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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래요?”
지환은 뜬금없이 혹하는 제안을 해왔다. 은정이 가져다준 샌드위치와 김밥 등으로 저녁을 때운 둘이 방에서 하릴없이 뒹굴고 있을 때였다.
민재는 이렇게 생산적인 제안을 하는 지환이 오랜만이었다. 무엇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민재 자신이 했던 말들 중 지환을 자극한 무엇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
민재의 대답은 간단하고 단호했다. 나가게 된 김에 동향도 살피고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바깥이 어두워졌으니 딱 적기였다.
“이거 입어요.”
지환은 민재에게 후드집업을 내밀었다. 자신의 옷이었다. 지환의 옷은 민재에게 조금 컸다. 민재의 추리닝 바지까지 골라준 다음에야 지환은 자신의 옷을 대강 입었다.
“나중에 선배 옷 몇 벌 사와야겠네요.”
딱히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환은 심각한 문제를 논하듯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우스웠으나 민재는 지환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비행 능력이 있는 지환의 비위를 맞춰 협조를 구하는 편이 앞으로 거동하는 데도 수월할 터였다.
당연하게도 둘은 나란히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밤에 맞는 검은색이었다.
“비밀 데이트 같다.”
지환은 혼자서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내내 웃는 눈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민재의 머리에 씌운 모자를 왜 그렇게 조몰락거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 나가?”
이러다 밤새겠다. 답답함이 몰려왔다. 지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민재를 향해 팔을 벌렸다.
민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때는 저것이 당연하고 익숙하던 순간이 있었다. 경보음과 사이렌이 그의 일상이었던 것처럼. 위험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익숙했던 것처럼. 지환은 언제까지고 같은 자세로 있을 것처럼 가만히 민재를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민재는 살짝 점프해 지환에게 매달렸다. 지환은 안정적으로 민재를 받아 들었다. 민재는 원숭이처럼 지환의 몸에 팔다리를 둘렀다. 이전처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까 봐 그런 것인데 왜인지 몸이 더 밀착되었다.
지환이 킥킥거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가 자세를 바꾸려고 들자 지환이 그런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위험해요.”
아직 그들은 방구석에 있었는데 지환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거짓부렁을 잘만 늘어놓았다.
“하지 마라.”
“안긴 건 선배면서.”
맞는 말이었으나 민재는 괜히 성이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지환은 빠르게 몸을 띄우고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리로 나가게?”
민재가 물었다.
“네. 여기가 편해요.”
지환은 민재의 머리 쪽을 손으로 감싼 뒤 창문에 걸터앉는 듯한 자세로 상체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때문에 지환의 뒤통수는 아래쪽으로 향하고 민재는 아래 바닥을 향해 보는 자세가 되었다.
“준비되었어요?”
지환이 물었다.
“뭐가?”
“나 꽉 잡아요.”
언젠가 들었던 불길한 멘트였다. 지환은 뒤쪽으로 확 상체를 젖혀버렸고, 딱 붙은 둘은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민재는 비명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대신 복수의 의미로 지환의 귀에다 쌍욕을 퍼부었다. 지환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웃어댔다.
“간지러워요.”
욕이 간지럽다니. 지환은 정말로 모자란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추락하던 지환은 부드럽게 방향을 꺾었다. 추락하던 둘은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민재의 눈가를 스쳤다. 지환은 구름이 닿을 것 같은 위치까지 올라갔다.
“야. 좀 내려가 봐. 주변 좀 살펴보게.”
“싫어요.”
“아, 진짜.”
“갈 데가 있어요.”
민재가 살펴야 할 공간은 갈수록 작아지고, 멀어졌다. 소인국을 내려다보는 거인이 된 기분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민재는 최대한 알아서 아래 풍경들을 관찰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센터 주변에는 큰 변화가 있지 않은 듯했다. 민재가 기억하고 있던 간판 몇 개의 네온사인 색깔도 그대로였다. 그것이 민재에게 약간의 위안을 안겨 주었다.
온통 변해버린 듯한 세상에 그가 기억하고 있는 어떠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민재는 지환이 쓸데없는 곳으로 자신을 데려가면 마구 걷어 차주리라고 생각하며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지환이 먼저 향한 곳은 산이었다. 불빛이 가득한 도시를 뒤로하고 둘은 계속해서 어둠으로 들어갔다.
“너 어디로 가는 거야?”
수묵화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능선을 보며 민재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비행 물체를 위해 세운 표시등 몇 개를 제외하고는 빛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 하강한 지환은 이상한 줄과 철제 탑 같은 것이 있는 곳에 안착했다.
“첫 번째 코스예요.”
“뭐? 그게 뭔데?”
코스라고? 민재가 무슨 말인지 묻자 지환의 눈가가 다시 휘어졌다. 얼굴을 붙이다시피 해야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민재는 지환의 눈앞에 대고 인상을 찌푸렸다.
“스카이라인 타 본 적 없죠?”
그딴 걸 탈 이유가 있나. 어차피 매번 날아다니는 놈이랑 다녔는데. 민재는 지환이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없어.”
“선배 잠시만 나한테 힐 써 봐요.”
“뭐? 왜. 너 어디 아파? 오다가 박았어?”
민재는 지환에게서 상체를 떼어내 그를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지환은 민재를 좀 더 끌어당겼다.
“그런 거 아니니까. 얼른요.”
지환은 민재를 어르듯이 고쳐 안고는 말했다. 민재는 의심의 가득한 눈초리로 지환을 노려보고는 힐을 사용했다. 부둥켜안고 있는 그들의 사이에서 흰 빛이 퍼져 나갔다. 지환은 민재의 목 뒤쪽을 쓰다듬으며 가이딩을 주입했다.
“예쁘죠?”
민재의 몸에서 뻗어나가는 빛 때문에 발 아래쪽의 나뭇잎들이 희미하게 빛을 받았다. 이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반딧불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환은 곡선을 그리며 나무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았다. 발아래의 풍경들이 스윙하듯 민재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스산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고요한 밤의 나무의 실루엣과 언뜻언뜻 보이는 나뭇잎들. 이따금 들려오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
지환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그곳은 예뻤다. 민재는 빛이 좀 더 뻗어나갈 수 있게 힐을 좀 더 사용해보았다. 숲의 전경이 좀 더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민재는 아무는 상처들은 수없이 보았다. 자신으로 인해 살아나는 사람들도 질릴 만큼 보았다.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빛나는 풀과 나뭇가지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민재가 단 한 번도 마주해보지 않은 장면이었다.
민재는 처음 보는 광경에 어린아이처럼 매료되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흰 빛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지환의 비행은 계속되었고, 그동안 이어진 능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민재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 민재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지환은 다시 방향을 꺾어 산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좀 더 하강해 굵은 나뭇가지 중 하나에 안착했다. 둘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물론 지환은 여전히 민재를 끌어안은 채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민재의 팔을 끌어다 가이딩 수치를 확인했다. 민재의 가이딩 수치는 안정권에 머무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지환이 가이딩을 넣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환은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다는 듯 계속해서 민재의 손목에 들어온 초록 불빛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민재는 지환의 가이딩이 위험수치까지 내려갈까 싶어 계속해서 힐을 유지했다. 정말로 자신의 힐이 지환의 가이딩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민재는 좀 더 강도 높은 힐을 사용해보았다. 그러자 노란색을 유지하고 있던 지환의 가이딩 수치가 잠시 뒤 초록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지환의 가이딩 회복 속도에 민재의 힐이 영향을 미치는 걸까? 가이딩이 에스퍼의 몸 상태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이상했다.
지환은 민재가 자신의 손을 조몰락거리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무얼 하던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민재는 한동안 이렇게 저렇게 힐을 조절해본 끝에 하나의 가설을 완성했다.
지환은 멀티이므로 자가 회복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이딩이 ‘회복’이나 ‘치료’의 개념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게 지환에게만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
‘내 몸에도 변화가 생겼나?’
고민하는 사이 지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재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비비기만 하고 있었다.
“여기 선배랑 꼭 오고 싶었거든요.”
지환의 말에 민재의 상념이 깨졌다.
“왜?”
민재가 물었다.
“선배가 시골에 별로 가본 적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선배 돌아오면 같이 가야지 하고 찾아다닌 곳들 중 하나에요.”
“…넌 진짜 내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네.”
지환의 대답은 덤덤했다. 언제나 쓸데없고 과한 비장함이 장착되어 있던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해졌다. 민재는 계속해서 과거의 지환과 현재의 지환 사이에서 묘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왜? 죽었잖아.”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도 모르면서 민재는 물었다.
“안 죽었을 줄 알았어요.”
이번 대답 역시 확신에 차 있었으나 덤덤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사실을 전달하는 듯한 태도였다.
모두가 받아들인 우민재의 죽음을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조금은 기쁘게 느껴졌다. 존재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한 감각은 다른 이들에겐 몰라도 민재에겐 낯선 것이었다. 그리고 자각하지 못한 채로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후회했어요.”
이상한 만족감에 젖어든 민재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재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다르게 불안과 두려움이 담긴 것 같은 거친 음성이었다.
“따라 들어갈걸. 아니다. 내가 대신 갈걸. 그래도 선배는 착해서 날 구하러 왔을지 모르니까 그냥….”
잠깐 침묵 끝에 지환의 말이 이어졌다.
“보내지 말걸.”
속삭이듯 내뱉어진 지환의 목소리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 숲을 울리는 것 같았다. 민재는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