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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김 박사의 주소를 받아두었던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찾아가는 데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환의 품에 안긴 채로 민재는 계속해서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왼쪽이던가?”
민재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지환이 바로 방향을 틀었다. 대략 못해도 다섯 번은 비슷한 곳을 돌고 있었다. 민재는 지환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누가 봐도 똥개훈련이었으나 지환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민재가 말하던 방향으로 일정 속도를 유지하며 비행할 뿐이었다.
“…미안.”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자 지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요?”
“아니 길 잘 기억이 안 나서 너 자꾸 헤매게 하네.”
“그건 괜찮아요. 근데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누구예요?”
지환이 웃으면서 물었다. 벌써 세 번째 하는 질문이었다.
“…김 박사.”
“아.”
김 박사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가 애매해 그냥 누굴 좀 만나야 한다고 했더니, 한사코 누구냐며 오는 내내 따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민재가 김 박사의 이름을 부르자 지환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럼 처음부터 말하시지.”
지환은 길을 잘 기억하는 편인지 어느새 김 박사의 집 쪽으로 날아갔다. 민재는 낯익은 주택을 발견했다.
“저기야.”
지환은 부러 창문에서 보이지 않을 법한 방향으로 날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문 입구 근처에 안착했다. 나무 뒤였다.
“어떻게 해요?”
지환이 속삭이듯 물었다. 둘 사이에 금지된 질문이었으나 지금은 의미가 달랐다. 지환은 전적으로 민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로 했다. 그래서 작은 것에도 민재의 의도와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민재는 잠시 고민했다. 김 박사의 거취를 아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그가 혹시 이사를 했을 확률이 있을까? 혹은 변했을 확률은?
변했다면 어떻게 변했다는 말인가. 민재는 변한 김 박사를 상상해보았으나 딱히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이 없었다. 그저 더 꼬장꼬장해졌다면 모를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민재는 지환의 팔을 살짝 끌어당겼다.
“네가 내 앞에 서서 민재 선배님 부탁으로 왔다고 인터폰 눌러.”
지환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입가가 씰룩이는 것이 꽤 마음에 드는 결론이었던 모양이었다. 민재는 팔꿈치로 지환의 옆구리를 쳤다. 지환은 피식 웃더니 민재를 내려놓고는 등을 보이고는 무릎을 꿇듯이 앉았다.
“업혀요. 그럼.”
민재는 지환의 등 위로 뛰어 안착했다. 지환의 말대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오늘도 모자를 쓰고 있으니 이렇게 하면 누군지 알기 어려울 터였다. 벙거지모자는 색이 별로긴 했지만 그래도 캡보다 편안할 때가 있었다. 장막처럼 눈앞을 가려주는 것도 꽤 안심이 되었다.
지환은 인터폰을 눌렀다. 한 세 번 정도 벨을 누르기 전까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설마 빈집이 되었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유명인이 이 집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김 박사의 목소리는 꽤 딱딱했다. 이전에 반겨 줄 때와는 달리 경계심이 어린 목소리였으나 김 박사의 것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민재 선배님 부탁으로 왔습니다.”
“…작고한 지가 언젠데.”
민재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지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그러고는 인터폰 렌즈 앞에서 모자를 슬쩍 올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
철컥.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환은 뒤를 슬쩍 돌아보고는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쪽으로 향했다.
***
김 박사의 집은 이전과 꽤 달라져 있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사방이 막혀 있어 어두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꼭 바로 떠날 것처럼 필수적인 생활용품만 제외하고 전부 흰 천으로 싸여 있었다.
“…민재 군?”
김 박사는 이전보다 흰머리가 늘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지환과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는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네.”
김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자신 때문에 우는 이들을 최근 들어 꽤 많이 본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황당한 일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겠나 싶기도 했다.
“잘 지내셨어요?”
민재가 인사를 건네자 김 박사가 민재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더니 다독였다.
“나야 뭐… 다행이네. 다행이야. 어쩐지 이상하긴 했어. 민재 군이 그렇게 쉽게….”
민재는 힘없이 웃었다. 김 박사는 이전처럼 소파로 둘을 안내했다. 소파는 민재가 기억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이전에는 꽤 고풍스러운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투박하고 낡은 검은색이었다. 사무실에서 쓸 법한 디자인이라 집이랑 분위기가 묘하게 맞지 않았다. 그 외에도 가구들이 투박하고 분위기가 맞지 않는 것들로 바뀐 것 같았다.
거기다 벽지가 뜯긴 곳도 있었다. 김 박사는 연구자로서 이룬 것이 꽤 있었다. 아무런 복지도 받을 수 없거나 험한 일을 당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지진 않았는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민재가 묻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김 박사는 다소 민망한 듯 웃었다.
“민재 군 그렇게 된 줄 알고 사람들 사이에서 음모론이 많이 돌았어. 때문에 몇 번 도망도 치고 집도 몇 번 부셔지고 그랬지.”
그럴 줄은 몰랐다. 김 박사는 사실상 센터의 의견에 동의한 적 없는 연구자였으나 겉보기에는 중립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더 미움을 사기 쉬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 정말 기쁘다. 여긴 어쩐 일로 왔어?”
민재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민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김 박사가 물었다.
“답은 찾았어?”
“…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네가 나한테 물었던 거 있잖아.”
김 박사가 말했다. 말했던 거? 민재는 기억을 더듬다 자신이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김 박사는 저번에도 이 문제에 관해 물었었다. 그땐 거의 답을 찾은 것 같다고 답했던가.
“에스퍼는 왜 생겨난 걸까요.”
김 박사는 처음엔 신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연구자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나니 민재는 어느새 자신이 더 이상 에스퍼가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재는 어느새 자신을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안 찾기로 했어요.”
민재가 대답하자 김 박사가 미소 지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꽤 짓궂은 표정이었다. 김 박사는 지환을 턱으로 슬쩍 가리켰다.
“여전히 같이 다니는군. 그래.”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지는 모르겠으나 지환은 그렇게 답했다. 그는 지금 이야기하는 게 어떤 건지 아는지 모르는지 괜히 실실 쪼개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이 민재의 삶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는 게 뿌듯하다는 걸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민재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걸 말하려고 온 건 아니고요.”
“그렇겠지.”
김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민재는 자신이 태현으로부터 받았던 가이딩 약품을 내려놓았다.
“센터가 아닌 곳에서 거의 동일한, 어쩌면 더 효과가 좋은 가이딩 약을 개발했어요. 제가 먹어봤고, 딱히 부작용은 없어요.”
“오.”
작은 감탄사를 내놓은 김 박사는 알약을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정확한 건 분석해봐야 알아.”
“이걸 역으로 가이딩을 억지로 발산시킬 수 있게끔 하는 약이 있다면, 만들 수 있을까요?”
민재가 묻자 김 박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 걸… 만들어서 뭐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도 대량으로.”
김 박사는 심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물을 끓인 주전자와 찻잔들을 가지고 민재와 지환 앞에 늘어놓았다. 이전과 비슷하게 향긋한 홍차 향이 퍼졌다. 상황이 심각한 것과 다른 행동이었다.
“감사합니다.”
지환은 넉살 좋게 주전자를 받아 들더니 김 박사의 잔에 먼저 홍차를 따랐다. 그러고는 민재의 잔과 자신의 잔에 채웠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알겠죠?”
내가 유치원생이냐? 민재는 순간 울컥했지만 왠지 그런 기색을 내보이면 더 지는 기분이 될 것 같았다. 김 박사의 시선이 민재 쪽으로 향했다가 못 본 척하듯 스윽 움직이는 게 보였다.
“새희망복지회 말하는 건가?”
김 박사의 목소리는 낮았다. 바로 짚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제가 아는 사람이 있어요. 아마 저를 향한 복수심이 커지면서 일을 벌이게 부추겨진 모양입니다.”
민재가 말하자 김 박사가 턱을 손으로 쓸었다.
“…민재 군이 어디 가서 척을 질 타입은 아니지 않나?”
이 사람은 내 성격을 모르나? 민재는 조금 의아했지만 지환이 너무 진지한 얼굴로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무시하기로 했다.
“가이딩 발산을 급격히 끌어올리는 걸 막거나 조금 예방할 수 있는 약물 개발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이딩 약물을 말이지.”
“가능한 한 필요하다고 하시는 건 뭐든 구해다 드릴게요.”
이런 부탁이 가능한 것도 김 박사뿐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삶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인 거 같으니 쉽지 않은 선택일 수 있었다.
“그래. 알겠어.”
김 박사의 대답은 담백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한 태도였다.
“…괜찮으시겠어요?”
오히려 민재가 되물어야 했다. 그러자 김 박사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천천히 음미하듯이.
“나에게도 나름의 빚이 있어. 마음의 빚이지.”
“….”
“자네는 내가 기현상 연구가니까 에스퍼 발현에 대해 물었었지. 나는 처음 에스퍼와 가이드를 오가는 에너지를 연구하면서 자네들을 제대로 발견하면 국가가 어떻게 나올지 알 것 같았어. 그렇지만 외면했지.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에스퍼. 구조라는 명목으로 활동하지만 사실상 국가별로 전투형 에스퍼를 찾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모두 알았다. 그들의 생체 에너지를 활용한 무기 개발도 추진되고 있을 터였다.
“할 수 있는 거면 해야지. 죽기 전에 하는 게 좋겠지.”
김 박사는 그러고는 미소 지었다.
민재와 지환은 자신들의 몸 상태를 설명하고는 각각 생체 표본을 김 박사에게 건네주었다. 평범한 에스퍼들 몇몇의 피와 필요한 것들을 다시 가져다주기로 약속했다.
“둘이 잘 맞네.”
다음을 기약하며 센터로 복귀하려던 순간이었다. 분위기를 말하는 건지, 에너지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김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각인도 가능할까요?”
“…벌써 거기까지 생각해?”
김 박사의 입이 벌어졌다. 민재는 지환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뒤에도 지환은 각인에 대해서 김 박사에게 계속 의논하려 들었기 때문에 민재는 당장 나가자고 지환의 등짝을 마구 밀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