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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민재 선배를 두고 나와야 하는 일이 또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민재는 이제 어딜 움직이면 지환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당장 하면 좋을 테지만 각인에 대해서도 ‘안전’만 확보된다면 하자는 긍정적 답변까지 들었다. 정확한 시기를 정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큰 발전이었다.
지환은 자신이 두고 온 민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근 홀쭉하게 상했던 볼이 제자리를 찬찬히 찾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옆에서 잠이 든 민재의 눈꺼풀과 속눈썹, 그리고 그의 손이 지환에게 뻗어질 때를 생각했다.
최근에는 민재가 이따금 응석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 자신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지환이 안아 드는데 얌전히 팔을 뻗는다든가, 알게 모르게 지환에게 이것저것을 해 달라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그리고 가장 지환을 흥분시키는 점은 바로 민재가 지환에게 약하다는 점이었다. 원래 약한 존재에게 무른, 정이 많은 타입이었지만 민재는 현재 지환에게 유독 약했다. 그가 우는소리를 하면 순식간에 묘하게 말랑해지는 그 얼굴이 미치도록 좋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지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에게는 민재가 있는 곳이 집이었다. 돌아갈 곳에 자신을 기다리는 민재가 있다니. 생각하니 말도 안 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지환은 그런 상념에 젖은 채로 센터 뒤쪽으로 난 길로 향했다.
센터의 에스퍼들 중 오로지 민재와 지환만이 오고 가는 길이었다. 그와 둘이서만 나누는 비밀이자 둘만의 비극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환은 그 비극마저 좋았다. 자신은 그것으로 민재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 민재는 그런 지환을 불쌍히 여긴다. 민재는 불쌍한 사람을 결코 그냥 넘길 줄 모르니까 평생 돌연변이인 지환은 계속해서 민재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조 박사의 실험실은 여전히 어둡고,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건지, 아님 환기를 잘 시키지 않는 건지 어딘지 모르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매번 제 머리를 쥐어뜯는 건지 뒤쪽의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하고 있는 조 박사도 그런 환경 조성에 한몫했다.
“왔어?”
조 박사는 태연하게 손을 팔랑거리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 책상에 엎드려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은 채였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피곤한 척하지 마.”
지환의 말에 조 박사가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바쁜데. 너 내가 개발한 거 알면 깜짝 놀랄걸?”
지환은 조 박사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그의 옆쪽에 높여 있던 의자를 발로 툭툭 차서 앉기 편하게 만든 다음 걸터앉았다.
“내가 네 목숨 줄 쥐고 있는 거 잊은 건 아니고?”
지환은 조 박사의 앞에 손을 쫙 펴 보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등을 살펴보았다. 좀 흠집 나서 돌아가면 선배가 불쌍해하겠지? 지환은 그대로 주먹을 쥐고는 조 박사의 코앞으로 주먹이 스치게 해서 책상을 내리쳤다. 쩍 하고 책상이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 박사가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배짱 좋게 센터장한테 징징거려서 날 부른 용건은?”
지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 박사를 내려다보았다. 조 박사의 눈빛에 일순간 분노가 스쳤으나 이내 그걸 감추는 게 보였다. 그는 실실 쪼개면서 지환에게 굽실거렸다.
“보고하려고. 네가 나한테 시킨 거 있잖아.”
“시킨 게 아니라 그걸 하면 널 죽일지 말지 생각한다고 했지.”
조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싱긋 웃었다. 제가 이런 처우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지환은 이건 새 발의 피라고 생각했다. 그 손으로 민재에게 온갖 주사를 놓고 피부에 상처를 냈을 걸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다.
“만들었어. 완전히 사라지진 않지만 가이딩이 새는 걸 완화하는 건 가능할 거야. 이게 몸에도 좋아.”
조 박사는 샘플 주사액을 4개 꺼내 지환 앞에 내밀었다.
“시험해 볼래?”
조 박사가 물었다. 지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 박사의 앞에 손을 내밀고는 까딱였다.
“혈관용이야?”
“아니. 그냥 주사하면 되는데.”
조 박사는 순순히 대답하며 주사기를 지환에게 내밀었다. 이 새끼도 참 자신의 욕심을 못 버렸다. 제가 만든 작품-늘 스스로 그렇게 칭한다-을 실험하고 싶은 욕구를 못 이겨 굳이 지환을 불러낸 것이다. 자신이 민재에게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는 사이 도망이라도 쳤으면 오히려 좀 더 편하게 삶을 유지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행운을 자신이 망치는 놈이었다.
지환은 주사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조 박사의 멱살을 잡아챈 다음 그의 목 쪽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아악!”
조 박사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지환은 그대로 그를 압박한 뒤 주사액을 모두 밀어 넣었다.
“지금 비명을 지르면 안 되지. 여기 독약이라도 들었어?”
“일반인용이 아니라고!!”
조 박사는 시뻘게지는 눈으로 주사를 맞은 자신의 피부를 쥐어짰다. 주사액을 짜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식한 새끼. 지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일반인한테도 주사해서 문제가 있으면 안 되지. 내가 그렇게 만들라고 지시했어?”
“일반인한텐 어떤 증상이 생길지 모른단 말이야!”
조 박사가 소리를 빽 지르며 지환에게 달려들었다. 지환은 그대로 그의 뒷목을 잡아채 책상으로 처박았다. 금이 간 책상이 삐걱하고 기울었다.
“그럼 기록해. 무슨 증상이 생기는지. 내가 알아야 할 거 아냐.”
“아. 이 나쁜 새끼야!”
“기록 똑바로 안 하면 주사 한 번 더 놓고 내가 관찰할 거야. 알겠어?”
“썅!”
조 박사는 씩씩거리며 성을 냈으나 지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지환은 그를 놓아주었다. 조 박사는 조금 얌전해졌다. 동공이 떨리는 게 꽤 두려운 듯했다.
“두려울 짓을 왜 해. 그러니까.”
“진짜 독약 아니야. 근데 나한텐 어떨지 모르니까 그렇지.”
조 박사는 징징거리며 소독솜을 찾아 제 목을 벅벅 닦아댔다. 그러나 이미 들어간 주사액이었다. 지환은 팔짱을 끼고 그의 용태를 살피며 삼십 분 정도를 기다렸다. 조 박사는 힐끔힐끔 지환을 바라보았으나 뭐라 대들지는 못했다.
딱히 변화가 없는 거 같자 지환은 조 박사의 캐비닛에 놓인 깔끔한 종이를 꺼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그의 노트북을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노트북에 캠 있지? 그걸로 관찰일지 매일 작성해. 몸 상태 모두 기록하고 면상 꼬라지도 카메라로 꼬박꼬박 촬영해. 뭘 처먹었는지 변은 언제 봤는지도 기록해. 똑바로 안 하면 내가 하나하나 시키게 될 테니까.”
조 박사는 제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뒈질 거 같으면 연락해. 그때는 도와주러 올게.”
지환은 선심 쓰듯 말했다. 실제로 선심이 맞았다. 조 박사는 존재 자체가 노출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픈 경우가 있어도 병원에 가거나 센터 내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조 박사는 제 처지가 서러운지 벌게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바로 뒈지거나 하는 건 아닌가 보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지환은 팔을 대강 소독솜으로 문지른 다음 다른 주사기를 꺼내 실험 약물을 자신의 몸에 주사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약물을 민재의 몸에 바로 넣을 수는 없었다. 그의 몸에 들어가는 것 하나하나는 이제 지환의 확인을 거쳐야 했다.
문제가 있으면 선배가 또 불쌍해하겠지.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아프거나 하자가 생긴 지환을 두고 민재는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민재는 제 옆에 계속 있게 될 터였다.
“…민재 진짜 살아났어?”
조 박사가 옷소매를 바로 하는 지환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지환은 서늘한 얼굴로 조 박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두렵지 않아?”
지환이 물었다. 그러자 조 박사의 동공이 커졌다.
“민재 선배가 만약 진짜로 살아 있다면, 너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리가.”
“왜 확신해?”
조 박사는 지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지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지환이 되묻자 조 박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민재가 그럴 리 없지. 걘 나 못 죽일걸.”
그럴 리가 없다라. 그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쓰는 말이었다. 지환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작은 끈이 끊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받았다.
“역시.”
“뭐?”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지환의 살벌한 말에 조 박사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지환은 그런 그의 얼굴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똑바로 보고서 작성해. 실험체.”
지환은 조 박사의 어깨에 손을 얻고 토닥였다. 경고의 표시였다. 실험체라고 불린 조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실험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으니 자신의 몸이 실험체가 된 상황은 생각해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환은 남은 약물을 챙겨 지퍼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밀봉한 약물을 조 박사의 눈앞에 들어 보이며 물었다.
“실온 보관 가능해?”
“…어.”
“불가능하면 뒈질 줄 알아.”
“….”
지환은 싱긋 웃어 보였다. 조 박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다음 주에 너한테 한 번 더 주사할 거야.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검사를 할 거야. 네가 새로 만드는 약물과 성분이 동일한지 안 한지. 알겠어?”
새로 주사하겠다는 경고를 하자 조 박사가 억울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
“또 주사한다고?”
“실험을 한 번만 하는 멍청이도 있어?”
조 박사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지환에게 이것저것 주사하고, 그의 생체 표본을 채취하며 내내 지껄였던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환을 보고 조 박사는 말했다.
“확실히 해야지.”
그걸 선배 앞에서도 지껄였겠지. 이제는 지환이 조 박사에게 되돌려주는 말이었다. 조 박사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졌다. 지환은 민재와 다르단 걸 이제야 제대로 깨닫는 모양이었다. 그의 미래는 지금보다 비참해지기만 할 것이다. 죽는 게 차라리 나았다고 여기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물론 민재 선배는 이 일을 알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좋은 것만 알게 해야지. 그러나 지환의 애인은 또 세상을 구하려고 위험에 뛰어들려 할 것이다. 좀 덜 히어로다워도 되었을 텐데. 그러나 지환은 그런 그를 사랑했다.
지환은 민재를 생각하며 조 박사의 실험실을 벗어났다. 이젠 지환이 그를 지킬 것이다. 그것으로 지환은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