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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49)화 (15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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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지환과 합의를 보았다. 우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을 미룬다. 대신 우석과 은정과 따로 몰래 만날 수 있을 기회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지환은 민재를 위해서 행동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간중간 민재의 아이디어에 반기를 들긴 했으나 지환은 민재의 말이라면 대부분 수긍했다. 선배와 팀장님을 오가며 호칭도 변경되었다. 지환은 민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기회를 만들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 해?”

“안전하게 하기로 했잖아요.”

지환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고는 지환이 건네는 벙거지 모자를 받아 들었다. 챙이 길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모자였다. 문제는 색이 유치원 모자처럼 노란색이라는 것이었다. 

“아 이거 쓰니까 진짜 귀엽다. 어울릴 줄 알았어요.”

지환이 싱긋거리는 입술만 겨우 보였다. 내 눈코입이 안 보이는데 귀여운 건 아냐. 민재는 지환의 주접이 어이가 없었으나 딴지를 걸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최근 깨달은 사실인데 지환은 생각보다 잘 삐지는 편이었다. 거기다 뒤끝도 길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센터와 에스퍼들을 구할 자료를 살피는 내내 태현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져 대서 민재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결국 그가 태현과 연락할 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털어놓게 만들었다. 

민재도 나름 말로 사람 떠보는 데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는데 지환의 집요함에는 이기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중요한 증거자료를 숨기고 있었으면서, 민재가 태현과 연락할 수단을 숨기고 바람을 피웠니 어쩌니 지랄을 몇 시간을 해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이라는 단어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민재도 어쩐지 그런 지환에게 우리가 그런 걸 따질 사이는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민재도 지환이 다른 누군가와 자신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환을 달래주느라 몇 시간을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지환은 하루 반 만에 은정과 우석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마음만 먹으면 참 대처가 빠른 앤데. 민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걔네는 모른다고?”

“네. 알고 오면 흥분해서 이미 센터에서 다 티 날걸요.”

지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 지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우석은 대놓고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었고, 은정도 알게 모르게 여렸다. 

민재는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이 마음에 들면서도 지환이 은정과 우석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일 년 사이에 지환은 은정과 우석과 가까워졌고, 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지환은 선배들을 잘 모르고, 눈치만 보는 애였는데 말이다. 

지환이 민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민재는 잠자코 그에게 안겼다. 지환은 또다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아마도 센터에는 ‘박지환이 또 죽은 우민재 숙소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고 있을 터였다. 

“우리 어디 가?”

민재는 구석진 회의실이나 훈련장을 생각했다. 아니면 우석의 사무실이라든가. 아직 은정을 두려워하는 에스퍼들이 있을 테니 금지된 여자 에스퍼 숙소로 숨어 들어가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지환은 민재를 안아 든 채로 센터 건물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가보면 알아요. 좋은 데.”

좋은 데. 이런 말을 하는 지환은 불안했다. 민재는 문이 다 닫혀 버린 어두운 바닷가를 떠올렸다. 지환은 여행 비슷한 건 계획하는 데 좀 젬병인 것 같았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지환은 바다로 향하진 않았다. 

문제는 향한 장소가 절벽이라는 거였다. 

“이게… 뭐야?”

“안전한 데요.”

지환은 씩 웃더니 이미 설치된 커다란 텐트 앞에 민재를 내려놓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럼 우석이랑 은정이는 어떻게 와.”

“산 조금만 타면 와져요. 밤에는 출입금지된 데지만.”

“….”

민재는 지환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정은 정녕 지환의 부름에 응할 것인가. 그리고 지환을 가만둘 것인가. 민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은정의 분노를 삭여 주길 바랐다. 

“야… 우석이는 이제 관절이 삭기 시작할 나이야.”

민재의 말에 지환이 또 도끼눈을 떴다.

“최우석 실장님이 그.렇.게 걱정되세요?”

말을 할 수가 없다. 지환은 날 수 있지만 다른 애들은 못 나니까 한 소린데. 민재는 입이 또 헤벌어졌다.

“너는 왜 또 그리로 맥락이 튀어?”

“선배 모자 사기 전에 산등성 근처로 모셔다 놨어요. 이따 시간 맞춰 오라고. 중요한 일이라고. 내가 어련히 잘 했을까.”

지환이 툴툴거리자 민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민재가 지환을 슬쩍 바라보자 지환은 삐진 기색을 있는 대로 풍기며 민재를 바라보았다.

“…텐트도 네가 설치했어?”

“네.”

민재가 말을 돌리자 지환이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쁘네.”

“뭐라고요?”

민재가 어색한 말투로 칭찬하자 지환은 빠르게 민재의 옆으로 붙으며 귀를 들이밀었다. 분명 들었는데 이러는 거다. 민재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잘했다고. 어디서 이런 거 해 봤어?”

민재의 투박한 칭찬에 지환은 그를 뒤에서 꽉 껴안아 흔들었다.

“아뇨. 공부했어요. 진짜 잘했죠. 저.”

“…그래.”

뭐 어떻게 한 건지 꽤 커다란 텐트인데 깔끔하고 튼튼하게 설치가 된 것 같았다. 지환은 미리 준비해두었다며 작은 전기 등불을 여러 개를 근방에 설치했다. 

“이건 눈에 안 띌까?”

“이쪽 방면으로 지나가는 비행기도 없어요. 여기 맞은편도 산맥이라 안 띄어요.”

지환의 대답은 침착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환이 준비해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지환은 텐트 안에서 담요를 꺼내 민재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혹시 몰라서 불은 못 피울 거 같은데. 추우면 말해요.”

“안 추워.”

춥지 않다고 했는데도 지환은 민재를 담요로 꽁꽁 싸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때 풀숲 사이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환과 민재는 동시에 침묵했다. 민재는 왜인지 모르게 잔뜩 긴장한 채로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

“아… 진짜.”

역시나 열이 받은 듯한 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석은 은정에게 업힌 채인 것 같았다.

“아니 그거 걸어오는 데도 그렇게 힘들어?”

지환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야. 진짜 중요한 거 아니면 너 뒈질 줄 알아. 꼭 여기서 봐야 한다는 사람이 누군데….”

은정은 지환에게 윽박지르며 우석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은정은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민재는 조금 민망해졌으나 모자를 잡고는 살짝 들어 올렸다.

“아….”

은정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잠시 뒤 그녀의 뒤에서 우석이 민재 쪽을 돌아보았다. 우석은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뒤늦게 은정과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우석은 비틀거리며 민재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앞에서는 발이 걸린 건지 넘어질 뻔해서 민재가 우석의 팔을 잡고 바로 세웠다. 

“…민재야.”

우석이 퍼석한 목소리로 민재를 불렀다. 

“어. 오랜만이다.”

민재가 답했다. 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미안해… 내가….”

우석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민재는 우석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웃으면서 인사할 법한 상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나 대뜸 사과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은정을 바라보자 은정도 같은 얼굴로 민재 곁에 다가와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은정은 민재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짚어보더니 그제야 흑 하고 숨을 내뱉었다. 

“야… 야….”

얘네… 설명 안 했어? 당황한 민재는 해명을 요구하듯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지환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약간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가 멍청하게 안 들어갔으면, 너, 너, 그렇게… 안 되었을 텐데. 민재야. 미안해. 비겁해서 미안해….”

우석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말을 내뱉었다. 민재는 그제야 자신이 처음 건물로 들어갔던 이유가 우석이었음을 떠올렸다. 자신이 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걸로 되었다 싶었는데 이들에겐 그것이 상처가 되었다. 민재는 우석과 은정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지환이 민재의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곡소리 울리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죠.”

지환은 민재의 손을 잡고는 텐트 안쪽으로 안내했다. 보송보송해 보이는 털이 달린 방석이 하나 있었는데 지환은 그 위에 민재를 앉혔다. 아니. 방석이 왜 하나야? 민재는 엉덩이를 떼려고 했으나 지환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바닥 차요.”

아니. 그러니까. 왜 나만? 민재가 항의하려고 했으나 아직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우석과 은정이 그냥 앉으라고 해서 얌전히 엉덩이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석이 물었다. 지환은 민재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는 민재의 손을 조몰락거렸다. 나머지 하나의 손은 은정에게 빼앗겼다. 은정은 민재의 손이 믿기지 않는지 잡아보고는 왜 이렇게 작아졌냐고 물었다.

“은정아 네가… 원래 손이 훨씬 더 컸어….”

“…그랬어?”

은정의 눈이 다시 시뻘겋게 물들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우석에게 그간의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신태현이?”

태현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은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순간순간 살벌한 얼굴을 했으나 서연과 엮여 있는 관계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럼 지환이랑 만나기 전에는?”

우석이 다시 물었다. 민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도망쳤었어. 어차피 죽은 몸이니까.”

그 말에 우석의 얼굴에 씁쓸함이 지나갔다. 

“그럼 멀리 가지. 뒤도 보지 말지. 왜 여길 다시 기어들어와.”

진심이 담긴 타박 같았다. 민재의 삶을 옆에서 보아 온 우석은 민재가 도망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민재는 그럴 수 없었다.

우석의 말에 지환이 조용히 우석을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의 손가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지환은 표정을 풀고는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우석을 향해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 우석도 쓰게 웃었다. 

“너희 보고 싶어서.”

“헝… 선배에… 진짜 이제 어디 다치면 안 돼. 어디 가도 안 돼.”

은정이 민재를 끌어안으며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은정의 등을 토닥였다.

절벽 위의 텐트는 적당히 비좁아서 서로의 체온으로도 충분히 따듯했다. 민재는 지환이 어깨를 안아오는 걸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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