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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42)화 (14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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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지환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환은 그러지 않았다. 지환은 민재를 안아 올렸다. 얼떨결에 공중에 몸이 뜬 민재는 지환에게 매달려야 했다.

“그러게요. 선배 실장 자리 되찾아야 하는데.”

“아니 지금 네가 갖고 있는 팀장으로도 충분해.”

민재는 높은 직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때 방해받을 요소만 덜어지면 족했다. 

지환은 무얼 잘못 알아들은 건지 민재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었다. 민재는 고개를 이리저리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뽀뽀 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지환이 민재의 양팔까지 옥죄고 있기 때문이었다.

“야!”

쪽. 

민재가 소리치자 지환은 그의 입을 입으로 막았다. 

“원래 내 팀이잖아.”

민재가 항의했다.

“그쵸. 선배 팀 맞아요. 그러니까 내가 선배 말이라면 끔벅 죽잖아요.”

“개소리야. 너 나한테 보고도 안 하잖아.”

“아. 그러니까 지금 원래 하던 팀장 노릇 못하니까 삐진 거예요?”

민재는 경악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삐지다니. 지환은 민재를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어린애 취급을 하고 있었다. 

“아님 내가 너무 늦게 와서 짜증 났어요?”

지환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고 있었다. 민재는 계속해서 입을 맞추려는 지환의 머리에 이마를 콩 박았다. 민재의 이마가 얼얼하니 지환의 것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

지환이 나지막하게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민재는 지환을 째려보았다. 그러나 지환은 그런 민재를 보고도 계속 실실 웃기만 했다.

“진짜 귀엽네.”

이 새끼 뭐라는 거냐. 민재는 지환의 반응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로 머리통을 쥐어박는 게 귀엽다니. 좀 이상한 취향이었다.

“지금 같아선 실장 자리도 확 뺏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지환이 중얼거렸다. 그게 네가 준다 하면 내 것이 되는 거냐. 민재는 지환의 발언이 기가 막혔다.

“네가 원하면 줄 수 있는 거야? 그게?”

“어차피 선배 거였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그럼.”

지환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정말로 순조롭게 민재에게 실장 자리를 되돌려줄 것 같았다. 민재는 그런 지환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슨 일 있었어?”

민재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물었다. 이쯤 되면 지환이 솔직하게 현재 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환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최근에 내가 너무 안에만 있어서 일이 밀렸다고 잔소리 들었어요.”

“호영이가 그래?”

“네. 너무하죠.”

지환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자신의 억울함을 어필했다. 민재는 지환의 말이 십 퍼센트 정도는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F등급이 되어 돌아오는 에스퍼가 있다는 건, 능력을 상실한 에스퍼가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진 언론에 공개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진성은 앞으로도 그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애를 쓸 터였다.

호영이 조 박사의 공간까지 들어갈 만큼 센터장의 신뢰를 샀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우선 책임을 지는 자리인 실장을 들들 볶으리라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민재는 실장일 적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늘 전화기를 꺼두곤 했다. 호출을 받기 싫어서였다. 그런 경우 대신 들볶인 우석이 민재를 찾아오곤 했지만, 지금 실장인 호영은 우석에게 일을 미룰 수 없을 테니 답답할 법도 했다.

센터장은 어째서 주호영을 실장 자리에 앉혔을까?

문득 다시 작은 의문이 민재의 머릿속을 스쳤다. 더러운 비밀을 많이 안고 있는 그가 민재를 대신할 존재로 주호영을 고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호영이….”

주호영이 센터장과 가까워 보이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지환은 뜬금없이 민재의 턱을 깨물었다.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요?”

“누구.”

“주호영 에스퍼요.”

“뭘 다정하게 불러. 그냥 이름 부른 건데.”

“아. 하지 마요.”

지환은 정말로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민재는 억울했다. 정작 지환은 은정을 누나라고 부르며 일 년 사이 변해 버린 친분을 과시하고 있지 않나. 

“야. 넌 은정이한테 선배라고도 안 하고 누나라고 부르면서 내가 내 후배 이름도 못 불러?”

민재가 따지고 들자 지환의 표정이 멍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지점이 짚어진 모양이었다.

“지금 그거 질투죠.”

의문형도 아니고 단정 짓듯 묻는 말투였다. 질투라고? 뇌 구조가 어떻게 되면 그런 해석을 하는 거야? 민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는 거야.”

“선배 지금 얼굴 빨개요.”

그럴 리가 없었다. 거울로 확인하겠다고 하는 민재를 지환은 부둥켜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

민재는 결국 또 밤을 기다렸다. 바로 지환에게 따지고 들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환에게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것이 왜인지 망설여졌다.

“민재야….”

지환이 웅얼거리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하극상으로 호칭을 내다버린 지환의 목소리는 퍽 불쌍하게 젖어 있었다. 그의 꿈속에서 민재는 매번 다치거나, 사라지거나, 죽는 모양이었다.

가끔은 그의 눈가가 젖어들 때도 있었다. 민재는 지환의 젖은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훑었다. 그러면 지환의 꿈도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그의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변화하길 기다리던 민재는 몸을 일으켰다. 

우선 민재에게는 가십거리가 필요했다. 센터를 돌아다니고 있는 소문들은 대부분이 거짓에 가까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는 법이다.

민재의 상태를 숨기기 위해 가이딩을 우석에게만 받다 보니 오래된 연인이라고 소문이 난 것과 같은 원리였다. 민재는 얼굴을 가리고는 먼저 은정의 숙소 근처로 향했다. 

우연이라도 가는 길에 서연과 마주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서연이 은정과 붙어 다닌다는 것과 별개로 태현과 접촉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더불어 그녀가 좀 더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인지 만나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민재는 태현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폰을 언제쯤 개시해야 할지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쉽게도 은정의 숙소는 불이 꺼져 있었고, 근방은 조용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은정이 사는 숙소 층과 그 위층에 배치되는 걸 에스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은정이 소음에 민감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위층 에스퍼들은 까치발로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재는 은정을 거의 탑 층에 배치했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묘했다.

서연과의 접촉은 다음을 기약하며 가이딩실 주변으로 향했다. 오늘 별일이 있었으니 웅성거리는 무리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우석이 당직인 날은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다 가이딩실 안에는 당직인 가이드들을 제외하고 에스퍼들이 별로 보이지도 않았다. 오늘 밤은 조용히 지나가는 날인 모양이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 회의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밤까지 회의하는 팀들은 잘 없었고, 문단속을 잘 못하는 애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다. 민재는 회의실들의 문들을 열어보다가 한 군데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회의실에 구비된 종이와 펜을 찾아 들었다. 민재는 형체만 간신히 보이는 책상과 의자들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이곳에서 팀원들을 모아두고 머리를 싸매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한 번도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나 이렇게 보니 조금 섭섭한 것도 같았다. 민재가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거나 원할 때 그걸 뒷받침해 줄 팀원이 없다는 것도 적잖이 허전했다. 

어쩌면 그가 날 때부터 무언가를 대표하고, 출동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팀장 자리를 맡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에 너무 길들여져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민재는 지금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회의실에서 홀가분함이나 후련함과는 거리가 먼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묵직하고 눅눅한 감정이었다. 물에 젖은 솜이불에 깔린 것처럼 답답했다. 

민재는 뒤를 돌아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서연의 개인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원래 가이드들은 보통 급하게 출동하는 경우가 잘 없어서 사물함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서연의 경우 워낙 밖으로 돌아다니던 편이라 에스퍼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물 입구 쪽 사물함을 이용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은정은 서연이랑 나란히 사물함을 쓴다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걸 자랑하고 다녔다. 민재는 은정의 사물함의 위치는 알았으므로 쉽게 서연의 사물함도 찾을 수 있었다. 

‘요즘도 사물함 쓰려나.’

사물함은 그냥 배치만 해주는 거지 사용은 자유였기 때문에 아예 비워두고 쓰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새벽 3시 훈련장 후문.

민재는 장소와 시간대만 적고 날짜는 적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나가 있으려는 생각이었다. 혹시 은정이 볼 수도 있으니 많은 정보를 기재할 수도 없었다. 민재는 종이를 사물함 틈새로 밀어 넣었다. 

펜 하나와 종이 하나쯤 없어진다고 별일이 생기진 않을 테지만 민재가 실장이 아닌 센터에선 물품 관리가 철저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철저하다면 회의실 문이 열려 있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민재는 다시 회의실 쪽으로 향했다. 펜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생각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어 곧바로 지환이 있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민재는 펜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 문을 걸어 잠그고는 바깥에서 문을 닫았다. 이제는 문이 잠겨 있을 것이다. 

민재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회의실을 보고 나서 이상해진 기분을 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런 줄 알았다. 제일 구석진 칸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한 민재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이 늦은 시각까지 성실하게 일하는 에스퍼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어차피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니 슬쩍 들여다보고 빨리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민재는 훈련장 안쪽으로 향했다. 민재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무슨 시뮬레이터를 켜 둔 건지 꽤 소리가 시끄러웠다. 민재는 벽에 딱 붙어 시뮬레이터가 돌아가는 훈련장 내부를 힐끔 들여다보았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커다란 굉음이 들리는데 움직이는 에스퍼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계열의 에스퍼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때 민재의 뒤에서 누군가 허리를 안아왔다. 곧바로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민재는 반사적으로 공격하려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잡았다.”

장난스러운 말투치고는 눅눅하고 울적한 목소리였다. 지침과 불안이 모두 내포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민재는 너무 잘 알았다. 왜 하필 저런 걸 쳐다보고 있어.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야….”

“일단 가요.”

무언가 말하려는 민재의 말을 자른 지환은 컨트롤러를 움직여 시뮬레이터를 껐다. 그러고는 말없이 민재를 안아들었다. 씨발. 민재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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