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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환은 아침에 일어나 폰을 확인하더니 조 박사에게 가봐야겠다며 한참을 울상을 짓다가 나갔다. 그러고 두 시간 정도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잠깐이면 된다더니. 혹시 문제가 생겼나?
그러고 보면 지환도 가이딩 능력을 가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검사나 확인이 필요할 텐데. 좀처럼 민재의 곁을 떠나지 않는 데다 지환이 자꾸만 민재를 정신없게 해서 고려해두지 못했다. 돌아오면 가이딩 더 못 하게 해야 하나? 어제 각인을 하자고 덥석 받아들여서 무리하게 만든 건 아닐까? 꼬리를 무는 의문과 걱정들이 서서히 민재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건 자신답지 않았다. 민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다운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민재는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민재 개인에게는 비극이었으나 운이 좋게도 과하게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다. 그래서 힐을 사용하거나, 힘이 센 신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는 걸 민재는 지금 깨달았다.
민재는 지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상처 입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운 게 생겼고, 민재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각이 싫지만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민재가 방 안을 백 번쯤 왔다 갔다 했을까. 창문이 열렸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지환이 들어왔다. 그는 다친 새처럼 휙 날아들어 민재를 안았다. 민재는 지환의 상태를 살피려고 노력했다.
“어디 봐. 무슨 일 있었어?”
민재가 묻자 지환이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나 기다렸어요?”
지금 그게 중요하냐. 지환은 꼭 엉뚱한 소릴 했다. 민재는 지환을 슬쩍 밀어내고는 그의 상태를 살폈다. 우선 얼굴은 다행이 멀쩡해 보였다. 이마를 짚어 보았으나 딱히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뭐 했는데.”
민재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냥 주사 맞았어요.”
지환의 눈이 살짝 내리깔렸다.
“무슨 주사?”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러자 지환의 얼굴에 풀이 죽었다. 그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닌데.
“모르죠. 저는.”
원래 조 박사는 제가 뭘 개발했는지 나불나불 자랑을 해대는 걸 즐겨 하는데 지환에게는 그런 것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고 주사를 놓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민재는 지환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 그의 손목을 확인했다.
그의 가이딩 수치는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바닥 쪽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는 것을 확인한 민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거 뭐야.”
“아. 이거….”
민재는 지환이 입고 나간 작업복의 지퍼를 내렸다. 그러고는 어깨부터 상태를 확인했다.
“뒤돌아봐.”
“아니. 선배….”
지환이 당황스럽다는 듯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쪽을 가렸다. 그러자 까진 상처가 난 그의 손등이 보였다. 민재가 지환을 쳐다보자 지환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이거 주사가 좀 아파서 옆을 쳤더니….”
“너 바보야? 이렇게 될 정도로 세게 치면 어떡해.”
사람은 고통을 느낄 때 그 고통을 잊으려고 다른 부위에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망가뜨릴 정도면 얼마나 고통스러웠단 말인가. 민재는 속이 쓰렸다. 한숨을 내쉬자 지환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주사 맞으니까 어떤 느낌이었는데?”
민재가 지환의 손을 살피며 물었다.
“…그냥 좀… 잘 모르겠어요.”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에 힐을 주입했다.
“아….”
지환이 작게 신음했다. 민재는 그의 상처가 모조리 아무는 걸 확인한 다음 깨끗한 수건을 미지근한 물에 적셔 지환의 손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지환은 민재가 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턱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입맞춤을 타고 가이딩이 민재의 몸을 채웠다. 딱히 크게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지환은 민재가 조금이라도 능력을 사용하는 걸 보면 불안해하며 가이딩을 하고 싶어 했다. 민재는 빠르게 지환의 상체를 밀어냈다. 밀려나는 지환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사 맞고 와서 나한테 가이딩 쓰지 마. 문제 생겨서 아프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아… 선배가 뽀뽀해주면 안 아플 거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어진 민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와 다르게 조금 쓴웃음이었다.
“역시 그냥 밝힐까?”
“뭘요?”
“…나 살아 있는 거.”
따스하던 지환의 얼굴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뭐라고요?”
지환이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민재는 지환의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
“이미 온갖 곳에 내 영상이 돌았다며.”
민재의 말에 지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조작 영상이라고 기사 나갔어요.”
“네가 내보냈어?”
“네. 기자회견까지 다 했어요.”
민재는 지환의 말에 인상을 썼다. 지환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자신이 민폐가 되는 건 싫었다. 새희망복지회는 우민재를 노리고 있다. 그런데 나서서 지환이 그를 두둔하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는가.
“왜 그랬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지금?”
지환의 표정에 날이 섰다. 지환은 민재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크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지금 표적이 난데 난 숨어 있잖아. 근데 네가 전면에 나서면 어떻게 되겠어?”
“어떻게 되긴요. 적어도 시선을 나한테 돌리겠죠.”
“그게 싫다는 거잖아. 지금.”
이번엔 지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꽤 큰 소리였다. 지환은 이럴 줄 알았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민재는 뭘 그럴 줄 알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너랑 다른 애들이 위험해지는 건 싫어.”
민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지환이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민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미치겠다, 정말.”
지환의 태도는 못 말리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였고 민재는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지환은 이내 얼굴을 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건 절대 안 돼요.”
“….”
저번에도 말했지만 민재는 지환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민재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지환은 잠시 기다려 보라며 방 안을 뒤적거리다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선배.”
지환이 비장하게 민재를 불렀다. 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지금의 지환은 처음 민재에게 인사를 건네고 시위대 앞에서 그를 지키고 싶노라고 말할 때의 얼굴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선배 못 말려요. 선배가 원한다고 하면 진짜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어요. 뭘 시켜도 망설이지 않고 할 거예요.”
일단 비행이 가능해도 그냥 우주로 나가면 죽을 테지만, 그렇게 말하는 지환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뭘 시켜도. 라는 말에는 묵직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에스퍼는 국가에서 애매한 위치였다. 군대처럼 국가에 소속되어 있지만 완벽하게 군인도 아니고, 일반인은 더더욱 아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완전히 군인처럼 전쟁을 위해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런 애매하고 이상한 제도권에 들어간 돌연변이인 민재는 어쩌다 실장직을 꿰차게 되었고, 그래서 명령을 내려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게 맞나? 수십 번씩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다. 초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에게도 목숨은 하나씩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 그를 아무런 의심 없이 믿겠다고 말해주는 건 민재에게 목숨을 맡긴단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환은 민재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손을 펴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무언가를 올려주었다.
“저한테 팀장은 영원히 선배뿐이에요.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지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근 지환은 민재에게 늘 다정했고, 그가 위험할까 봐 안절부절못했지만 이전의 팀장처럼 대하진 않았다. 그것이 나쁘지 않았지만 이따금 민재는 그게 서운하기도 했다.
민재는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제대로 인정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된 동경일지라도 자신을 대단한 존재처럼 바라봐주는 지환에게 기대했던 어떤 것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지금 지환의 말은 민재에게 의미가 컸다. 민재는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진 자그마한 칩을 내려다보았다.
“확인해 보시죠, 팀장님.”
지환이 자신이 확보한 정보라며 보고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는 장난스레 씩 미소 지었다. 민재는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민재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지환에게서 노트북을 받아 들었다.
지환은 usb포트에 칩을 연결시켜 민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공유해주었다. 민재는 비로소 지환이 어떻게 새희망복지회에서 그렇게 빠릿하게 움직였는지, 자연스러운 기색을 풍겼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걸 왜 이제 보여줘?”
“바로 보여주면 혼자 도망쳐서 잠입할까 봐요.”
기분이 나쁘지만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죽은 상태인 자신이 혼자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민재는 우선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고 덧붙여 물었다.
“이거 누구한테서 받았어?”
지환은 섣불리 대답하기가 망설여지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뭐지? 민재의 머릿속에 많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신태현한테서요.”
후보에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러다 문득 민재는 지환이 태현과 친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너랑 친했지.”
“선배 납치해가기 전까진 그랬죠.”
지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민재는 눈을 끔벅였다.
“어쨌든 부러 살리려고 했다잖아. 너한테 이런 증거도 보내고.”
“…선배. 왜 신태현 편을 들어요? 그 새끼랑 뭐 있었어요, 설마?”
“…뭐?”
어이가 없어진 민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생각이 그리로 튄단 말인가. 민재는 지환의 굳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요?”
이 멍청한 새끼를 어떡하면 좋지?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