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53)화 (154/181)

153

잭은 어쩌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는 그 스스로를 불운하다고 여기긴 했으나 오늘은 왠지 다른 것 같았다. 그는 그 실험체가 좋았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원천이 많은 존재였다.

그런데 실험체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갈 줄은 몰랐다. 잭은 한동안 사경을 헤매야 했다. 그동안 어떤 어린애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자신이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잭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다.

그는 날 때부터 천재였다. 누구보다 수학과 철학을 빠르게 익혔다. 세상의 이치는 생각보다 명료해 보였다. 공식을 푸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화학을 전공했다. 박사 학위를 빠르게 딴 그는 자신의 미래가 창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초능력자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배운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파장과 에너지가 등장했다. 이것을 규정할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잭은 도전 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센터의 소속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장을 펼치는 현장의 중심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당시 이제 막 박사를 딴 젊은 연구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언제나 뒤에 서야 했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민재와 관련한 실험을 몰래 따로 진행하기도 했다.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면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처럼 우민재는 쉽게 실험을 따랐다. 

실험 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 실험 쥐가 어느 순간부터 그를 노려보기 시작하더니 뜨거운 화염으로 자신의 다리를 앗아갔다. 불에 조직이 타는 감각은 너무 끔찍했다. 

잭은 새희망복지회에 자리 잡은 후에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우민재가 괘씸했다. 매번 자신을 비꼬던 조 박사와 센터장을 뛰어넘는 위대한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 

“만드실 수 있죠?”

신경준은 그를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어떤 때에는 경외하듯이 칭찬을 했고 어떤 때에는 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덕분에 잭은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었다. 무기뿐 아니라 약과 인큐베이터까지!

매번 잘난 척하던 조 박사도 이런 걸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잭은 자신의 역작을 매번 둘러보며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업적을 이루어낸 그에게 남은 목표는 두 가지였다.

자신의 업적을 모든 이들이 널리 알게 하는 것과, 우민재에게 복수하는 것. 이왕이면 그 둘이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잭은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울분이 향하던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는 건 좋지 않았다. 그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가.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기적처럼 우민재가 다시 나타났다.

운명의 신은 잭의 다리는 앗아갔으나 다른 건 주려는 모양이었다. 잭은 미친 듯이 민재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센터 근방 cctv를 모두 해킹해보기도 했고, 주위를 직접 다녀보기도 했다. 능력을 빼앗고 에스퍼를 센터로 돌려보내면서 도청장치와 소형 카메라를 부착해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잭은 확신을 얻었다. 우민재는 살아 있다.

밖으로 나와 평상복을 입으면 그는 그저 목발을 짚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 눈에 띄긴 했으나 동시에 그래서 시선 안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았다. 박지환이 포착된 길거리에서 추적을 계속하다 그가 일정 지역을 뺑뺑 도는 바람에 그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잭은 곧바로 박지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우민재도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동안은 그들이 그랬듯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잭은 변두리에 있는, 커튼이 쳐진 집 하나를 발견했다. 잭은 그 주변으로 가 이어폰으로 소리를 잡아내는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정확히 들려오는 것들은 없었으나 몇몇 단어들을 들을 수는 있었다. 가이딩 약, 분석, 새희망.

그것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잭은 그 근방에 몸을 숨긴 채 계속해서 몇몇 단어들을 엿들었다. 그러고는 망원경으로 밖으로 나서는 둘의 모습을 확인했다. 둘이 사라지고 나서도 잭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잭은 오늘 정말로 운이 좋았다. 아주 결정적인 것을 손에 쥐게 된 셈이었다. 

***

지환은 왜인지 숙소로 날아오는 내내 입이 튀어나와 있었다. 민재는 그게 복어처럼 보였다. 무언가 생각하는지 그는 평소처럼 조잘거리지도 않았다. 결국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민재는 지환을 붙들었다.

“너 왜 그러는데?”

“…뭐가요?”

“지금 입이 댓 발 나왔잖아.”

지환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나 진짜 진지하게 좀 알아보려고 그런 건데. 왜 각인 질문 못하게 했어요? 혹시 선배 나랑 각인하기 싫어요?”

아. 그 포인트였나.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각인 논할 때가 아니잖아.”

“지금이 어떤 땐데요.”

“센터랑 에스퍼 운명이 경각에 달렸지.”

민재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환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민재를 끌어당겨 안았다. 민재는 못 이기는 척 지환의 손에 이끌렸다. 

“그러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환의 숨결이 민재의 귓가를 괴롭혔다. 가이딩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밀쳤다.

“낭비하지, 말랬지.”

“이젠 후회하기 싫어요.”

지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민재는 그의 얼굴에 서린 감정을 읽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환이 이렇게 애틋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니.

민재는 손을 올려 지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환은 민재의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대어 왔다.

“나도 그래.”

지환의 눈이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눈에는 행복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지금 바로는 안 돼.”

민재의 말과 동시에 지환의 눈매가 다시 뾰족해졌다. 민재는 그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지환의 볼이 늘어나서 얼굴이 둥글둥글해보였다. 

“나 우석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민재가 그렇게 말하자 손에 잡힌 지환의 볼이 당겨졌다. 그의 입이 다시 툭 튀어나왔다.

“아. 왜요.”

“필요하니까.”

각인 문제도 그렇고, 민재가 없는 사이의 공백에 있던 일을 우석에게 좀 물어보고 싶었다. 저번에 산에서는 재회에 집중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우석의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둘이 만나는 건 싫은데.”

“둘이 봐야 되는데?”

지환이 있는 자리에서 가이딩에 관한 질문을 하기가 좀 그랬다. 민재가 말하자마자 지환의 얼굴이 굳었다. 

“…왜요?”

“좀. 말 좀 들어라.”

지환의 볼이 툭 튀어나왔다. 혀로 입안을 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그런 그의 볼을 툭 건드렸다. 지환은 민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어떡하면 좋지?”

뭘 어떡하면 좋은지 모르겠으나 지환은 민재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떼었다. 지환은 민재의 손목을 잡아 가이딩 수치를 확인했다.

“…나 아파요.”

지환은 갑자기 엄살을 부렸다. 민재는 어이가 없었다.

“…어디가.”

“여기.”

지환은 자신의 배 쪽으로 민재의 손을 가져갔다. 민재는 지환을 잠시 노려보다 그의 배에 힐을 써줬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지환이 민재의 손을 가져가 다시 손목을 확인했다. 민재의 가이딩 수치는 슬슬 노랑과 초록을 오가고 있었다. 

“이거 변하면 안 돼요.”

민재의 입이 벌어졌다.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냐.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지환이 그런 민재의 입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민재의 귓가를 울렸다.

“최 실장님 불러줄게요.”

그렇게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나서야 민재는 우석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석은 왜인지 떨떠름한 얼굴로 민재의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박지환 저거 의처증 아니냐.”

우석은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문을 열자마자 툴툴거렸다. 

“의부증이겠지.”

민재는 좀 성가시긴 했지만 지환과 자신은 워낙 서로 죽을 뻔한 일이 많았으니 좀 예민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민재의 말에 우석이 잠시 묘한 표정으로 민재를 보았다. 묘한 의문이 깃든 표정이었기 때문에 무시하고 민재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정보 좀 자세히 줘봐. 그간 넌 발견한 거 있어?”

민재가 묻자 우석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한테 말 못한 게 있는데….”

우석은 민재에게 ‘메리’라는 수상한 인물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의 메일이 새희망복지회와 연관된 사고들을 경고해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자신이 그 건물에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그 안에서 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말에 민재는 태현을 떠올렸다.

“신태현 아니면 이서연이 메리라는 거네.”

“나도 그렇게는 예상하고 있어.”

우석은 민재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야기해볼게.”

“뭘?”

“…물어봐야 할 게 있어.”

우석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민재가 빤히 쳐다보자 우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는 나한테 권력을 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했어. 난 그러면 너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

“뭔가 더 있어. 너한테 말한 게 다는 아닐 것 같아.”

민재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우석은 권력을 바라는 타입은 아니었다. 특히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여기저기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민재의 비밀을 눈치채고 나서부터였다. 

“이서연한테 얻어낼 게 더 있다는 거지?”

“맞아.”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우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센터장을 끌어내리고 나면, 어떡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네가 센터를 맡아야 된다고 생각해.”

우석이 말하는 건 미래의 일이었다. 우석과 제1팀이 새희망복지회를 막는 데 성공하면, 자연스레 김진성도 무너질 것이다. 그건 분명 통쾌하고 옳은 일이지만 센터는 책임자를 잃게 될 것이다.

“…센터가 필요할까?”

민재가 물었다.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고, 우석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