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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54)화 (15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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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는 에스퍼를 구속한다. 살아 있는 한 센터의 일원이 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된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거나, 자신의 자산을 일정 규모 이상 쌓거나, 외부의 건물을 사거나 하는 일 또한 제재된다. 한마디로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어느 정도 수준 이상 위로 올려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센터는 에스퍼를 보호해 주기도 했다. 한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을 선망을 받는 영웅으로 이미지를 탈바꿈시켜주었다. 꽤 규모가 있는 인원이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건 그들이 센터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목숨을 걸고 다른 이들을 구하게 길러졌기 때문이고, 구조를 받은 사람들이 그들이 멋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센터 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어떨까. 누군가는 지환의 어릴 때가 그러했듯 진심으로 히어로 센터에 속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민재가 그러하듯 센터를 지긋지긋해할 수도 있다. 강제로 주입된 정의감 따위 떨쳐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난 센터를 맡지 않아.”

민재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석은 민재와 지환의 중간 어느 지점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환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으나 우석은 센터 안의 사람들을 어쩌면 민재보다 더 아꼈다. 그의 정의나 의리는 이곳에 속한 자들에게 있었다. 센터장에 대한 분노가 커질수록 우석은 보호 본능을 키웠다. 민재의 대답에 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말고 누가 있어. 그럼 어떡할 건데. 아무 생각이나 계획 없이 일을 진행시킬 수는 없어. 너도 알잖아.”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생각한다고 해서 그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잖아.”

“야….”

우석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우석은 예전부터 민재를 늘 좋게만 봤다. 이따금 연민이 스쳐가는 얼굴로 보다가 어떤 날은 자신을 동경하는 것도 같았다. 민재는 언제나 스스로를 엉망진창으로 여겼기 때문에 우석의 그런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난 센터 못 맡아. 우석아.”

“….”

“난 이제 모르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에 지쳤어. 말했잖아. 내가 돌아온 건 너희가 보고 싶어서지 정말 세상을 구하고 싶어서는 아니야.”

“그래도 정말 모른 척하려면 할 수 있었잖아.”

우석은 민재를 믿었다. 민재도 우석을 믿었지만. 민재는 지금처럼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기분이 되곤 했다. 그라고 언제나 모든 결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센터를 없애고 싶었다. 모든 에스퍼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여태 자신의 세대가 봉사를 했으니 이제는 안전성과 관련된 몇 가지 조항만 협의하고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이루어질까?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던 자들이 한순간에 거리로 내몰린다면 어떻게 될까? 민재처럼 모두가 가족들과 연을 끊은 건 아니었다. 가족들의 빚을 대신 갚고 있는 사람이나 자신이 어린 가장이 되어 경제적 여건을 책임지고 있어 일부러 위험한 임무를 맡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는 게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경력이 없는 데다 나이가 있으니까. 지금 십 대인 애들은 몰라도 이십 대 이상으로 접어든 성인들은….

“민재야. 괜찮아.”

우석이 갑자기 민재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그제야 민재는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이딩이 들어왔다. 민재는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미안해.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몰아붙이려던 건 아니었어.”

우석이 말했다. 가이딩이라는 건 이상했다. 우석의 것은 따뜻했다. 찜질팩을 올리면 따스한 기운이 혈류를 타고 흐르는 것처럼 무언가 힘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반면 지환의 가이딩은 조금 달랐다. 아프지 않은 감각이었지만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고,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민재의 손목이 초록색으로 변경되어 버렸다. 난리 나겠군. 민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이딩 할 때 말이야. 어떤 느낌이야?”

“어?”

“윤 비서한테 가이딩 해 본 적 있어?”

“일반인한테?”

우석의 얼굴이 묘해졌다. 반문한 내용과 달리 어색하게 굳어지는 얼굴을 보고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해본 적 있네.”

“아니라고.”

“왜. 어떻게 달라.”

우석은 민재의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턱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러나 민재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우석이 얼굴이 재미있을뿐더러 알아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좀 막힌 거 같은 감각도 들고, 상대가 모른다는 점이 제일 크지.”

가이딩이 들어오는 걸 모른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박지환 그렇게 되고 가이딩 할 때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어.”

그렇게라는 건 아마도 가이드이자 에스퍼가 된 상태를 말하는 거겠지. 민재는 지환이 가이딩을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말을 했던 걸 떠올렸다. 

“안 들어간다고?”

“어. 토할 거 같다던데. 싸가지 없는 새끼.”

우석은 툴툴거렸다. 생리적으로 못 받아들이는 건가. 민재는 토할 거 같다고 말하는 지환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진짜 아팠나?

“그럼 날 가이딩 할 때는 어떤 느낌이야? 기가 많이 빨려?”

민재가 묻자 우석이 얼굴을 굳혔다.

“그 개새끼가 너한테 그래? 너 가이딩하는 거 힘들다고?”

“아니.”

우석은 열이 받은 건지 뭔가 가늠해보는지 잠시 민재를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냥 좀… 진맥을 짚는 느낌이랄까. 어느 정도 지점까진 가이딩이 내 손끝을 빠져나가서 들어가는 게 느껴져. 약간… 뭐라고 해야 하냐. 물에 손 담글 때처럼 부드러운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나쁘진 않다는 거네.”

“나쁠 건 없지. 여러 명 긴급 들어온 날은 좀 지치긴 하지만.”

역시. 지환은 스스로를 계속해서 가이딩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꾸 민재에게 가이딩을 한다. 불안정할 가능성이 많은 몸 상태인데 그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근데 그건 왜?”

“그냥.”

“너 설마.”

우석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경악으로 물들었다. 민재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우석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각인… 할 건 아니지?”

“…왜?”

저렇게까지 경악할 일인가. 아무래도 좀 그런가. 민재는 자신이 지환에게 물들어 둘 다 센터 내에서도 예시가 없는 케이스의 돌연변이들이라는 걸 너무 망각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야. 안 돼. 그 싸가지 없는….”

쾅!

우석이 지환의 험담의 뒷마무리가 나오기 전에 누군가 문을 큰 소리로 한 번 두드렸다. 민재가 있는 곳은 민재의 숙소였다. 그러니까 이 층까지 와서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제 말 하면 호랑이도 온다더니.”

우석은 아직 지환이 들어서지 않은 현관을 아래위로 째려보고는 민재에게 인사를 했다.

“어쨌든 안 돼. 안 되는 거야.”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직후 곧바로 문이 열렸다. 

“언제까지 이야기해요?”

지환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민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제 끝났어.”

지환은 득달 같이 달려와 민재의 손목부터 잡았다. 민재는 손목을 잠시 뒤로 빼며 이미 현관을 닫으며 나가고 있는 우석을 불렀다.

“윤 비서 꼭 그만두게 해.”

우석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곧이어 어째서 손목 색깔이 초록색이 되었냐며 징징대기 시작하는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은 퇴근 후에 오준이 우석의 숙소로 와서 자고 가는 날이었다. 기록을 남기면 외부에 나가서 취침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이따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에스퍼들이 있기는 했다. 일정 용량의 가이딩 약품과 밤에 한 번, 아침에 한 번 자신의 위치를 보고한 후 정해진 복귀 시간까지 돌아와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석은 숙소에 머무는 게 편했다. 긴급 상황이 생기면 자신이 제일 먼저 가이딩실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번 정도 오준의 집에서 잔 적도 있지만 꼭 짜놓은 것처럼 그럴 때 사건이 터져 우석이 오준의 단잠을 방해하며 새벽에 센터로 급하게 향하는 일이 생기고 나서는 주로 오준이 우석의 숙소로 오게 되었다. 

오준은 어떻게 들어온 건지 우석의 숙소 문 앞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몇 번 와보았다고 별로 낯을 가리지 않게 된 건지 복도에 서 있는 오준은 편안해 보였다. 은근히 대담한 면도 있고, 여린 면도 있었다. 

“나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가 비밀번호 알려줬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주인 없는 집에 어떻게 들어가 있어요.”

오준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우석은 오준의 뒤에서 안듯이 하며 비밀번호를 해제했다.

“뭐가 어떻게야. 그냥 들어오면 되지.”

오준의 입이 살짝 말려들어가는 게 보였다. 지금 기분이 좀 좋아진 거다. 우석은 그런 오준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둘은 우석의 숙소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 걸어두었다. 오준은 자신이 뭘 사왔다며 주섬주섬 꺼냈다. 센터 근처에서 파는 도시락집의 도시락이었다. 작은 곳이지만 매일 메뉴가 바뀌어서 먹는 재미가 있었다. 우석이 이전에 말한 ‘집밥 분위기’가 난다며 오준이 종종 포장해오는 곳이었다.

마주 보고 앉아 둘은 식사를 마쳤다. 우석은 계속해서 민재의 말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준은 이전에도 나가라는 말에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말을 하는 게 맞을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우석은 가이드였다. 에스퍼였다면 차라리 자신이 있었으려나. 우석은 자조했다. 우석은 센터에 큰 타격이 생길 만한 일이 벌어진다면 신체적으로 오준을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할 말이 있는데.”

오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우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위험할 거 같은데. 센터 그만두는 게 어때요?”

“…그 이야긴 끝났잖아요.”

오준이 눈을 내리깔았다. 우석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혹시 오준도 모르는 사이 세뇌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김진성이 오준의 변화를 눈치채게 된다면?

그러나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오준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낄까 걱정이 되었다.

“…김진성은 하급 정신계 에스퍼야.”

오준의 눈이 다시 커졌다. 그의 동공이 흔들렸고, 그로 인해 우석은 오준이 무언가 짐작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가 더 필요할 거잖아. 당신은.”

오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절대로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우석은 결국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내쉬었다. 둘의 저녁이 싸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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