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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민재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서연은 센터장의 가이드였다.
“이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을게요.”
이런 정보를 민재가 사용하게 된다면 서연은 위험해질 확률이 높았다.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지?”
“네, 알아요.”
민재가 묻자 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문득 태현을 떠올렸다. 그는 제 누나가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는 걸 알고 있을까.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센터장의 능력은 세뇌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거 같아요.”
“능력이?”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뇌라. 민재의 머릿속에 순간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조 박사와 거래를 할 때 보았던 정신계 에스퍼에 관한 파일이었다.
조 박사도 김진성이 에스퍼라는 걸 알고 있나? 아니면 김진성이 관련해서 무언가 개발하라고 시켰나?
서연이 준 정보는 많은 걸 바꾸게 될 터였다. 본인도 에스퍼면서 여태 그런 삶을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에스퍼였기 때문인가. 민재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민재가 말했다. 정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으니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서연이 한 결심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실장님. 이건 진심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서연이 미소 지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서연은 자주 볼 수 있었으나 이런 얼굴을 한 서연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꽤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면이 있었지만 어쩐지 민재는 그녀처럼 상쾌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난 이제 실장 아닌데.”
“뭐. 옛 상사에 대한 예의라고 해두죠.”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서연이 그를 선배라고 부르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오늘 만난 건 당분간 비밀로 해 줘. 은정이한테도.”
“네. 알겠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서연이 말을 덧붙였다.
“움직이시게요?”
조금 애매하고 많은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다. 위치를 옮길 것이냐는 질문일 수도 있었고, 지금 접선을 마무리하겠냐는 질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가 직접 움직여 상황을 움직일 것이냐는 맥락으로 들렸다.
민재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삶이 언제나 그랬듯 사건의 중심에 억지로 놓이게 되었음에도 주춤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민재는 이대로 모든 일들을 뒤로하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지금 자취를 감춰버리면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민재는 쓰게 웃었다. 결국 그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야지.”
민재의 대답에 서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도 참 실장님이네요.”
그가 기억하는 모습을 한 서연이 말했다. 상사를 아무렇지 않게 평가하는 태도 또한 그녀다웠다.
***
민재는 숙소 현관에서 지환과 마주쳤다. 급하게 바깥으로 나서고 있었던 듯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그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지환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둘 사이를 휘감았다. 지환의 어깨가 들썩였다. 민재는 말없이 숙소 안쪽으로 지환의 어깨를 밀었다. 지환은 밀려나면서 민재의 팔을 잡아 당겼다. 민재는 뿌리치거나 저항하지 않고 같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갔다 왔어요.”
“너부터 말해.”
지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민재를 노려보더니 다시 한번 고집을 부렸다.
“누구 만나고 왔어요?”
“지금 상황 보고해.”
지환이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민재 또한 그랬다. 지환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민재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짜증 나… 냄새 나잖아요.”
무슨 냄새? 서연과는 바깥에서 만난 데다 딱히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어이없어하는 민재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지환이 작게 신음했다.
“선배.”
지환이 불렀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안겨주었다. 지환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선배 살아 있는 거 들켰어요. 선배가 음모를 꾸민대.”
지환은 드디어 사실을 말했다. 민재는 그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큰 안도감을 느꼈다.
“무슨 음모?”
“…선배가 에스퍼들을 일반인으로 못 만들게 해서 세계를 지배할 거래요. 재밌죠.”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들의 상상력은 정말 재미가 있었다. 정작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민재는 이렇게 숨어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넌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농담처럼 물어본 건데. 예상과 다른 답변에 민재는 당황했다. 얘가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가? 민재는 지환을 슬쩍 밀어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지환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민재를 끌어안아왔다.
“선배. 우리 그냥 도망쳐요.”
“뭐?”
바깥에는 천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알 게 뭐야.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치면 어때요? 선배 말대로 산장을 세우고 블루베리 스무디나 만들어 줄게요.”
“말이 되냐.”
“말 되죠. 내가 되게 할게요. 내가 나만 보게. 아무도 선배 못 해치게 할게.”
등을 옥죄는 힘이 강해졌다. 민재는 그제야 지환이 무섭다고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민재는 어쩐지 지환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기뻤고, 그래서 슬퍼졌다.
“넌 어쩌다가 이렇게 모지리가 된 거냐.”
그가 기억하는 지환은 상징적이 히어로인 자신보다 훨씬 히어로다운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진심인 사람. 언제나 옳은 방향을 좇는 사람. 올곧게 하나만 보며 달릴 줄 아는 사람.
“선배님이 안 보이면 불안해요.”
지환의 뜨거운 숨이 민재의 목을 간지럽혔다.
히어로인 그가 민재에게 도망치자고 한다. 다 필요 없으니까, 다 버릴 수 있으니까 당신만 구하면 된다고. 민재는 그를 구해줄 히어로를 결국 얻어낸 셈이었다.
“넌 정말 나한테서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민재가 말하자 지환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의미예요?”
질문하는 지환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불안한 모양이었다. 민재는 이렇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지환이 달가웠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동공을 보는 일도 퍽 애틋했다.
민재는 지금 이 순간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순간 어쩌면 지환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 그의 선배이자 특별한 사람으로 조금만 더 있고 싶다고.
그러나 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걸 민재는 알았다. 민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광고를 내보낸 사람은 아마도 나랑 아는 사이야.”
조금 다른 맥락에 지환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정확히는 날 실험했던 연구원들 중 하나지. 하루는 너무 아팠어. 화가 났던 거 같기도 해.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너희도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얼마나 아팠어요?”
지환이 민재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도 이해하고 있는 바일 터였다. 아닌가. 내가 너무 나약해서 그랬나. 민재는 눈을 살짝 감았다.
“많이. 그냥 죽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눈앞이 하얘졌어. 한동안은 불길이 계속되었고, 거기 있던 연구원들 중 대다수가 죽었다는 걸 눈을 뜨고 나서야 알았어.”
“….”
민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지환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살아남은 자들 중 몇은 센터장이 처리했을 테지만. 몇은 정신을 잃은 내가 죽였겠지. 그리고 살아남은 단 한 명의 남자가 지금 뉴비전인큐베이터를 만들고 있어.”
“그러니까 선배가 위험하다는 거잖아요.”
지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민재는 눈을 떴다. 지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나를 향한 원망일까? 혹은 공포일까?
“나는 네가 생각하는 히어로 같은 게 아니야.”
민재가 말하자 지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그 소리예요? 히어로 같은 것 따위 아무래도 좋은 지 오래되었어. 내가 지키고 싶었던 한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건 무슨 히어로야?”
지환은 일그러진 얼굴로 민재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지킬 수 있게 해줘요.”
그는 애원하듯 말했다. 민재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지환의 손을 잡았다.
“지환아. 나는 도망 못 쳐.”
“왜! 선배 책임 아니잖아. 오래전부터 원했던 거잖아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여기 남아야 해요. 알죠?”
지환이 협박하듯 물었다. 언제나 여기 머물라고 조르던 지환과 순식간에 입장이 바뀐 것이 묘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과거에 내가 있으니까.”
거창한 영웅심리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걸 뒤로하고 정말 죽은 것처럼 살게 되면 지금까지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지환도 있었다. 정말로 도망치고 나면 지환을 똑바로 볼 수 있을까? 민재는 그게 두려웠다.
“내가, 내 과거가 너에게 실망이겠지만….”
“그만.”
지환은 민재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민재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러나 민재는 다음 말을 내뱉었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도 말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네가 괜찮다고 하면….”
“….”
“각인하자.”
민재가 말했다. 지환의 흔들리던 동공이 딱 멈추었다. 그리고는 크기를 점차 키웠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반짝거렸다.
“…진짜요?”
민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한 번만 더 말해줘요.”
지환이 말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며 투정을 부리기에 거부했으나 지환은 폭탄에 맞은 뒤로 귀가 아프다는 둥 헛소리를 하며 민재를 협박했다.
“아. 하자고. 각인!”
결국 민재는 다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눈을 감은 채로 곧바로 입을 맞춰오는 지환은 아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