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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숨을 죽인 채로 문을 열었다. 아직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지환이 일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민재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그러고는 비누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바깥의 냄새를 끌고 이부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을 나와 눕자마자 지환이 민재 쪽으로 돌아누웠다. 민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지환은 그저 민재를 끌어당기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민재는 안도의 숨을 삼키고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건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다. 새벽에 몰래 외출을 했으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지환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지환이 민재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오전 내내 그러고 있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그러려니 했다.
눈을 비비며 지환이 어디에 있는지 찾던 민재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환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낡은 폰이었다. 어제 어두운 곳에서 폰을 꺼내다가 떨어뜨렸나? 민재는 어젯밤 일에 대해 추궁을 당하면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문득 억울해졌다. 아니 내가 내 발로 돌아다니는 걸 왜 해명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지환의 얼굴이 너무 싸늘했기 때문에 민재는 잠시 억울함을 접어야 했다.
같이 있는 내내 지환은 초조함과 불안을 감추지 못할 때가 많았다. 지환의 악몽에는 언제나 민재가 있었다. 그는 민재와 선배를 부르짖으며 끙끙 앓았다. 민재는 그 모양새를 보고 있다 보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지환에게 이전만큼 단호하게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민재는 돌연변이라고 지칭되는 에스퍼들 중에서도 돌연변이인 존재였다. 처음에는 등급이 그랬고 그 후에는 체질과 고통이 그랬고, 삶이 그랬다.
지환은 민재가 사라진 사이 그런 그의 삶으로 성큼 들어와 있었다. 지환이 어떤 각오와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민재와 같은 돌연변이가 되었다. 완전하거나 완전하지 않다거나 실험 성공의 유무와는 결이 다른 문제였다.
민재는 자신과 같은 돌연변이가 더는 없기를 바랐다. 그건 그가 모두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끔찍하게 외롭고, 의미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민재는 지환의 옆얼굴로 들어오고 있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반은 빛나고 반은 빛나는 그 얼굴은 민재가 가진 이면과 같은 부류의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민재는 알게 모르게 위안을 받았다. 치졸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순간은 이대로 지환의 곁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연변이 둘이서 고립된 채로. 성장하지 못하는 번데기처럼 영원히 아늑하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지환은 그가 꿈꿨던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민재가 일 년 내내 좁은 캡슐 안에서 꿈을 꾼 것처럼 이상한 음료나 판매하면서 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삶을 누려볼 수 있을까?
민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정답을 적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이었다.
지환이 민재를 돌아보았다. 민재는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상념을 휙 지워 버렸다. 평소처럼 일어났냐, 잘잤냐 하는 인사를 건네기 전에 지환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족제비가 누구예요?”
민재는 빠르게 지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족제비가 누구냐고요. 선배예요?”
지환은 폰을 든 손을 뒤로 뻗었다. 민재는 폰을 뺏기 위해 지환에게 무릎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삐딱한 웃음을 지은 지환이 다른 손으로 민재의 얼굴을 붙들었다.
“맞네요. 족제비.”
민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환은 민재를 끌어당겨 그의 볼을 살짝 깨물었다.
“하얗고, 동그랗고.”
지환은 닭살이 돋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었다. 민재는 족제비와는 전혀 달랐다. 민재는 여전히 뒤쪽으로 뻗어져 있는 지환의 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히려 지환을 덮치는 꼴이 되었다.
“그럼 족제비가 선배면 두더지는 어떤 새끼예요?”
“그러니까. 내가 내용을 확인해야 설명을 해 줄 거 아냐,”
민재의 말에 지환은 잠시 굳어진 표정으로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폰 화면을 켜 민재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야. 족제비. 너 왜 연락이 안 되냐. 토끼가 걱정해. 며칠 내로 시내 나가니까 연락해. 살아 있으면 점이라도 찍어 보내.
그때 왔던 연락을 씹었더니 민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때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인연인데. 의외로 정이 많은 타입인가 보다 싶었다.
민재는 토끼를 언급한 것이 걸렸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지환이 민재의 눈앞에서 폰을 거둬들였다.
“토끼는 또 누구고요?”
민재는 잠시 망설였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지환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는 애.”
“문자 보여주면 설명해 준다고 한 것 같은데.”
지환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민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두더지는 가이드야.”
지환의 볼이 불룩해졌다. 곧이어 작게 혀를 찬 지환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어디서 그런 건 또 찾았을까.”
그러고는 민재를 좀 더 자신의 쪽으로 끌어안았다. 민재는 계속해서 지환에게서 폰을 뺏으려 들었으나 실패했다.
“충분했어요? 선배 등급이 높잖아.”
충분했냐니. 그건 또 무슨 질문이야. 민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들킬까 봐 가이딩 부족하단 소리도 별로 안 했어. 약 먹으면 되니까.”
“그럼 이 새끼는 선배가 누군지 몰라요?”
“아니. 들켰어.”
“그럼. 들켰는데? 그러고?”
지환의 말이 짧아졌다. 그리고 둘의 거리도 계속 좁아졌다. 지환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땅으로 꺼져가는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뿌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뭐 있어. 그래서 새희망복지회 갔다가 너 만났잖아.”
“그니까 선배가 누군지 알고 지금 계속 집적거린다는 거잖아요.”
“너 진짜 멍청하냐?”
집적거리다니. 민재는 지환의 뇌 구조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당해서 벌어진 민재의 입술을 지환이 깨물었다. 그러고는 민재의 허리 쪽을 쓰다듬으며 가이딩을 흘렸다.
“…야!”
“나 멍청하니까 선배가 알려줘요. 그래서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선배 안부를 왜 계속 묻는데요?”
“뒈졌을까 봐 걱정된다잖아! 글자 못 읽어? 너 진짜… 좀!”
지환은 굳이 필요도 없는 가이딩을 세게 집어넣고 있었다. 민재의 허리 부근을 손으로 끊임없이 지분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짜증을 내보았으나 지환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 토끼는요?”
“…에스퍼.”
***
지환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민재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지환은 민재의 어깨를 꽤 아프게 깨물었다.
“아! 미친 새끼야! 떨어지라고!”
“능력이 뭐예요?”
지환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나 민재는 토끼가 자신과 같은 힐을 사용하는 에스퍼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두더지도 그렇고 굳이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을 깨고 싶진 않았다.
“내가 말하면, 찾게?”
“네.”
“찾으면?”
“데려와야죠. 도망자는 잡아오는 거잖아요.”
민재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지환에게서 한없이 낯섦이 느껴졌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뒤로 밀쳤다. 지환은 제대로 밀려나지 않았다.
지환의 발언은 너무 센터의 것이었다. 물론 그는 히어로 센터의 에스퍼다. 어릴 때부터 그런 걸 꿈꿔왔다고 했으니 팀장이 된 그새 뭔가 신념이 생겼다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 민재의 귀에 들려온 발언은 어딘가 이상했다.
민재는 지환이 자신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딱 꼬집어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모든 방향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쪽으로 향할 것이라고.
어쩌면 그가 지환을 가르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많은 면을 들킨 유일한 존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민재가 묻자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선배야말로. 뭐가 하고 싶어요?”
뭐?
지환의 질문에 민재는 멍해졌다. 뭘 하고 싶으냐고?
“다시 도망치고 싶어요? 센터도, 나도 다 버리고 동물 놀이나 하면서?”
지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지환이 민재의 허리를 거세게 옥죄였다. 그는 불안한 듯이 민재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매달렸다.
끊임없이, 가이딩이 밀려들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열이 올랐다. 민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숨을 헐떡이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지, 지환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민재의 귓가에 경고음이 들려왔다. 가이딩 부족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그게 민재의 것일 리는 없었다. 민재는 우려하던 순간이 왔다는 생각에 빠르게 지환의 손목을 잡아챘다.
붉은 경고등이 민재의 눈에 들어왔다.
박지환은 일반적 가이딩이 들어가지 않는다. 거부반응이 있다고 했는데. 민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괜찮아요.”
정작 지환은 침착했다.
“뭐가 괜찮아. 이 멍청한 새끼야!”
민재는 지환의 멱살을 잡고 침대에 패대기쳤다. 그러고는 가방에 태현이 준 약 중 남은 것이 있는지 미친 듯이 뒤졌다. 겨우 몇 알을 찾아낸 민재는 지환의 입에 알약을 욱여넣었다.
“그거 먹으면 아파요.”
“그래도 먹어! 아파도 살아야 할 거 아냐!”
지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눈으로 민재를 바라보더니 민재가 준 약을 삼켰다. 잠시 뒤 지환은 인상을 썼다.
“선배. 아파요.”
“어디가.”
민재는 혹시 가이딩을 뺏을까 싶어 지환에게서 최대한 떨어진 채 물었다. 눈으로만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자 지환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심장 쪽을 가리켰다.
민재는 팔을 뻗어 광역으로 힐을 시작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지환은 자신의 몸 주변을 밝히는 흰빛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민재는 지환의 뇌에 큰 문제가 생긴 게 아닌 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눈앞에 스파크가 튀거나 해?”
“희고 예쁘네요. 선배 닮았어.”
민재의 다급한 질문에도 지환은 태연하게 개소리를 지껄였다. 혹시 환각 증세 같은 걸 겪나? 민재는 조심스럽게 지환에게 다가갔다.
“그 날 선배 맞죠?”
그때 길거리에서 몰래 힐을 쓴 날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
민재는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지환은 정말로 고통이 심한지 인상을 쓴 채 눈을 감았다. 민재는 그런 그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뛰쳐나가서 그를 위한 뭔가를 구해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실험 부작용이라면 방법이 없을 수도 있었다.
민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지환이 민재를 낚아챘다.
“야! 떨어져!”
“폭주 안 해요.”
지환은 민재가 자신이 폭주해서 같이 터질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기가 찼다.
“아니. 나한테 가이딩 계속 뺏기잖아. 좀…!”
폭주 위험에 놓여 있으면서 힘은 왜 이렇게 센지 모르겠다. 민재는 그래도 지환보다 등급이 높은 에스퍼인데 자존심이 좀 상했다. 지환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민재의 눈앞에 지환이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어느새 금방 노란색으로 변경된 손목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경고음도 이제는 더 지속되지 않고 있었다.
“이거 선배가 채운 거예요.”
지환이 개소리를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껄였다. 민재는 탐탁치 않은 눈으로 지환을 노려보았다.
“지랄하지 마. 약 먹었으니까 나아진 거지.”
“진짜. 한번 해 봐요.”
민재는 지환의 손목을 잡고 힐을 주입해 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지환의 손목이 초록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멍한 민재를 보며 지환이 웃었다.
“역시 각인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