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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을 내보낸 뒤 민재는 그가 빼두었던 텔레비전 선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로비에 있는 거대한 화면일 테지만, 그곳에는 지환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환은 연결된 선을 모조리 뽑아버린 다음 선을 숨겨두었다. 그러고 민재의 곁을 최대한 지키면서 그가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수단들을 모두 없애고 싶어 했다.
민재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르게 선들을 찾아냈다. 개어진 옷가지들 사이에 틈틈이 꿍쳐둔 게 보였다. 민재는 어떻게든 못 찾게 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지환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덩치에 안 맞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색깔이나 어댑터의 모양새를 살피며 민재는 선을 이리저리 연결해 보았다. 한동안 낑낑댄 후에야 민재는 텔레비전을 켤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공간에 신호가 잡힐 것인가의 문제였다. 죽은 사람의 공간에 외부 방송 신호가 잡히게 해 두었을까?
그래도 민재는 이 숙소 건물 대부분의 공간이 광역 케이블을 함께 쓰고 있으므로 방 한 칸씩 제어하진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기대었다. 케이블 선을 연결하고 텔레비전을 다시 껐다 켜자 몇 군데의 채널이 시청 가능한 것 같았다. 리모컨을 찾을 여유는 없었으므로 민재는 터치로 채널과 음량을 조절했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고, 다른 곳에선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드라마는 모르는 것이었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민재가 본 적이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민재는 뉴스 채널이 필요했다. 몇 번 더 채널을 변경한 끝에 민재는 드디어 앵커가 앉아 있는 화면을 찾아냈다.
어젯밤 일어났던 살인 사건이 에스퍼의 짓인지 일반인의 짓인지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 보도가 한동안 흘러나왔다. 이건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지속되고 있는 문제였다. 몇몇은 부러 초능력자가 살해한 것 같은 범죄 환경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면 이슈화가 되고, 사건 해결을 질질 끄니까. 한마디로 범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법이었다.
변하는 것들도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민재는 입 안이 쓰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뉴스를 시청했다. 문 바깥의 기척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히어로센터 관련한 뉴스입니다.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음모론 중 하나가 금일 오전 큰 파장을 일으켜 네티즌들을 동요하게 했습니다.]
음모론이라. 민재는 앵커의 얼굴 옆으로 화면이 뜨는 것을 보았다.
[당신들은 속고 있다. 우리는 모두 정상인으로 살 수 있다.]
자막이 뜨며 이상한 애니메이션 화면이 떴다. 캡슐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난 후 더 이상 폭주를 겪지 않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히어로 센터의 수장인 김진성과 우민재는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나 국민들을 기만하고, 그들의 눈을 속여 이득과 특권을 취하고 있다는 자막이 나왔다.
[우민재는 살아 있다.]
음성이 변조된 목소리는 기괴했다. 낮고 음산한 목소리는 제대로 된 증거도 없으면서 헛소리를 거창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나 헛웃음을 지으며 보고 있던 민재는 순간 굳어 버렸다.
새희망복지회를 탈출할 당시 지환에게 안긴 채 빛을 뿜으며 능력을 사용하는 자신의 영상이 나온 것이다. 대략 3초 정도의 짧은 영상이었으나 확대해 보거나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얼굴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길이였다.
[조작 영상이거나 과거 센터 소속 에스퍼인 우민재가 활동하던 영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센터장은 아직 묵묵부답인 상황입니다.]
저건 변명해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놔두면 저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민재는 이제 왜 호영이 그렇게 난리를 피우며 숙소 문을 두드렸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될까? 센터는 어떻게 반응할까. 한동안 민재는 계속해서 뉴스 채널을 바라보며 속보나 다른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후로는 계속해서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세상에는 한 가지 사건만 발생하진 않는 법이다. 민재는 텔레비전을 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광고가 꽤 크게 여러 군데 걸린 모양이었다. 이건 단순 음모론 조작이 아니라 테러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영상의 출처가 어디인지 너무 빤하니 의도 또한 짐작이 갔다.
잭이라는 놈이 민재가 좀처럼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저걸 확인한 지환은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민재는 천천히 불안에 잠식되고 있었다.
***
컴컴한 새벽이 되고, 민재는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짙은 푸른색은 촌스러운 데다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지만 이 안에서만큼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역시 모자와 마스크를 꺼냈다.
민재는 서연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갔는데 없으면 우석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것만큼은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은 수였으나 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머뭇거리듯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민재는 기척을 죽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서연에게 인사를 건네자 서연은 작은 소리로 헉하고 놀라더니 잠시 주저앉았다. 민재는 너무 귀신처럼 굴었나 싶어 미안해졌다.
“나인 거 예상하지 않았어?”
“예상은 했죠….”
민재가 손을 내밀자 서연이 그것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가이딩은 괜찮으세요?”
“어.”
본업이 가이드인 만큼 서연은 곧바로 가이딩을 챙겼다. 누구 덕분에 가이딩은 늘 차고 넘쳤다. 그 말을 생략한 민재는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연은 민재와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진짜… 진짜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서연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민재는 조금 당황했다. 늘 어딘가 모르게 어려운 구석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고 자신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아왔던지라 더 그랬다. 민재가 잠들어 있던 사이 변한 것들 중 서연도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서연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민재는 조용해진 서연에게 물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태현이 내 이야기 안 했어?”
“태현이 만났어요?”
서연이 빠르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꽤나 다급한 태세였다. 뭐야. 그럼 제 누나한테 상황 이야길 하나도 안 한 건가? 민재는 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정보를 챙기고 득을 보려고 한 것인데 이러면 괜히 중요한 사실만 확인시켜준 꼴이 되었다. 민재는 낭패라는 생각을 했다. 몸을 뒤로 빼려는 민재를 서연이 다급히 붙잡았다.
“태현이 어디 있어요?”
“그건 나도 몰라.”
“…저를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민재의 대답에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았던 서연이 잠시 뒤 질문을 했다. 정확한 맥락을 짚은 말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민재는 꽤 솔직한 대답을 하기로 했다.
“내가 네 동생이랑 거래하기로 한 게 있어서 말이야. 너한테 정보를 좀 얻으려고 왔지.”
“…어떤 거래요?”
“정보 줄 수 있어?”
민재는 태현이 그의 누나를 구해주는 것으로 무엇을 걸었는지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서연과 태현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애초에 새희망복지회에 진심으로 동조했다면 민재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서연을 진심으로 다 믿을 수도 없었다. 민재는 지금 쥐고 있는 패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 마저 놓으면 손해였다.
“…줄게요. 어떤 게 궁금하세요?”
의외로 서연은 순순히 답했다.
“오늘 났다는 기사.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민재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저도 최근엔 정보력에서 조금 밀리고 있는데… 아마 예상하시는 쪽에서 준비한 게 맞을 거예요.”
새희망복지회 쪽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민재는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도 잭을 알아?”
“네. 근데 만난 적은 별로 없고요.”
“그 사람 이야기도 알아?”
잭이 어떻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 기이한 이름을 붙인 장치를 개발해대고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말은 민재가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그 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전 에스퍼 발현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었어요. 엄마랑 동생을요. 폭발 여파였고 저만 살아남았죠.”
서연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김진성은 센터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엄마와 동생의 죽음을 덮었어요.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때 절 거둔 사람이 신경준이었어요.”
예상하지 못한 사연이었다. 민재는 뭐라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 가만히 서연을 바라보았다.
“장례를 치러준 사람도 그 사람이고… 그래서 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면 언젠가 김진성에게 복수도 하고 내가 원하는 세상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
“전 모든 에스퍼가 싫었거든요. 시한폭탄을 위해 내 몸에 있는 뭔가를 계속 줘야 한다는 것도 싫었어요.”
민재가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한폭탄이라니. 많이 들어 본 소리지만 그래도 알고 지내던 동료에게 들으니 좀 더 아팠다.
“실장님이 조금만 덜 좋은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서연이 헛헛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서연은 무언가 후련한 듯 작게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김진성은 하급 에스퍼예요. 정신계열이죠.”
“…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사실일까? 순간적으로 의심하는 민재에게 서연은 덧붙였다.
“이 사실을 아는 건 이제 저랑 실장님밖에 없어요. 김진성 본인까지 포함하면 셋이네요.”
“…어떻게 알았어?”
“제가 김진성을 주기적으로 가이딩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