 안으로 가이딩이 밀려들어왔다. 민재는 온몸이 저릿해지는 걸 다시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환은 아주 황소고집이었다. 지금 이건 우석의 것 말고 자신의 가이딩으로 민재를 채우겠다고 심통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재의 손에서 힐이 새어 나갔다. 지환이 민재를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
민재는 지환과 몇 시간째 대치하고 있었다. 지환의 말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팀장 자리 돌려준다며.”
“안 준다고 안 했어요.”
“야. 왜 팀원 관리를 네가 도맡아 해. 그럼 내가 팀장이 아니잖아.”
지환은 민재에게 팀장 자리를 줄 것이지만 팀원 관리는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그 때문에 민재는 어이를 잃어버렸다.
“간단해요. 선배가 나한테 명령하면 내가 그렇게 움직이면 되잖아.”
“너 진짜 빡치게 할래?”
민재는 지환이 이러는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요. 나랑 각인한 후에는 그냥 다 주겠다고.”
“아. 그러니까 각인으로 나랑 거래를 하시겠다?”
지환은 눈을 홉뜨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민재의 손에 자신의 폰을 올려두었다. 민재는 그것을 채갔다. 그러고는 후다닥 지환으로부터 멀어졌다. 지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 점심 이후부터 쓰세요.”
“왜?”
“…팀에서 내보낼 애가 하나 있어서.”
내보낸다고? 민재는 순간 지환을 불렀던 나이가 어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왜 내보내? 걔 일 잘해? 잘하면 빼지 마.”
어차피 지환이 데리고 있었다면 나름 믿을 만한 놈이라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니 하나라도 더 믿고 일을 시킬 수 있으면 마음이 편하겠다 싶었다.
“싫어요.”
그러나 지환은 단호했다. 민재는 조금 당황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 좋으라고. 선배 살아 있는 거 여기저기 떠벌릴 생각 없어요. 지금 알고 있는 인원 외에는 절대 안 돼.”
“언젠가는 어차피 들킬 일이야. 이 일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그걸 최대한 미루자는 거잖아요.”
지환이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니 민재는 더 화가 났다. 이렇게까지 반대하는 게 정말 민재를 위해서가 맞을까 하는 의혹이 생길 정도였다.
“걔 누군데?”
민재가 묻자 지환의 얼굴이 조금 험악해졌다.
“그게 왜 궁금해요?”
“궁금하면 안 될 거 있어? 너야말로 말 못 하는 이유라도 있어?”
민재가 성질을 내자 지환의 광대가 갑자기 씰룩였다. 민재는 그런 지환의 태도에 열이 받았다. 결국 민재는 지환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러자 지환은 이번엔 대놓고 소리 내서 웃음을 터뜨렸다.
“쪼개?”
“선배. 질투할 때 진짜 귀여운 거 알아요?”
지환은 정말이지 개소리를 잘했다. 민재는 던지듯이 멱살을 놓고는 지환의 앞에서 팔짱을 꼈다.
“누군지 말해. 좋은 말로 할 때.”
지환은 가볍게 한숨을 다시 내쉬더니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잠시 후 지환은 입을 열었다.
“강지훈이요.”
낯이 익은 이름인데, 누구더라? 민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하자 지환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정승규 에스퍼 실종 때 우리가 잡아 온, 그 꼬맹이요.”
“어!”
그제야 그가 누군지 떠올린 민재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걔가 벌써 팀에 들어갈 만큼 컸어? 그땐 정말 코찔찔이 같았는데.
민재가 잠시 감상에 젖자 지환이 민재의 볼을 양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래서 싫다고요. 지금 벌써 만나서 일 시킬 생각하죠?”
들켰다. 민재는 조금 머쓱해졌다. 강지훈은 염력 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기동력도 좀 있는 편이고 물건을 확보하는 데도 좋은 능력이었다. 민재의 머릿속에는 이미 작은 계획이 생성되어 있었다.
“어… 걔 눈치는 좀 있어?”
“아. 짜증 나.”
지환은 왜인지 계속 툴툴거렸다. 민재는 문득 지환이 한 말이 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불평을 늘어놓으며 민재에게 치대는 지환은 좀… 귀여웠다.
그렇지만 이런 걸 계속 받아주다가는 지환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다. 팀장은 그래선 안 되는 자리였다. 민재는 가까워지는 지환의 얼굴을 손으로 스윽 밀어냈다.
“걔 팀에서 빼지 마. 명령이야.”
“아아!”
지환이 성을 냈으나 소용없었다. 민재는 점프해서 갑작스레 지환의 등에 올라탔다. 지환은 괴성을 지르다 말고 착실하게 민재의 다리를 받쳐 업어들었다.
“이제 어디 좀 가자. 나 우석이한테 받은 거 있어.”
“뭔데요.”
“피.”
지환은 우석에게 혈액 샘플을 부탁했다. 그걸 김 박사에게 가져가면 좀 더 유용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은정에게서도 혈액 샘플을 구했다. 김 박사는 센터 외부에 있어 필요한 모든 걸 구하기 어려울 테니 작은 협력이라도 하고 싶었다.
피라는 말에 대충 짐작을 한 건지 지환은 출발 전 그 노란 모자를 다시 민재에게 씌운 다음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헷갈리지 않고 김 박사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저번처럼 살짝 사각지대에 착지한 지환은 민재를 그대로 업은 채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 민재가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민재와 지환은 안쪽을 힐끔거렸다. 커튼이 쳐져 있으나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어딜 갔더라도 멀리 가지는 않았거나 집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다 민재는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그러나 역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환이 뒤쪽을 힐끔거리며 민재에게 무언으로 질문했다. 살펴보는 게 어떻겠냐는 눈치였고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인 김 박사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는 건 큰 실례이자 문제였다. 그러나 이전에 김 박사가 여기저기 쫓겨 다니거나 집의 일부가 망가진 적이 있다고 했으니 신경이 쓰였다. 혹시 모를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환은 창문이 없는 벽 쪽으로 날아가 몸을 옆으로 붙인 다음 기척을 죽이면서 천천히 비행했다. 그에게 업힌 민재는 혹시 모르니 계속 뒤쪽을 주시했다.
지환은 벽에 최대한 붙어 잠기지 않은 창문이 있는지 계속 확인했다. 그러다가 2층 창문 하나가 열리는 걸 확인하고는 열고 빠르게 안으로 몸을 날렸다.
지환은 부러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로 들어와 몸을 살짝 띄운 채로 있었다. 창문 바깥으로 민재가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민재는 몸을 낮춰 지환에게서 내려온 다음 방금 본인들이 들어온 창문의 커튼을 쳤다. 그러고 몸을 일으켰다.
2층의 방에서 나가 복도를 걸어가며 민재는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그의 안방으로 보이는 공간으로 가 화장실 문이 닫힌 걸 보고 가볍게 노크했다.
“김 박사님? 저예요.”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민재는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고, 가볍게 열렸다. 안에는 어둠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민재와 지환은 아래층으로 향했다. 민재가 집을 돌아다니다가 자신과 지환이 김 박사와 이전에도 가 본 적이 있던 공간, 그러니까 실험 물품이 구비된 창고 같은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창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열 수 있었다.
“…!”
그곳에도 역시 김 박사는 없었다. 다만 저번에 보았을 때와 달리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의 공간이 이상했다.
환풍구를 작동시키지 않은 지 좀 된 건지, 아님 이전에 한 실험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건지 코를 찌르는 듯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종류를 정확히는 가려낼 수 없지만 민재가 몇 번은 맡아 본 냄새였다. 그럼 실험실에 구비된 용액 중 하나거나 그것들이 뒤섞인 경우일 수도 있었다.
“…선배.”
지환이 눈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보더니 민재를 불렀다. 민재가 지환 쪽을 바라보자 그가 실험실 테이블 근처 바닥에 있는 옅은 얼룩을 가리켰다. 어느 정도 지워진 듯했으나 다 지우진 못한 모양새였다.
민재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얼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걸레 같은 것으로 훔친 자국에 일반인이라면 아마도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 옅기였다.
민재는 좀 더 고개를 숙여 그것의 색을 들여다보았다. 약품이 묻어 꽤 혼탁함이 있었으나 짙은 갈색에 어느 정도 응고된 굳기를 보아하니… 혈흔이었다. 민재는 천천히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