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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가능한가? 민재는 지환의 손목을 보고 또 보았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지환이 멀티가 되면서 가이딩 총집량이 너무 엄청나다거나. 혹은 민재도 실험을 받은 적이 있으니 그 영향이 있다거나.
어느 쪽이든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민재는 지금 상황이 너무 어이없었다. 그러나 지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당연한 결과라는 듯 싱글벙글 웃어대던 지환은 혼자 낯뜨거운 소리를 중얼거렸다.
“역시, 우리는 서로에게 꼭 맞나 봐요.”
민재가 닥치라며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누군가 숙소 문을 두드렸다. 지환과 민재의 눈이 마주쳤다.
지환은 민재의 입 쪽을 부드럽게 손으로 덮었다. 행동만 부드러웠을 뿐 입을 막은 것이었다. 민재도 딱히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뭐야.”
지환이 말했다. 상당히 삐딱한 태도였다. 민재는 지환이 이런 태도를 보여도 정말 괜찮은 건가 걱정이되어서 그의 옷자락을 휙 잡아당겼다. 지환은 민재를 한 번 쳐다보더니 조금 더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누구야.”
“나야.”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정이었다. 민재가 눈의 크기를 키우자 지환은 재빠르게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대며 주의를 주었다.
“안 들키게 얌전히 있으면 두더지 잡아오는 거 미뤄줄게요.”
지환은 협박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민재는 자신이 봐준다는 듯한 태도로 말하는 지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재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지환은 민재의 입에서 손을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현관으로 걸어 나가 문을 열고는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민재는 몸을 안쪽으로 물려 바깥의 시야에 속하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뭐해?”
“왜?”
지환은 은정에게 반말을 했다. 그건 민재에게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지환의 태도에 은정이 개의치 않아 한다는 것이었다.
“…너 요새 여기서 나오질 않는다는 소문이 있더라.”
은정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지환의 말에 은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지환은 은정을 안심시키려는 듯 덧붙였다.
“누나. 나 그때처럼은 안 돌아가.”
누나?? 민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때처럼이라니. 어쩐지 힘이 없는 데다 지환의 하극상을 다 받아주는 은정의 태도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다.
민재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혹시 지환과 은정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은 아니겠지?
민재는 순간적으로 지환에 대한 분노와 은정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죄책감을 가질 건 뭐란 말인가. 지환과 자신이… 민재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너 지금 꼴을 봐라. 미친놈 같아.”
민재와 몸싸움을 벌였다 보니 지환의 머리는 꽤 풍성한 까치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폭주 증상이 있었으니 충혈된 눈도 다 풀리지 않았다. 광인 같은 모양새일 것임은 틀림없었다.
“됐어. 용건만.”
지환은 싸가지 없게 은정의 걱정을 잘라냈다. 그런 지환의 태도에도 은정은 계속해서 어느 정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호영이가 너 많이 찾더라. 내일은 나와 볼 수 있겠어?”
“또 왜.”
은정의 말로 유추해보자면 지환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지환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는 듯 노크를 했을 것이고, 나올 수 있겠냐는 건 나가지 않으려 버틴 적이 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어디에 틀어박히는 건 주로 은정이 하던 행동이었는데. 그리고 찾으러 가는 건 언제나 민재였다. 그런 은정이 이제 지환을 찾으러 문을 두드렸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은정의 성장이 대견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민재는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로부터 묘하게 동떨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에 두려웠다. 민재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겨 안았다.
지금 몸을 일으켜 은정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은 쉬웠다. 일 초면 되는 일이었고, 아주 가벼운 시도와 노력이면 되었다.
그런데 왜인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재는 무기력함에 젖어들었다.
“무슨 일 났어?”
“아직은 별일 없어.”
그래도 센터에 커다란 일이 있어 호영이 지환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지환의 붕붕 뜬 머리가 작게 끄덕여지는 게 보였다.
“…알았어.”
“밥은?”
“안 먹고 싶어, 누나.”
힘없이 말하는 지환이 불쌍했는지 은정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민재가 보기에 지환은 그저 빨리 은정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환은 등 뒤로 팔을 꺾어 민재에게 계속 조용히 해야 한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이 얄미워 손가락을 꼬집어 버리려다 참았다.
“이따가 문 앞에 뭐라도 좀 둘게. 싫어도 먹어.”
“…고마워.”
지환의 목이 좀 더 바깥으로 뻗어졌다. 잠시 후 문을 닫고 들어온 지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을 부둥켜안고 있는 민재의 몸을 끌어안았다.
“너 은정이도 부려먹냐.”
지환은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 민재가 툴툴거리자 지환은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가 잘 챙겨줘요. 나 선배 없을 땐 좀….”
지환이 말끝을 흐렸다.
“고장 났었거든요.”
왠지 순화된 단어를 고른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는 지환 앞에선 민재는 괜스레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네가 기계냐? 고장 나게.”
그래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지환은 그런 민재를 보고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선배도 동물 아닌데 족제비라 불리고 그랬잖아요.”
지환이 불편한 주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민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가 방금 거래를 제안했잖아. 조용히 하면 안 찾는다고.”
“당분간이라고 했잖아요.”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다. 이 새끼는 어디서 이런 걸 배워온 거야. 민재는 바로 옆에 있는 베개를 집어 지환의 면상에 집어 던졌다.
“또 싸우자고?”
이제 좀 닥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지환은 정말 미친 건지 실실 웃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 싸운 거예요?”
“그럼. 뭐 재밌는 놀이라도 한 거냐?”
“되게 연인 같았어요. 방금.”
민재는 지환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얘 뇌 구조는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이없어하는 민재의 위로 지환이 장난스레 몸을 겹쳐왔다.
“부정 안 했으니까 토끼도 당분간 봐줄게요.”
또 선심을 쓴다는 듯 재수 없는 발언을 내뱉은 지환은 민재를 부둥켜안고 다시 가이딩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민재가 소리를 지르며 지환을 때리려고 할 때마다 그는 은정이 뭘 가지고 올지 모른다며 협박을 했다. 일 년 사이 박지환은 협박하는 법을 어디서 배워온 것이 틀림없었다.
***
서연은 은정이 지환을 찾아 나선 사이 밖으로 향했다. 근래 들어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연은 주로 은정과 함께 생활했다. 여태까지와 달리 원래 많은 가이드들이 하는 평범한 가이드로서의 삶이었다.
은정이 가는 곳에 따라가고, 은정이 필요로 하면 가이딩을 했다. 그것이 서연에겐 일종의 속죄이자 사과였다.
은정은 공식적인 민재의 추모 기간이 끝이 나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서연을 대해왔다. 여전히 다정했고, 친절했다. 다만 둘의 이야기 속에 우민재라는 사람과 신태현이라는 사람이 쏙 빠져 있을 뿐이었다.
서연은 우민재가 죽은 순간부터 본가로부터 부름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의심을 사지 말라는 당부만 받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태현이 몰아간 상황이리라 그녀는 짐작했다.
본가에는 가지 않았지만 센터장실에는 주기적으로 방문해야 했다. 서연은 여전히 센터장의 유일한 심복에 가까웠다. 서연은 본 것과 들은 것은 모두 은정에게 전했다.
서연은 주기적으로 계좌를 확인했다. 이전 그녀가 태현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급한 일이 있으면 쓰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조금의 금액이라도 빠져나가길 바랐다. 이왕이면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이면 더 좋았다.
그러나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오늘까진 그랬다.
서연은 자신의 나이를 가리키는 숫자 뒤로 공이 여섯 개가 더 붙은 금액이 입금된 것을 보고 당황했다. 돈이 들어올 곳이 없는 통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일 축하해.
입금자는 그런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그가 누구인지 서연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꽤 늦은 생일 축하였다.
작년 생일에는 서연에게 특별한 생일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땐 그것들을 가질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순간이 못내 그리웠다.
은정은 언젠가 신경준의 목을 따리라고 맹세했다. 서연은 그것을 돕기로 했다. 그로 인해 서연은 결국 삼중 스파이가 되고 말았다.
센터장이 융통하는 금액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자신의 양아버지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서연은 모두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태현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 은정이 해치려는 자들 사이에 어쩌면 태현도 있을지 몰랐다. 말하진 않았으나 은정은 우민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태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현은 사람을 죽였다. 적어도 해쳐야 했다. 우민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서연이 알고 있는 신경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서연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에게 그저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은 정작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내 복수는 어디로 향해야 하지?’
서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때 서연의 핸드폰이 알림음을 냈다. 그녀는 다급하게 폰을 확인했다. 은정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어디 나갔어?”
“아. 나 은행이야. 지환 씨는 괜찮아?”
“뭐. 먹을 거 좀 던져주고 왔어. 오래 걸려? 데리러 갈까?”
“아냐. 나 볼일 다 끝났어. 바로 갈게.”
서연은 혹시나 싶어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태현과 비슷한 체구의 남성이 있나 둘러보았으나 찾아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태현이 꼭꼭 잘 숨어 다녀서 다행이라고, 서연은 생각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늘 일만큼은 은정에게 알릴 수 없었다. 서연은 센터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