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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51)화 (152/181)

151

태현은 아버지에게 호출을 받았다. 집 앞에 떡하니 세워진 검은 차를 보고 그는 한숨을 삼켰다. 내려진 창문에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도련님. 부르셨어요.”

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 문을 열고 탑승했다. 집은 여전히 컸다. 이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가족의 풍경이 펼쳐지는 공간은 아니었다. 정원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정원사를 해고했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유였다. 아름다웠던 저택은 시들시들 죽어가면서 기괴하게 변했다. 태현은 그것이 지금 현재 자신의 가족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는 이곳이 평화로울 때도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던 순간이 있었다. 어쩌다가 자신의 아버지는 미치게 된 것일까? 태현은 궁금했다. 기억 속 아버지는 누나의 복수를 해주겠다는 나름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들을 누리게 해주게끔 하는 게 정치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태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태현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묘하게 서연이 불안해하던 것도, 서연이 부탁하듯 자신에게 말해오던 일들이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압박에 의한 거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태현은 서연이 자신에게 자꾸만 오는 게 좋아서, 자신의 곁에 계속 있는 게 좋아서 아버지를 믿고 싶었다. 자신의 가족에게 있는 행복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텅 빈 병이 태현 쪽으로 곧장 날아왔다. 종종 꽃이 꽂혀 있곤 하던 유리 화병이었다. 병은 벽에 부딪혀서 깨졌다. 그사이 파편이 그의 손을 스친 건지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제대로 확인했다고 했잖아!!”

경준은 분노에 차 있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책상 근방을 왔다 갔다 했다. 태현은 동요하지 않고 그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확인했어요.”

“근데 그런 영상이 나돌아? 잭의 단독행동 때문에 계획이 틀어질 뻔했어.”

“홍보효과는 제대로 보았고, 저쪽에선 잘못된 보도라고 발표했잖아요.”

경준은 자신의 책상 위의 노트북을 돌려 태현이 화면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래. 그래서 우리 홍보가 신빙성이 떨어져 보이게 되었잖아.”

“원래도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을 정보예요.”

태현은 흥분한 경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았다. 경준은 평소 확신에 가득 차야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차분하게 확신을 주며 안심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잭 관리도 네 몫이었어. 알지?”

경준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좀 하자가 있는 놈이었잖아요. 개발만 잘하지.”

경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보고 있을까? 태현은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경준이 물었다. 태현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의견을 내면 시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어요. 시간을 좀 끌어서 크기를 키우죠. 사람들이 더 술렁이게 하는 거예요.”

“김진성은 여론 놀이를 잘하지.”

“네. 그걸 역이용해요.”

경준의 얼굴이 조금 더 차분해졌다. 태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

태현이 물었다. 떠보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투를 신경 써야 했다. 다행히 경준은 자신의 상념에 잠겨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 되었어. 다….”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곧’에서 ‘다 된 것’으로 넘어왔다. 초조함이 태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

“꼭 해야 해요?”

지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현에게 연락해 정보를 취득하자는 민재의 말에 계속해서 반대하는 중이었다.

“막말로 어떻게 믿어요. 선배 납치한 놈이잖아요.”

“…살려놨잖아.”

“뼈만 남겨서 보내줬던데. 찾으면 내가….”

지환은 무언가 말하려다 민재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민재는 이제 지환의 협력을 받아 일을 해결해 나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작은 일로 실랑이를 벌이게 될 줄은 몰라 어이가 없었다.

“그거 바람이에요. 딴 놈이랑 몰래 연락하고 그런 거.”

“몰래 아니잖아. 지금 대놓고 말하잖아! 넌 왜 모든 맥락이 그리로 튀어?”

“아. 그냥 선배가 그 새… 사람이랑 연락하는 거 싫어서 그래요. 새희망복지회 쪽 아들이잖아요. 혹시나 다시 배신하면 어떡해요? 조금이라도 위험할 일 만드는 거 싫어요.”

싫은 것도 많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전화할게요.”

“안 돼. 네 목소리 들리면 끊을 거야.”

“왜요?”

지환이 또 도끼눈을 뜨고 수상하다면서 그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자신을 피하냐고 난리를 피웠다. 아니 애초에 주요 증거 자료를 신태현한테 몰래 받아둔 건 지환이었는데 왜 자꾸 민재가 취조를 당한단 말인가. 

“그냥 옆에서 들어. 그럼 되잖아.”

지환은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우선은 민재의 제안을 수긍했다. 

“문제 생길 거 같으면 내가 뺏어서 끊을 거예요.”

“짜증 나면 너 때려도 되냐?”

진심이었다. 그러나 지환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건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도 안 돼요.”

이 새끼 뭐라는 거냐. 민재는 경고했으니 정말로 지환을 한 대 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폰을 꺼내 들었다. 

“폰도 구린 거로 준비했네.”

지환은 괜히 낡은 폰을 보고 툴툴거렸다. 추적에 덜 걸리기 위해 부러 이런 폰을 사용했을 테지만 그런 이야길 하면 또 편을 드네, 왜 변호를 해주네 하면서 난리를 칠까 싶어 민재는 입을 다물었다. 

민재는 통화 볼륨을 최대로 키우고는 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지 않아도 들릴 텐데 지환은 굳이 민재가 폰을 들고 있는 쪽 얼굴 바로 옆에 자신의 얼굴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민재가 지환의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자세가 되었다. 

[전화가 좀 늦었네요.]

태현의 목소리는 지친 것처럼 들렸다. 혹시 모르니 부러 지칭을 하진 않았다.

“사정이 있었어.”

민재의 목소리를 확인한 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래 보였어요. 미쳤다고 거길 들어가서 영상을 찍혀요?]

꽤나 까칠한 말투였다. 지환의 가슴이 들썩이는 게 등 뒤로 느껴졌다. 민재는 바로 폰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지환의 얼굴 쪽에 갖다 대었다. 닥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지환은 민재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네가 정보를 제대로 안 줬잖아. 협조한다면서. 똑바로 안 해?”

민재도 부러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아버지 쪽에는 확실히 죽였다고 해 놨어요. 그러니까 좀 잘 숨어 다녀요. 아직 센터에 있어요?]

“…어.”

[…설마 박지환이랑 같이 있어요?]

“아니.”

‘설마’라는 단어 때문에 민재는 빠르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자 지환은 그런 민재가 못마땅한지 그의 손가락을 전보다 조금 더 세게 깨물었다. 

[…센터에서 나오면 따로 공간 확보해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사정이 어렵게 되었어요.]

“공간 확보는 상관없는데, 뭐 좀 물어보자.”

[네. 물어봐요. 통화 길게는 못하니까 빨리.]

“너희 쪽에서 개발하고 있는 약물 용도가 정확히 뭐야?”

민재의 매우 직접적인 질문으로 인해 한동안 침묵이 유지되었다. 끊은 건가? 확인해 보았으나 통화 중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못 들었어?”

[…잠시만요.]

발자국 소리와 문소리가 들렸다. 어디론가 숨어들어가는 건지 나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약간의 백색소음이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왔다.

[가이딩 촉진제예요.]

“가이딩 촉진제?”

[네. 그러니까 에스퍼와 접촉하는 것과 상관없이 가이딩 소진을 촉진하죠.]

“…가이드용으로 제조되고 있다는 소리야?”

민재가 물었다. 가이드들을 없애서 센터를 위험하게 만들려는 생각인 건가?

[아니죠.]

그러나 태현은 바로 단호하게 부정했다. 

[둘 다죠.]

아. 민재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인큐베이터라고 불리는 캡슐이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참 이상했다. 에스퍼를 완전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도, 에스퍼를 없애고 싶어 하는 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에스퍼를 실험하고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랬다. 

[통화 더 못 해요.]

태현의 목소리는 왜인지 조금 다급했다.

“다음 통화는 없어?”

[네.]

민재는 어쩐지 지금 가장 위험한 건 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해. 가능하면 살아서 보자.”

어찌 되었건 그는 자신의 친부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누나는 거의 볼모처럼 센터에 잡혀 있고, 자신 또한 친부의 볼모인 셈이었다. 민재는 주변 사람이 저당 잡힌 채 움직이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는 일종의 연민인 셈이었다. 

[제 부탁… 잊지 말아주세요.]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가 거래라고 제안했던 건 어느새 부탁으로 변해 있었다.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가는 걸까. 그의 유일한 거래이자 부탁은 서연의 안전이었다. 민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배는 왜 그렇게 착해요?”

문득 지환이 그렇게 말했다. 민재는 어이가 없었다. 지환은 모를 것이다. 민재는 서연의 목숨을 보장해달라는 태현을 협박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듯 서연이 건넨 정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어쩌면 이 행위는 태현을 배신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될지도 몰랐다.

“나 안 착해.”

“꼭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

지환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민재에게서 폰을 가져갔다.

“이제 필요 없는 거죠?”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폰이 조각났다. 지환은 폰을 한 손으로 부순 다음 그 안에 있는 칩과 비슷한 형태의 것들 찾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부쉈다. 이따가는 그걸 불태울 것이다. 지환은 민재와 연관된 것들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지환아. 우리 나갔다 와야겠다.”

민재가 말했다. 지환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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