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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36)화 (13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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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민재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각인하자고요.”

지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말했다. 민재는 어이없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너 미쳤어?”

민재의 말에 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말해요?”

지환이 민재의 말투를 지적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민재는 지금 지환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머리가 생각이 그리로 튄단 말인가. 

“각인이 장난이야?”

“나 장난치는 거 아닌데.”

지환은 그 나름대로 화가 난 듯했다.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은 지환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뭐가 문젠데요. 나는 가이딩이 되고, 선배는 에스퍼고. 안 될 게 있어요?”

“넌 그냥 가이드가 아니잖아.”

실험 때문에 억지로 개조된 몸이었다. 지금도 지환이 가이딩 할 때마다 민재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뺏어다 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환은 민재가 가이딩 약을 먹는 것을 싫어했다. 민재의 손목이 오랫동안 초록을 유지할 때면 약을 먹었냐고 꼭 물어보곤 했다. 

“지금 날 돌연변이 취급하는 거예요?”

지환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선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어조였다. 민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런 맥락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요. 그럼 설마 다른 놈이랑 각인하려고 했어요?”

이야기가 또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민재는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이 새끼의 정신머리를 어디부터 고쳐줘야 하지. 민재는 도끼눈을 뜨고 있는 지환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민재의 마음도 모르는지 지환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불안한 듯 눈의 크기를 더더욱 키우고 있었다. 눈의 크기와 함께 오해도 커지는 듯했다.

“각인 안 해.”

“왜요.”

“아무랑도 안 하려고 했다고. 이렇게 불안정한 몸인데 누구한테 폐를 끼치려고.”

민재의 말에 지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에 대한 연민인지 아니면 아무와도 각인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에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환은 얌전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요.”

지환은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민재에게 다가왔다. 

“내가 지킨다고.”

적당한 압박감이 민재의 몸을 옥죄었다. 그대로 지환의 숨결이 민재의 볼을 간지럽혔다.

다급한 입맞춤이었다.

민재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맞닿은 입을 왠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재는 주춤주춤 뒷걸음질만 쳤다. 물러날수록 지환은 깊게 입을 맞춰왔다. 더 끌어당길 수 없을 때까지 민재를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각인하고 싶다는 지환의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뒷걸음치는 민재와 다가오는 지환 때문에 둘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는 것도 같았다.

민재의 정수리 쪽에 서늘한 벽이 느껴졌다. 곁눈질로 뒤를 보자 창문 쪽에 기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방 입구에서 끝까지 온 것이다. 

그때 지환의 손이 민재의 옷 안쪽을 파고들었다. 바깥에서 들어왔음에도 따듯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재는 차가운 얼음과 접촉한 것처럼 소스라쳤다. 

더 물러날 수 없는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밀쳤다. 밀려나지 않은 지환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입만 떼어냈다. 그러고는 잠자코 있었다. 

“비켜.”

“나랑 해요.”

주어가 애매한 말이었다. 민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지환을 노려보았다. 열 받았으니 작작하라는 표시였으나 지환은 그저 반대편 손을 들어 민재의 입을 벌리듯이 손가락을 살짝 집어넣었다.

“손 빼.”

발음이 다소 어눌하게 나갔다. 지환의 눈빛이 짙어졌다.

“어느 손?”

민재는 지환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지환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빼냈다. 

“난 괜찮다고요. 능력치랑 비슷한 수준으로 가이딩 등급 뽑힌댔어요.”

“나한테만 주는 게 아니잖아.”

멀티는 말 그대로 자가 충전 에스퍼 개념이었다. 적어도 민재가 교육받았던 이론상으론 그랬다. 지환이 자신에게 주는 가이딩은 자신이 가져야 할 몫을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배한테만 줄 건데요?”

지환은 민재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는 듯 바라보았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에스퍼 아니야? 네 몸뚱어리에도 들어가잖아.”

이번에는 지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부터 둘은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를 반복하며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고 있었다.

“내 가이딩이 그 사람에 비해 모자라요?”

지환이 웅얼거리듯 물었다. 그 사람? 지환이 지칭한 사람을 고민해보던 민재는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우석을 떠올렸다. 우석이 오랜 기간 민재를 전담해 가이딩 했으니 비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민재의 배를 쓰다듬는 손바닥에서 가이딩이 흘러들어왔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몸의 중심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그럼요?”

지환이 물었다. 자신의 가이딩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길 듣고 싶은지 눈이 반짝거렸다. 민재는 계속해서 제멋대로 구는 지환이 점점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답을 해주지 않고 냅다 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지환은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민재는 잽싸게 옆으로 몸을 빼 지환에게서 멀어졌다. 지환의 원망이 서린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

정말이지 지환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또 민재가 나갈 수도 있으니 자신은 나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민재가 배가 고프다고 거짓말로 회유를 하려들자 지환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환은 현관문을 열고는 음식을 들고 들어와서는 민재 앞에 차려주었다. 그런데 식기가 죄다 일회용이 아니었다. 식판이 급식실의 것과 아주 유사했다. 

또한 지환은 민재가 필요하다고 말한 중력가중아령까지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아령은 어디서 솟아났단 말인가.

민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너 무슨 짓 했냐.”

지환이 센터 내의 물건을 받았다는 건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시켰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원래 훈련장 물건을 개인 숙소로 가져가는 것은 금지였다. 그래서 일부러 지환에게 시킨 것인데.

민재는 지환이 이런 걸 부탁할 만한 인물이 누구일지 열심히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민재의 기억 속 지환은 가장 막내의 위치였다.

“…누굴 시킨 건데.”

민재가 다시 묻자 지환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후배요. 그리고 부탁한 거예요.”

“너 정말 몹쓸 선배로 컸구나.”

민재가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지환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꽤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지각하면 훈련 없어.”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의아해하던 민재는 이내 곧 지환이 어설프게 과거의 자신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한 것은 민재는 지환처럼 괴상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닥쳐.”

따지고 보면 민재도 그렇게 다정한 선배는 아니었다. 민망해진 민재는 괜스레 성을 냈다. 

“선배처럼 되려고 노력은 했어요.”

이내 곧 지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장난기 어린 방금 전과 달리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처럼이라니. 민재는 자신 같은 에스퍼, 선배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정확하지 않은 말은 오히려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지환은 더 이상 각인 이야길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거나 민재를 자유롭게 해주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환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고, 그 안에 민재가 없던 사이 있었던 일이라든가 필요한 정보라든가 하는 것은 역시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민재는 지환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민재의 불면이 옮겨가기라도 한 것처럼 지환은 좀처럼 푹 잠들지를 못했기 때문에 민재는 오래도록 인내해야 했다. 

지환의 고른 숨소리를 듣다가 민재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민재는 옷장에서 자신이 바깥에서 들고 온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안쪽 주머니에서 태현이 주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좀 더 마지막 패로 미뤄두고 싶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는 듯했다. 민재는 정보가 필요했고 지금 그것을 건네줄 사람으로 가장 적합한 자는 태현이었다. 

민재는 다시 마스크와 모자를 썼다. 그러고는 최대한 조용히 현관을 열었다. 다시 슬리퍼를 걸어두어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고 기척을 죽여 복도를 걸었다. 

늦은 새벽이라 좀처럼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민재는 지금 이 시간대에 사람이 없는 센터의 공간을 잘 알았다. 민재는 조용히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걸어 나가 훈련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훈련장이 조용하고 어두웠다.

민재는 익숙한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 초보용 시뮬레이터를 작동시켰다. 그러고는 단축키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태현의 목소리였다. 신중한 어조였다. 

“나야.”

기계음이 들리고 미로 같은 공간이 구현되었다. 외우고 있는 함정들을 피하며 민재는 여유롭게 걸었다.

“어디예요?”

소리가 새어 나간 건지 태현이 물었다.

“훈련장.”

적당한 소음이 있으니 비밀스러운 통화를 하기에는 적합한 공간이었다. 너무 고요한 곳에서 이야길 하면 더 선명하게 말이 새어 나갈 수 있었다.

“…센터라고요?”

태현이 기가 차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민재도 기가 찼다. 애초에 계획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됐어.”

“거기면 약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요.”

약이 부족하거나 위급상황에서만 연락하라는 말을 상기시키듯 태현이 말했다. 안부전화나 한 것은 아닐 테니 용건을 말하라는 거였다.

“아직 아무도 몰라.”

“…뭘요.”

“내가 살아 있는 거.”

“박지환이랑 있어요?”

예상했다는 듯 들려오는 질문에 민재는 조금 당황했다. 태현의 정보력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눈치가 매우 빠르거나. 

“어.”

민재는 긍정했다. 그러고는 간단히 상황만 설명하고 정보를 요구했다. 현 상황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였다. 그러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태현은 장소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지금 폰은 폐기해요. 내가 말한 장소에 새 폰 둘 테니까.”

“그게 다야? 난 대답이 필요한데.”

민재의 말에 태현이 헛웃음을 짓는 게 느껴졌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요.”

태현의 비꼼에 민재는 기분이 상했다. 

“박지환이 미쳐도 단단히 미치긴 한 모양이네.”

태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환이 좀 모자라고 미친 게 맞는 것 같긴 했으나 태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소리야?”

민재가 물었으나 태현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어쨌든 거기서 벗어나면 연락해요.”

그렇게 통화가 종료되었다. 민재는 태현의 태도에 황당함을 느꼈으나 지금 당장 어쩔 도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재는 소형 폭탄이 등장하는 훈련 시뮬레이터를 작동시키고는 태현을 투사하며 핸드폰을 부서뜨리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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