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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공주님처럼 지환에게 들려 있었다. 민재는 그게 못내 민망했기 때문에 몸을 비틀었다.
“걸어갈 수 있어.”
“왜요. 또 우민재 살아남아서 활보 중이라고 광고하고 싶어요?”
지환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는 민재를 안아 든 채로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였다. 어두워진 복도에서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보였다.
“시뮬레이터 틀어서 광고하는 건 괜찮고? 이미 소리고 빛이고 다 나갔을 거 아냐. 저런 건 왜 보고 있는 거야.”
민재는 사실을 짚어 지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지환이 민재의 몸을 옥죄는 힘이 조금 더해졌다.
“선배.”
지환은 공중에 멈춰 서서 민재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그를 불렀다.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 민재는 침묵했다.
“저 나갈 때마다 몰래 cctv실에 가요. 어차피 화질도 구린 데다 문제가 많긴 하지만 센터 내 cctv영상 다 뒤져서 선배로 추정되는 사람 있는 파일 있는지 보고 지워요.”
민재는 경악했다. 아니 그게 더 티 나지 않나?
더군다나 그렇게 영상을 자꾸 열람하고 삭제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민재는 지환의 말에 많은 의문점이 생겼다.
“너 안 혼나?”
민재가 묻자 지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나를 혼내요. 1팀 팀장인데.”
그 자리가 그렇게 막무가내여도 되나. 민재가 있었을 땐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민재는 지환의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
“선배 기억나요? 추운 겨울날에 발현하는 에스퍼 보고 그랬잖아요. 운이 나쁘다고.”
지환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민재는 그가 하는 말의 맥락을 따라잡기 위해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그러자 지환이 도로의 위치와 상황들, 해당 에스퍼의 증세에 대해 설명해줬다. 민재는 이내 곧 자신이 사진을 촬영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날 구했던 발현 에스퍼를 떠올렸다.
“아.”
민재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자 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나예요.”
“너라고?”
놀랍다는 듯 민재가 말하자 지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왜인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지환을 구해서 센터에 안전하게 오게 되었고, 여태 있었던 많은 일들의 원흉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누군지 되게 궁금했는데. 나중에는 의미가 궁금하더라고요. 왜 나한테 운이 없다고 그랬지? 죽어가는 나를 살려주면서.”
“….”
그때는 그런 기분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에스퍼로 지내게 된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죽을 용기는 없었던 것 같았다.
“선배 없어지고 저 시뮬레이터 내가 만들었어요. 저걸 계속 보고, 또 보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뭘 하면 선배를 구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선배의 그 말을 이해할 것도 같은데….”
지환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복도를 웅웅 울렸다. 민재는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부끄러운 걸 들킨 기분이었다. 지환이 너무 딱 붙어서 얼굴을 자꾸 비벼대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민재가 몸을 비틀자 지환이 그의 다리 사이를 좀 더 단단히 받쳐 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민재는 당황했다. 몸을 어디로 움직이든 요상해질 것 같았다.
“야… 이거 좀….”
민재가 자세에 대해 불평을 하려고 하자 지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꽤 빠른 속도로 비행해 민재의 숙소 창문으로 도착했다. 지환은 창문을 열고는 민재를 안고 안으로 몸을 휙 날렸다.
둘은 점프하듯 침대 위로 안착했다. 버둥거리는 민재의 다리를 잡아 든 지환은 그의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것도 벗어 현관 쪽으로 휙 집어던졌다.
“뭐하는 거야.”
지환은 민재의 말은 무시한 채 그의 위로 몸을 겹쳤다. 샌드위치처럼 납작하게 겹쳐진 몸을 하고 지환이 속삭였다.
“각인해요. 선배.”
“뭐? 너 안 비켜?”
“각인하면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줄게요.”
민재는 지환의 말에 울컥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거기다 각인을 가지고 거래하듯 하는 지환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어.”
민재의 단호한 대답에 지환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
각인을 하게 되면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묶인다. 물론 좀 더 안정적 가이딩과 감정적 충족 등을 얻을 수 있지만 각인은 한 번 하면 풀 수가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경우에도 추이를 두고 살피다 각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각인한 에스퍼와 가이드의 케이스가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민재는 불안했다. 자신의 몸은 불안정하다. 요새는 지환과 지내면서 안정적인 것처럼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가이딩이 바닥까지 떨어질지 알 수 없는 몸이었다.
더군다나 지환은 단순 가이드가 아니었다. 에스퍼이자 가이드였다. 굳이 손익을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각인에서 손해를 보는 건 에스퍼라고 민재는 늘 생각해왔다. 위급한 순간에도 한 사람의 가이딩에 의지해야 하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로맨틱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민재의 경우 불안정한 자신의 몸에 누군가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해지게끔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각인을 하면 서로 정신적으로도 얽히는 게 있다고 전해졌다. 그러므로 에스퍼가 폭주를 일으키는 경우 가이드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못해 같이 사망하는 경우가 확률적으로 많았다.
극소수의 혼자 살아남은 가이드들의 생 또한 편하지 않았다. 대부분 정신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거나 몇 년 내로 자살을 택했다.
실장으로서 각인을 원하는 페어들이 있을 경우 민재가 주관해서 상황을 판단하고 승인 여부를 결정지어야 했기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이었다. 민재도 꽤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으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신은 절대 각인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재를 가이딩 할 수 있는 인원도 얼마 없었다. 그래서 우석과 우정으로 뭉친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각인이라니.
지환은 원래부터 순진하고 낭만적인 성향이 있었다. 애초에 그를 이해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실험에 뛰어들었다는 것 자체도 미친 짓이 아닌가. 그가 멀티가 되어서 천만다행이지 민재처럼 제 역할을 못하는 에스퍼가 되거나 죽기라도 했으면….
결국 지환은 다른 의미로 민재와 같은 몸이 되었다. 그러니까 전례가 없는 몸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런 경우에는 모든 경우의 수를 살얼음판을 디디듯 조심스럽게 따져보아야 하는 법이었다.
“왜요?”
생각에 잠긴 민재의 볼을 깨물며 지환이 물었다. 상당히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민재는 지환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조금 뒤로 밀어냈다.
“넌 진짜 나랑 각인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안 될 건 뭔데요.”
지환은 민재가 황당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민재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지환과 대화를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늘 지환 쪽인데 반응은 반대로 나온단 말인가.
“아무래도….”
“혹시 따로 고려해둔 상대라도 있어요?”
질문의 방향이 또 엉뚱한 데로 튀었다. 민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두더지?”
두더지? 민재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말한 대상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민재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지환도 인상을 찌푸렸다.
“왜 대답이 느려요? 설마 진짜? 그 새끼가 가이드 맞죠?”
“아니 네가 너무 황당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
“그 새낀 등급이 어떻게 되는데요.”
유치한 질문이었다. 아니 지금 계급장 들고 싸우자는 건가.
“도망자들인데 등급을 어떻게 알아.”
“아아. 측정을 안 해 봐도 마음에 들었어요?”
지환은 삐진 거처럼 이를 악물더니 민재의 어깨와 목 근방을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턱에 힘이 들어갔는지 꽤 아팠다. 민재는 어깨를 움츠렸다. 뜨거운 손가락이 민재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아. 진짜. 좀…!”
민재는 지환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지환은 밀려나지 않았다.
“그럼 오늘 비교해보면 되겠네.”
지환은 민재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배와 가슴 쪽을 쓰다듬으며 가이딩을 짙게 밀어 넣었다. 민재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하지… 마. 그만해.”
어차피 민재의 가이딩 수치는 안정권이었다. 그런데도 지환은 굳이 가이딩을 밀어 넣고 있었다. 민재는 또다시 지환의 손목에서 경고음이 들려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몸에서 빛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이거 봐요. 선배 나랑 각인해야 된다니까.”
“야. 그만…!”
지환은 민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눈에도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듯한 감각이 민재의 얼굴 곳곳에 맞닿았다 떨어졌다.
“각인하자고 한 거 농담도 아니고 쉽게 한 것도 아니에요.”
지환이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아.”
“뭐가 문제예요, 그럼.”
뭐가 문제냐고? 문제는 너무 많았다. 민재는 늘 그랬듯 너무 올곧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지환의 눈을 바라보았다.
민재는 손을 뻗어 지환의 볼을 슬쩍 쓰다듬었다. 어둠에 젖어든 다갈색 눈동자 옆도 쓸어 보았다. 지환은 가만히 눈을 감고 민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아주 잠시. 민재는 지금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음료 배달을 하던 산에서 꾸던 꿈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민재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당분간 덮어두기로 했다.
지환도 그러한 모양이었지만 민재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민재는 두더지와 토끼와 악어가 있는 곳에서 그러했듯이, 자신에 대해 샅샅이 알게 된 지환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렵기도 했다.
민재는 지환의 볼을 꼬집어 살짝 잡아당겼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억울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난 거짓말쟁이랑은 각인 안 해.”
“내가 언제.”
지환은 정말 거짓말을 잘했다. 이전에는 사소한 것도 거짓말 칠 줄 모르더니. 아무래도 내가 잘못 가르쳤어. 민재는 자조했다.
“실장 자리 다시 준다 해놓고 F등급 돼서 돌아오는 에스퍼 있는 건 보고를 안 해?”
민재가 말하자 지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지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국 나갔다 왔네요?”
오늘로 두 번째 시작되는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