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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50)화 (151/181)

150

우석과 은정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민재는 지환이 혼자 부스럭거리는 걸 발견했다. 뭐지?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슬쩍 짚었다.

“뭐해…?”

“선배 먹을 거.”

지환은 언제 가져다 둔 건지 꽤 커다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과자와 빵 음료 등이었다. 화기를 사용할 수는 없으니 주전부리로 먹기 좋을 법한 것들이었다. 

“…선배 이거 좋아하잖아요.”

지환은 빵 한 봉지를 뜯더니 일부분을 손으로 떼 민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민재는 우석과 은정의 시선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빨리 먹고 치우는 게 상황 정리에 나을 거 같아 냉큼 받아먹었다.

“…우리 거는?”

은정이 물었다. 매우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지환은 과자들 중 몇 봉지를 은정과 우석 쪽으로 밀었다.

“취향에 맞는 걸로 골라 먹어.”

“…고맙다.”

어쩐지 우석은 지환과 일 년 전보다 더 어색해진 듯했다. 은정은 과자와 빵을 모조리 뜯어서 펼쳐 놓고는 주워 먹기 시작했다. 지환은 음료 뚜껑도 까 민재의 입 앞으로 들이댔다.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민재는 받아 마셨다.

친구들과 좁은 공간에 모여 앉아 작은 불빛에 의존해 과자나 빵을 뜯어먹는 상황이 왠지 민재에게는 묘했다. 그의 삶에서 겪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캠핑 와 본 적 있어?”

우석과 은정에게 물었다. 그러자 은정은 고개를 저었고,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오준이랑….”

말하다 실수한 걸 깨달은 사람처럼 우석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들었어. 윤 비서랑 사귄다며?”

민재가 말하자 우석은 헛기침을 하다 사레를 들려버렸다. 그대로 은정 쪽으로 침을 튀기는 바람에 은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누가 그래?”

“지환이가.”

민재가 말하자 우석은 지환을 슬쩍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비밀이야. 아무래도 위험해지는 건 윤 비서님 쪽일 거 같아서.”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더니 곧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우석이 연애를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나름 상대를 배려해가며 잘 사귀는 모양이었다. 이전 우석은 몇 번 연애를 한다고 말했으나 외부인이었기 때문인지 오래가질 못했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민재가 나지막하게 은정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나야 뭐. 비슷했어. 선배가 없어서 슬픈 걸 빼고는.”

“서연이가 요샌 잘 안 나다니나 보더라.”

“…선배 그렇게 되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텐트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재는 이 어색함을 견디는 게 조금 힘들었다. 우석과 은정은 분명 민재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민재도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눈앞의 이들을 두고 달아날 결심을 했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이 공간 안에는 잘못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모두가 죄인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는 순간들이 생겨버렸다는 것이 민재는 씁쓸했다. 

“그러지 마.”

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우석이 당황한 듯 물었다.

“그렇게 죄인처럼 굴지 말라고. 둘 다.”

“….”

“늦게 와서 미안하다.”

“아 선배가 왜 사과를 해!”

 은정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지환의 눈썹이 구겨졌다.

“누나. 우리 선배 귀 아프겠다. 조용히 좀 해.”

“싸가지 없는 새끼. 너나 조용히 해.”

대뜸 지환이 시비를 걸자 은정이 받아쳤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누나, 누나 하면서 따르는 게 보통 친밀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누나라고 했대?”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자 우석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모른다는 표시였다. 지환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민재를 돌아보았다. 민재의 고개가 살짝 뒤쪽으로 향했다. 

“왜요?”

그러고는 뜬금없이 이유를 물었다.

“왜긴 왜야. 원래 선배님, 선배님 꼬박꼬박 잘 부르던 애가 누나, 누나 하니까 그냥 물어본 거지.”

“아니 선배. 들어 봐. 이 싸가지 없는 게 글쎄 자기한테는….”

민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정은 억울한 표정을 하며 무언가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환은 그런 은정을 옆으로 살짝 밀더니 민재의 얼굴을 잡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민재의 시야가 지환으로 가득 찼다. 

은정이가 밀렸어? 그 와중에 민재는 그게 신기했다. 그가 밀려고 자주 시도해 보다가 포기한 건데 저렇게 쉽게?

“선배.”

지환은 왜인지 잔뜩 신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 추워서 뇌가 얼었나? 민재는 지환의 기분을 도통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죠.”

텐트 안의 분위기가 단번에 다시 싸늘해졌다. 이놈은 왜 자꾸 이런 멍청한 소리를 해 대는 거야! 민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악! 더러워!”

은정이 비명을 지르며 텐트 구석 쪽으로 돌아앉았다. 민재는 여전히 지환이 은정을 누나라고 부르게 된 사연이 궁금했으나 은정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고, 지환은… 민재가 대화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실실 쪼개면서 민재의 팔짱을 끼고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어서는 몸을 배배 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선배 너무 귀엽다. 어떡하지?”

“아악! 아아악!”

은정은 계속 비명을 지르며 듣지 않으려는 듯 귀를 막았다. 우석은 체념과 경악이 섞인 묘한 얼굴로 굳은 채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우석이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재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으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넷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어떤 순간에는 정보들이 오고 갔고, 어떤 순간에는 이전처럼 장난과 농담이 오고 갔다. 생각보다 빠르게 바깥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날 샌 거야?”

은정이 의아한 듯 물었다.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 민재는 지환의 손길을 따라 그의 어깨에 고개를 올렸다. 그러자 나른함이 밀려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밤이 끝나고 나면 다시 넷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의 일상에는 늘 테러와 폭발과 위험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니 민재는 지금을 잠시 새겨두고 싶었다. 

‘역시 돌아오길 잘했다.’

민재의 머릿속에 작은 확신이 솟아났다. 민재는 입을 열었다.

“우석아.”

“어?”

“윤 비서 퇴사하라고 해. 김진성은 정신계 에스퍼야.”

민재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여상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굉장히 중요하고 무거운 정보였다. 사실 털어놓는 게 좋은 선택일지 한참을 망설였지만 우석의 소중한 사람이 근처에 있다고 하니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뭐?”

우석의 되물음은 잠깐의 텀을 두고 돌아왔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왜 일반인인 정치인이 굳이 센터를 세우려고 했는지. 약물 개발에 그렇게 혈안이 되고 에스퍼 이미지에 예민한지. 알고 나니까 이해가 가더라고.”

“아니… 확실해? 어떻게 알게 된 건데?”

민재의 말에 은정이 물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은정에겐 더더욱 갑작스러운 정보일 것이다.

물론 지환에게도 아직 말하지 못한 정보였다. 지환이 도끼눈을 뜨고 민재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지환은 민재의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줬다 뺐다 하며 재촉했다. 빨리 설명하라는 것이다.

여태 말하지 못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은 아무리 서연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지만 정보의 출처를 공개하면 발생하게 될 여러 상황이 걱정되어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렇게 중요한 정보는 일단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우선은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민재는 이 공간에서 같이 살아 숨 쉬는 이들을 온전히 믿었다. 하나는 에스퍼고, 하나는 가이드고, 하나는 완전한 에스퍼도 아닌 돌연변이고, 하나는 멀티라는 명칭을 갖게 된 존재였다. 모두 세상의 변두리에 속하는 괴짜들이었고, 괴물 취급을 받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민재는 지금 이 순간, 절벽 위에서 웅크려 앉아 있으면서 김 박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회상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민재는 이제야 자신을 그저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보는 확실한 거야. 센터장의 가이드였던 이서연으로부터 얻은 정보니까.”

그대로 은정이 굳어버리는 게 보였다. 민재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 그 날….”

지환은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서연인 진심으로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막고 싶어 해. 그러니까 나한테 목숨이 달린 정보도 줬겠지.”

충격 받은 표정의 은정에게 민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건넸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은정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우리는 크게 영향을 안 받는 거 같아. 그러니까 여태 잘 몰랐지.”

민재의 말에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상한 거 못 느꼈대?”

“…못 들었어.”

우석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위험하니까 아예 벗어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민재의 말에 우석은 알겠다고 답했다. 텐트 바깥이 살짝 하얗게 밝아지고 있었다. 

“…해 뜨나 보다.”

우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재는 밝아지는 주변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우리 1팀 다시 합치자.”

민재가 말했다. 우석과 은정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터였다. 그걸 막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민재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해체한 적 없어요. 계속 선배 팀이었어.”

지환이 그렇게 말하며 민재를 안았다. 그러고는 텐트의 지퍼를 내렸다. 밝아오는 절벽의 풍경이 보였다. 윤곽에서 나무의 짙고 옅은 갈색과 암벽의 회색이 각각의 빛깔을 찾아갔다. 

지환은 우석과 은정부터 아래쪽에 데려다주고 오겠다고 했다. 지환은 은정부터 업고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민재는 우석과 둘이 남게 되었다.

“…잘 왔어.”

우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그냥 돌아오지 말지 그랬냐고 했던 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반겨줘서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진짜로.”

우석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그때 우석과 민재의 사이로 지환이 날아들었다. 

“둘이 눈빛 교환하지 마요.”

지환은 또 몇 번이나 도망치면 안 된다고 민재에게 주의를 준 후 우석을 들고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왜인지 우석이 억! 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잠시 후, 지환이 다시 민재에게 날아왔다. 민재에게 다시 노란 모자를 씌운 지환은 그를 안아 들었다.

“저거 치우고.”

민재가 텐트 쪽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내가 할게요.”

지환은 고개를 까딱여 보이더니 민재를 보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꽉 잡아요.”

“뭐?”

그 순간. 지환이 빠른 속도로 하강을 시작했다.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몸을 훑었다. 민재는 지환의 목을 조르듯이 껴안았다. 지환이 목이 울리도록 웃는 소리가 귀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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