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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서늘한 기색을 풍기면서도 민재에게서 몸을 떼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민재에게는 퍽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하는데?”
민재가 묻자 지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요.”
그 말은 옳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 중 민재가 신경 쓰지 않을 일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어디까지 알아요?”
민재가 질문하자 도리어 지환이 되물었다.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라고 말하던 태현이 떠올랐고, 민재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아랫입술을 물어뜯자 지환이 손가락으로 민재의 입술을 내밀어 벌어지게 했다.
“나 말고 네가 아는 걸 말하라고.”
민재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지환은 잠시 민재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건 선배가 지금 안전하지 않다는 거예요. 선배가 사라진 지 일 년이나 지났고, 기적처럼 내 눈앞에 있는 게 믿기지 않고.”
민재의 눈가와 귀가 어루만져졌다. 정말로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인 양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우리 꽤 같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근데 선배 진짜 갑자기 사라졌잖아. 이러고 있다가.”
“….”
“선배 잘못 아닌 거 알아요. 탓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지환은 계속해서 민재를 만졌다. 얼굴과 목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간지러움을 느낀 민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직 내가 정확히 아는 건 선배가 겨우 내 곁에 왔다는 거고, 나는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를 위험하게 만드는 건 모두 제거할 거예요.”
지환이 말해준 건 정보가 아니라 맹약에 가까웠다. 민재는 약간의 들뜸과 동시에 기분이 상했다. 지환은 민재에게 그가 여태 느껴보지 못한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그와 반대로 이렇게 앗아가는 것이 있었다. 민재는 최근 자신의 삶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들에 휩싸이고 있었다. 끝과 끝을 오가는 기분들이 괴로웠다.
결국 지환은 민재를 지키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으나 그를 온전히 다 믿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믿고 있다면 그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말해주었으리라.
민재는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지환이 끌어안듯 민재가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언가 착각한 듯 지환은 민재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가 이러면 내가 더 움직일 수밖에 없어. 알지?”
“왜?”
지환은 불만스럽게 되물었다. 이따금 툭툭 튀어나오는 반말이었다.
“선배야말로 나한테 숨기는 게 있잖아요.”
민재는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민재와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조 박사의 실험실을 찾았고, 완전해졌다고 했다.
이제 제1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센터장과도 교류하는 듯했고, 실장직에 오른 호영에게도 자주 필수인원으로 여겨지는 걸로 보였다. 옆에서 생활하다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럴 때마다 민재의 머릿속에는 작은 불안이 싹텄다. 지환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지환은 과거 민재를 동경해왔다고 말하며, 그를 영웅이라 칭했다. 그러나 민재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지환이 쏟아붓는 애정이 달갑게 느껴질수록 민재는 두려워졌다. 그는 나의 어떤 면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무너지는 건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숭고한 히어로?
민재는 눈을 뜨고 태현과 마주한 순간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칠 생각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민재가 기억하는 지환은 아이들을 재빨리 구조하지 않는 것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의협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지환이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민재는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난 숨기는 거 없어. 네가 숨기지.”
민재의 말에 지환의 눈빛이 삐딱해졌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우리 서로 양보 안 하는 거죠.”
지환이 말했다. 뭘 어쩔 수 없다는 건지 알 수는 없으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지환이 말한 말의 의미를 민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지환은 지독한 스토커인 양 민재를 따라붙었다. 민재가 스스로 내 능력이 사실은 순간이동이었나? 하는 착각을 할 정도의 집요함이었다. 방이 여러 개 있지도 않은 뻥 뚫린 공간 안에서도 민재에게서 시선과 몸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첫날에는 잠을 자지도 않았다. 민재가 졸다가 눈을 떠보면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자요.”
지환은 민재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작 자야 할 사람은 지환이었으나 민재는 그의 토닥임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고립된 채로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쿵쿵 벽을 울리는 소리에 민재는 눈을 떴다. 지환은 민재가 눈을 뜬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현관 쪽을 째려보았다.
“좀 더 자요. 아직 시간 일러요.”
“누구 온 거 아냐?”
민재의 목소리가 작게 갈라졌다. 지환은 민재의 목 쪽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듯이 하고 어루만졌다.
“신경 쓰지 마요.”
“야. 이 개새끼야! 안 나와? 너 진짜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쾅. 하고 문이 울렸다.
“씨….”
지환이 나지막하게 욕을 읊조렸다. 민재는 지환이 욕을 하는 건 거의 본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고민했다.
“무슨 일이야?”
민재가 묻자 지환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들어 침대 안쪽으로 옮겼다.
“잠시만요. 절대 나오면 안돼요.”
“알겠어.”
“진짜예요. 선배.”
민재도 이렇게 대놓고 누군가에게 존재를 들켜서 일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지환은 민재가 그런 극단적 수라도 쓸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민재를 돌아본 지환은 현관을 열었다.
“뭐.”
지환의 말은 짧았다. 그리고 상대의 말은 길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뭐하자는 건데?! 지금 상황 보고 받았어, 안 받았어? 그따위로 할 거면 팀장직은 왜 달았어?”
“실장 자리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입 조심해. 애초에 알아서 하면 되는 건데 능력이 딸리는 거 아냐?”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호영인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꽤 살벌했다. 민재는 저렇게 악을 쓰면서 욕지거리를 해대는 호영도 처음 보았다. 민재는 호영이 언급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지금 광고가 여기저기 떴어. 통제가 안 된다고. 네가 센터 간판이니까 움직이라고 내가 명령했지. 근데 명령 불복종 한 건 너잖아. 센터장님한테 네가 직접 가서 설명해.”
“뭘 설명해.”
“네가 이미 죽은 사람한테 미쳐서 지랄하고 있느라 센터 일 내팽개쳤다고!”
쾅! 호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바깥쪽을 힐끔 보았다. 지환의 다리가 들렸다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그 사이로 균열이 간 복도 벽이 보였다. 미친놈. 민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 입. 조심하랬지.”
지환의 목소리는 낮고 어두웠다. 뒷모습만 봐도 열 받은 게 보였다. 사실 호영이 한 말 중에 틀린 것은 없었다.
바깥에서 보면, 민재는 죽었고 그렇게 된 지 일 년이나 지났다. 그런데 그의 페어이자 후배였던 지환은 추모식에서 다친 이후로 죽은 사람의 숙소에 틀어박혀 움직이질 않는 상황이지 않나. 다른 동료들에겐 충분히 답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너나 조심해. 씨발. 아직 실장은 나야. 당장 나와서 카메라 앞에 얼굴 들이밀고 인터뷰해. 명령이야. 알겠어?”
인터뷰를 해야 하고 광고가 여기저기 나돌아 다닌다니. 민재는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었다. 민재가 몸을 두르고 있는 이불을 슬쩍 내리자 지환이 보이지 않게 손을 뒤로 뻗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귀신 같은 새끼.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민재는 고개를 살짝 움직여 바깥을 좀 더 살피려고 했다. 어차피 지환이 막고 서 있는 데다 호영은 흥분한 상태니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로비로 나갈 테니까. 지금 내 앞에서 꺼져.”
“야!”
“나 더 안 참아.”
지환이 이를 악물고 무어라 말하자 호영은 큰 소리로 욕을 내뱉더니 복도를 걸어 나가는 것 같았다. 지환은 바깥을 계속 확인하는 듯하더니 문을 닫고는 뒤를 돌았다.
“안 나온다며.”
지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입을 삐죽 내밀고는 상당히 심통이 났다는 듯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어이가 없었다.
“안 나갔잖아. 인마.”
“고개 빼꼼하는 거 다 봤어요.”
“뭘 봐. 뒤통수에 눈 달렸어?”
“네. 달렸어요.”
지환은 다시 민재에게 와서는 그를 껴안고 몸을 뉘였다. 민재는 그런 그를 슬쩍 밀어냈다.
“나가봐야 한다며. 광고는 뭐야.”
민재가 정보를 묻자 지환이 또다시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도 잘 몰라요. 뭔 일 났나 보지.”
이 새끼가. 민재는 지환 몰래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럼 갔다 와서 보고해. 뭔 일인지.”
“아. 안 가도 될 거 같은데.”
방금 그 꼴을 보고도 퍽이나 안 가도 되겠다. 민재는 지환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난 내가 돌려받을 자리에 흠집 나는 거 싫다. 가서 해결하고 와.”
“아.”
인터뷰 운운했던 걸 보면 센터장이 노발대발할 정도로 센터의 이미지에 타격이 있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F등급 관련해서 뭔가 찌라시가 터졌나? 민재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추리를 하고는 지환을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 너무 아파서 못 나갈 거 같아요.”
지환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을 다 부렸다. 그 뒤로는 민재한테 옷을 골라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민재는 결국 이를 악물고는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민재는 자신이 주로 밖에서 인터뷰를 할 때 입었던 하얀 제복을 지환 쪽으로 대보았다. 조금 작을 것 같기도 했다.
“이거 입을래? 좀 작으려나?”
민재가 묻자 지환이 민재의 손을 잡아 슬쩍 내렸다.
“그건 안 입어요.”
꽤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게 하얀색이라 좀 촌스럽나? 진지한 지환의 표정에 민재는 다시 제복을 넣어두고는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셔츠랑 재킷 같은 걸 뒤져보았다.
“좋다.”
지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실실 웃으면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고는 최대한 정장처럼 보이는 옷을 찾아 지환의 머리통으로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