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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가 방금 보았던 풍경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한 모양인지 숙소에서 웅성거리며 빠져나오는 에스퍼들이 꽤 되었다. 민재는 지금 상황에서 다시 숙소로 급하게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띄진 않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에스퍼들은 바깥에 새로 발생한 상황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민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 숙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숙소는 조용했다.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안을 살펴보고 장롱까지 모두 뒤져보았으나 변경된 것은 없었다. 민재는 잠갔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환기시켰다.
민재의 예상이 맞다면 지환의 귀가는 늦을 것이다. 방금 전 목격했던 것과 관련된 일로 지환은 실장 호출이 되었을 테니 원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센터장과도 마주해야 할 터였다.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민재는 지환이 나가기 전 입고 있던 옷으로 환복한 후 가져온 태현과의 연락망을 어디에 숨길지 고민했다.
민재는 자신이 일 년 전 지환에게 남겨두었던 쪽지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서랍 안쪽 위에 폰을 테이프로 붙여 고정했다.
그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지환에게는 나름의 의미나 트라우마가 있는 건지 쪽지가 있는 서랍은 잘 열지 않았다. 처음 민재가 가지고 있는 술을 찾아내려고 할 때에도 거길 가장 마지막으로 뒤졌다.
그러니까 그 서랍 칸은 일종의 사각지대인 셈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 민재는 창문을 좀 더 활짝 열어젖혔다. 밖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어올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주위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민재가 보았던 대로 이미 가이딩실 쪽으로 옮겨진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놈은 아마도 가이딩 수치를 확인받은 후 능력 검사를 받게 될 것이다.
“또야?”
“쟤도 F등급 뜨려나.”
민재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곧이어 떠오른 건 정승규의 행방과 상태였다. 새희망복지회에서 지환은 그가 돌아왔다고 했다. 민재의 질문에는 괜찮다든가 문제가 없다든가 하는 두루뭉술한 소리만 반복한 그였다.
호영의 상태를 직접 살피지는 않았으나 민재가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캡슐에서 구조된 호영이 멀쩡하게 계속 실장으로 활동하는 모양이니 크게 심각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넘겼는데.
민재는 자신이 무언가 커다란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목격한 캡슐의 이름은 ‘뉴 비전 인큐베이터’였다.
인큐베이터라니. 그건 보통 갓 태어난 태아들이 아직 제대로 움직이거나 외부에 노출되는 것이 위험한 경우에 배치되는 곳이 아닌가.
그러니까 회복실이거나, 보호공간이라는 건가?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새희망복지회가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에스퍼들을 납치해 무엇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말인가.
민재는 자신이 놓친 것이 더 있는지 계속해서 곱씹었다.
‘원점순환계획’
그게 새희망복지회에서 발견한 계획명이었다. 메인인지 아니면 세부 사항 중 하나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인큐베이터라 지칭된 기계 중심부에 있는 화면에서 보았으니 그것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원점은 시작이나 본래의 상태를 의미한다. 순환은 되풀이하거나 반복되는 것.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되풀이하게끔 하는 계획이라는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기계의 이름과 계획명 그리고 F등급이 되어 돌아온다는 에스퍼들.
민재의 머릿속에서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두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호영과 우민재 또한 인큐베이터 안에 있었다. 그러나 민재의 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호영도 그렇다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박지환은 어째서 민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지환은 분명 호영을 구하러 그곳에 잠복했던 걸로 보였다. 민재를 보고 놀랐으니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쫓아온 게 아님은 분명했다. 거기다 카메라 위치를 알고 부수었던 건 물론이고 호영이 갇혀 있는 기계의 위치까지 쉽게 추리해냈다.
지환이 이전에 비해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모든 것을 파악할 정도라고? 민재는 지환이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계속해서 복기해보았다.
지환은 민재에게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조금 전 다툴 때도 거기서 민재의 존재를 들킬 뻔했다는 걸 지적했다. 그러니까 지환은 새희망복지회가 민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민재가 현재 일어나는 사건의 중심부에 놓였다는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민재는 여태까지 지환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그에게 가까운 페어였고, 파트너이자 선배였으니까. 그런 자신이 갑작스레 사라졌다가 나타났으니 그 혼란에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에 민재는 묘한 소속감을 받았고,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지환이 하고 있는 이 되도 않는 감금생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지환이 정말로 민재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이곳에서 고립된다면?
민재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싸늘해진 방 공기를 느끼며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
민재는 지환이 없는 동안 계속해서 생각했다. 민재는 아무도 몰래 접촉할 인원의 후보를 추려보았다.
첫 번째 후보는 호영이었다. 현재 실장직에 있으며, 새희망복지회에 납치된 적이 있다는 점에서 민재와 공통점이 많았다. 더군다나 협조적이지 않은 지환이지만 그런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이점이었다.
그러나 망설여지는 것은 호영이 민재가 살아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옛날에야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 실장직을 맡고 있는데 민재가 돌아가면 자신의 위치가 불안정해질까 두려워할 수도 있었다. 민재의 기억 속에서 호영은 승진욕이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걱정됐다.
다음은 정승규였다. 그 역시 새희망복지회에 납치된 전적이 있다. 어쩌면 센터에서 가장 빠르게 그곳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이기 때문에 양쪽의 정보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민재는 실장이 아니라 일반 에스퍼인 정승규가 현재 센터 내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민재는 정승규와 그저 아는 사이일 뿐이었다. 센터에서 같이 지낸 시간이야 길지만 그사이 둘이 두터운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강제로 센터에 소속되어 같이 존재한 기간이 길다 보니 나름의 의리는 있을지 몰라도 믿고 모든 정보를 털어놓을 상대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정승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민재는 마지막으로 이서연을 떠올렸다.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태현이었다. 신태현은 자신이 민재를 그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은 장본인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니까 새희망복지회와 연관이 있는 것은 물론 그런 판단이나 행동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위치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그가 민재와의 거래에서 내건 것이 서연의 안전이었다. 그녀의 안전을 뒤흔들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중요한 키를 가지고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접촉하기 가장 어려우며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지환의 말에 따르면-이제 그의 말은 믿기가 어려웠지만- 이전과 달리 서연은 매번 은정과 다니는 듯했다. 현재 정보를 모으려면 물론 은정이나 우석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쉬울 수 있겠지만 민재는 자신의 존재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니까 은정 몰래, 그녀에게 알리지 않게끔 하면서 서연을 만나 정보를 캐내고 입단속까지 시켜야 하는 것이다.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민재는 운이 나빴다. 언제나 어려운 현장에만 배치되던 그의 삶은 이번에도 예외가 발생하지 않았다.
지환이 숙소로 돌아온 것은 사방이 어둑해질 때쯤이었다. 제 딴에는 다급했는지 날아오면 될 것을 굳이 뛰는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지환은 조급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지환의 눈이 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민재는 태연을 가장했다. 지환은 곧바로 현관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집 안을 눈으로 빠르게 살폈다. 민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하고 있었어요?”
지환이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민재가 묻자 지환이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해요. 선배.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데?”
지환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민재의 옷차림을 살폈다. 지환은 안쪽으로 접혀 있는 민재의 잠옷 칼라를 살짝 집어 폈다.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계속 여기 있었어요?”
“네가 그러라며.”
어차피 믿지도 않으면서 왜 묻는 건데. 짜증이 치솟았으나 민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건 민재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였다. 아무래도 지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데 금방 온다더니 한나절이 걸려.”
민재는 손을 들어 지환의 뒷목에 팔을 올렸다.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기다렸어요?”
지환이 물었다.
“기다렸지.”
민재가 대답하자 지환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방구석에서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고 하니 꽤 기쁜 모양이었다.
“호영이 형이 계속 괴롭혀요.”
지환은 되도 않는 소리를 하며 민재의 어깨에 대고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민재가 무슨 일이냐고 물은 것을 어물쩡 넘기려는 수작이 보였다. 민재는 슬슬 열이 뻗쳤으나 내리눌렀다.
“그래? 내가 혼내줘?”
민재가 어르듯이 말하자 지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퍽 즐거운지 지환은 민재를 안은 채로 웅얼거렸다.
“네. 혼내주세요.”
“그러려면 네가 나한테 뭘 좀 줘야 하는데.”
“뭔데요?”
지환은 저번에 말했듯 달이라도 따다 줄 듯한 태도였다. 거짓말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하는 군. 그러나 민재는 지환의 거짓말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네가 나 대신 앉아 있는 그 자리.”
민재의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하던 지환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방 안 공기가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