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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민재를 더욱 거세게 끌어안았다. 지환이 몸을 감싸오는 무게만큼 묵직한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선배.”
지환이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에다 대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약속 지키게 해 주세요.”
그가 말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민재는 알 것 같았다. 민재가 들어보았던 것 중 가장 허무맹랑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아무런 답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약속이었다.
밤의 산속은 어둡고, 추웠다. 거기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건 민재였고, 그 빛을 내게 하는 건 지환이었다. 민재는 코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고, 눈가가 따끔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이 추운 첩첩산중으로 냅다 날아온 지환 때문이었다.
민재는 스스로를 속이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박지환은 정말로 멍청하고, 그래서 매번 제멋대로에 일을 망쳐놓는 데 선수였다. 그러나 그 힘으로 민재가 필사적으로 쌓아놓은 벽을 허물었다. 느끼고 싶지 않은 걸 느끼고 생각하게 했다.
민재는 지환이 약속을 정말로 지키게 되면 좋겠다고 내심 바랐다. 서로가 유일한 공간이 주는 힘은 컸다. 그래서 민재는 그가 낼 수 있는 유일한 용기를 내기로 했다.
“무너지는 건물에서 눈을 감은 뒤부터 계속 꿈을 꿨는데….”
“네.”
“거기서 너랑 내가 이런 산 중에 있었거든?”
지환이 피식 웃었다. 자신의 고백에 이런 이상한 말이나 하는 민재가 어이없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더 들어보라는 듯 지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근데요?”
지환이 되물어주었다.
“너랑 내가 카페를 열었어. 네가 날아다니면서 서빙을 하다가 자꾸 블루베리 스무디를 쏟는 거야.”
“참나. 내가요?”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발끈했다. 콩쥐인 양 물이 든 독도 들고 날았는데 자신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근데 그게 좋았어.”
“….”
“내가 꿈을 너무 오래 꾸네. 싶었는데도 조금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선배.”
지환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민재를 불렀다. 보채는 듯도 했고, 벅찬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너랑 그냥 그러고 싶었나 봐.”
“지금 그거 고백이죠.”
지환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민재는 급하게 부정해보았으나 지환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와… 어떡해. 선배 왜 이렇게 귀여워요?”
지환은 믿기지 않는 말을 내뱉으며 민재를 안은 팔을 좌우로 붕붕 흔들었다. 요람에 담긴 아기처럼 민재는 둥실둥실 흔들렸다.
“미쳤어?”
“네. 그런가 봐요.”
지환은 민재의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는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나뭇가지와 지환의 허벅지를 제외하고는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민재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민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가 들렸다.
***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지환은 정말로 미친 게 틀림없었다. 민재는 나름대로 지환의 불안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지환을 배신하거나, 그를 떠나려고 몸을 숨긴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애를 썼고, 지환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재는 지환과 평화로운 협력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엄청난 착각이었단 사실을 깨닫는 데는 슬프게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주변 상황을 살피는 데 도움을 달라고 하자 지환이 정색하면서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지껄인 것이다. 때문에 민재는 분노에 휩싸였고 둘은 싸우기 시작했다.
“아니. 어차피 나는 죽은 사람인데. 혹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 하면 되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그때 새희망복지회 본거지에서 마구잡이로 힐 써서 내가 우민재다 광고한 게 누군데.”
“그건 네가 피칠갑하니까 그런 거 아냐!”
“애초에 선배는 대책도 없으면서 혼자 거길 왜 들어간 건데요.”
“내가 무슨 대책이 없어!”
“나 없으면 거기서 다시 캡슐로 들어갔겠던데.”
민재는 솟구치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벽을 걷어찼다. 그러자 지환이 신경질을 내며 민재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다쳐요.”
“약속 지킨다면서 왜 협조를 안 해? 나 죽은 몸이라고 너까지 나 무시해?”
민재는 최후의 수단으로 역린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정말로 짜증 나고 억울한 것도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닌데 없는 사람이 되면서 움직이는 데 너무 많은 제약이 생겼다. 그리고 그걸 박지환은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았고 민재는 약이 올랐다.
“약속 지키는 것과 협조하는 건 다른 거 같은데. 선배는 매번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잖아요.”
지환은 민재의 날카로운 말에도 별로 타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대신 딱딱한 얼굴로 자신의 고집만 내세울 뿐이었다.
“열 받게 할래?”
민재가 지환의 어디를 때려주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복도 쪽에서 꽤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소 다급한 인기척에 민재는 습관적으로 입을 다물고는 방 안쪽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밖으로 나가는 것과 현재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걸 들키는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지환의 목소리가 꽤 사나웠다.
“그… 팀장님 실장님이 찾으시는데요….”
“안 간다고 했다고 해.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든가.”
“아니… 그런 말을 전해야 하는 제 입장은요… 팀장님… 근데 진짜 이번에 분위기가 좀 심상치가 않아요.”
“하….”
누군지 모르겠으나 상대는 지환보다 어리고 직급이 낮은 듯했다. 팀장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지환이 묘하게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환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 있어.”
“팀장님 제발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꽤 근엄하고 무서운 상사 행세를 하는 지환이라니. 민재는 이불을 내리고 한쪽 손을 허리에 올리고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환의 등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불쌍한 지환의 팀원은 쫓겨났다. 인기척이 멀어지자 지환은 곧바로 민재에게 다가와 이불을 내렸다.
“왜 그렇게 봐요?”
지환이 물었다.
“좀 재밌어서.”
코찔찔이 같았던 놈이 어느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게 왜인지 우스웠다. 민재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어리자 지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갔다 와야 할 거 같은데.”
“얼른 꺼져.”
민재는 신이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왕이면 호영이 지환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싶었다. 자신의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는 민재의 태도에 지환이 이를 악물었다.
“선배. 나 진짜 금방 와요. 근데 선배 여기 없으면….”
“없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요?”
지환은 민재의 손목을 가져가 가이딩 수치를 확인하더니 그의 손목을 꽤 세게 깨물었다. 아! 민재는 지환의 머리통을 빠르게 밀쳐냈다.
“나도 궁금하긴 하네요.”
진짜 멍청인가. 지환은 중얼거리듯 말을 하더니 진짜 싫다며 궁시렁거리다가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민재를 경고의 눈으로 째려보고 나서야 밖으로 향했다.
민재는 당연히 지환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그야 지환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여기 있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는 말 아닌가. 어차피 근방만 슬쩍 살펴보고 오면 되는 거였다.
지환의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민재는 재빠르게 밖으로 향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장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요.”
“박지환이 미쳐도 단단히 미치긴 한 모양이네.”
지환과 있는 것이 평화롭고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것과 별개로 태현과의 대화가 민재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태현의 말은 꼭 민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으며 그걸 지환은 알고 있다는 걸로 들렸다.
처음 숙소로 민재를 데려온 지환은 그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지환은 민재와 있을 때면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는 대화하지 않으려고 했다. 민재가 물어보면 계속해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거나 대화 주제를 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민재는 지환이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재는 바깥으로부터 고립된 채 계속 숙소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새희망복지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민재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재와도 연결되어 있다. 지환의 억지대로 나 몰라라 하고 계속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재는 센터 후문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애초에 지환이 곱게 협조해주었으면 더 빠르게 다녀올 수 있었을 테지만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었다. 민재는 태현이 일러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센터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었다. 그렇다면 태현 또한 센터 근방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고 봐야 하나?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가정은 아니었다.
민재는 해당 물품보관함에서 파기한 것과 비슷하게 생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태현은 센터를 벗어나면 연락하라고 했다. 민재는 지금 당장 정보가 필요했지만 태현이 그런 조건을 내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현과 접촉하는 핸드폰은 일회용이었다. 그러니 신중하게 사용하는 쪽이 민재에게도 태현에게도 덜 귀찮은 일이 될 터였다. 민재는 조금 더 정보를 모아 태현에게 확인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민재는 곧바로 다시 센터로 향했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를 택시를 이용해 빠르게 이동했으니 돌아가서 나간 적 없다는 듯 지환을 기다리면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센터 후문에서 내린 민재는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자에 마스크를 쓴 민재를 힐끔 쳐다보는 몇몇 사람이 있긴 했으나 놀라거나 그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숙소로 향하던 중, 민재는 꽤 많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뭉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딱히 굉음이 들리거나 파손된 지점이 보이는 게 아니니 센터 내에 테러가 터진 건 아닐 텐데. 무언가 이상했다.
민재는 조심스럽게 그 근방을 지나면서 귀를 기울였다.
“또야? 진짜 무슨 일이냐….”
“정신 차려 봐! 인규야!”
민재는 슬쩍 무리에 섞여들며 중심부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민재는 무의식적으로 힐을 발산하려다 빠르게 멈추었다. 어떠한 상황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쟤도 F등급 뜨려나.”
“진짜… 이러다 뭔 일 나는 거 아니냐.”
F등급? 민재는 쓰러져 있는 사람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웅성거리던 에스퍼들에 의해 들려 옮겨지기 시작했다. 민재는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는 그의 지인들 중 하나가 이쪽으로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하기 위해 빠르게 몸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