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민재는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지환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재는 지금 못내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환과 마주치자마자 눈물겨운 상봉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이렇게 주기적으로 무언가 의심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따지자면 더 수상한 쪽은 지환이었다. 그간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산 건지 그는 많이 변한 듯했고 그게 민재에게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민재는 점차 어긋나버린 자신의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말하면, 믿기는 하고?”
민재가 퉁명스레 되묻자 지환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안 믿어요.”
지환은 다짐하는 양 말했다.
“그래. 난 너한테 오고 싶었다고 해도 못 믿겠지.”
“오고 싶었어요?”
지환이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어느새 민재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인 채였다. 민재는 방 안에서 벽에 가둬진 듯한 구도가 되었다.
“좀 비켜.”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지환은 비키지 않고 물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을 잠시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새희망복지회 본거지 옆에.”
지환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깨어나니까 일 년이 지나 있었어. 약은 신태현한테 받았고. 살아 있기만 하라면서 쥐여주던데.”
민재는 순순히 실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털어놓았다. 말하면서도 그것이 믿기 힘든 내용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지환이 민재를 정말 믿지 않을지 궁금해졌다.
신태현은 지환에게 있어 가장 친한 동료이기도 했다. 민재도 우석이 일 년간 잠들었다 일어나니 지환에게 새희망복지회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믿기 힘들 터였다.
지환은 민재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을 앙다물면서 무언가 참는 듯했는데 그게 분노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라고 해도 민재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이거 나 말고 누가 또 알아요?”
그의 질문에 민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런 이야길 어디 가서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다고 해도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자 지환이 미소 지었다. 환한 미소였다. 민재는 지환의 기분을 도통 따라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환은 부드럽게 민재의 손을 끌어당겼다.
“뭐야.”
“선배가 좋아하는 걸로 포장해 왔어요. 식기 전에 먹어요.”
지환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자신이 들고 온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진 민재는 그런 지환이 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지환은 민재를 자리에 앉힌 다음 음식을 집어 입가에 들이밀기까지 했다.
민재가 고개를 뒤로 쭉 빼자 지환은 아래로 손을 받쳐 보였다.
“뭐해요?”
민재의 입이 헤벌어졌다. 응당 자신이 해야 하는 질문을 빼앗겼다. 아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민재는 지환과 그의 손에 들린 젓가락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진짜 뭐하자는 거야. 나도 손 있어.”
지환은 그의 말에 작게 웃어 보였다.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어느 부분이 웃긴 거지? 민재는 진지하게 지환이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고민해야 했다. 이게 실험 후유증 중 하난가? 인간이 갑자기 화를 내질 않나 실없이 웃질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건 나도 알아요, 선배.”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민재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두었다.
“먹어요.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언제든지 말하고요.”
지환은 민재가 음식을 먹는 것이 중대사라도 되는 듯 턱을 괸 채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민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밥을 한 술 떠 입에 넣고 씹었다.
한동안 민재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지환도 수저를 들었다. 민재는 먼저 식사를 끝내고는 지환을 바라보다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민재가 묻자 지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해요. 뭐든 갖다 줄게요.”
지환은 달도 따다 주겠다는 태도로 선뜻 말했다. 민재는 자연스럽게 슬쩍 바깥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바깥 상황은 어때?”
“좋아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답이었다. 민재는 다시금 짜증이 일었으나 조금 전의 대화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참았다.
“그럼 내가 언제쯤 움직이기 편할 거 같아?”
민재가 묻자 지환의 움직임이 멎었다. 식사를 멈춘 지환은 굳은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태현한테 들은 바로는 곧 센터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건 선배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민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게 어째서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는 말인가. 애초에 무엇 때문에 자신이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그럼 우선 내일 중으로 우석이랑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줘.”
“안 돼요.”
지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재는 지금 상황이 다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입맛이 다 떨어진 건지 지환은 한숨을 내쉬고는 먹다 남은 식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우석 실장은 윤오준 비서랑 연인 관계예요.”
“뭐??”
놀란 민재의 목소리가 커지자 지환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야 놀라우니까. 일 년 전에 누군가랑 좀 요상한 관계인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그게 윤 비서일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 비서였다. 심약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신기하잖아.”
“…아무튼 그래서 안 돼요.”
뭐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지? 민재는 잠시 생각하다가 지환이 말하는 것이 윤 비서임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지환은 민재가 살아 있다는 정보 등이 그를 통해 새어 나갈 수 있음을 의심하는 것이다.
“…은정이는?”
“이서연이랑 딱 붙어 지내요.”
그건 원래도 그러했지만. 서연이 태현과 정말로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민재의 상황이 노출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안전하다니까요.”
지환이 배시시 웃으며 민재를 끌어안았다. 안전이야 할 수 있어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민재의 머릿속에 태현이 줬던 폰이 떠올랐다.
비상시에 연락을 취하라고 했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태현과 어떻게든 접촉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태현은 한 빌딩의 옥상에 서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비슷한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태현은 그중에서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제 곧이야.”
잭이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부터 태현의 불안은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짐작만 하고 있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것이다.
태현은 자신의 아버지인 신경준 의원을 찾아갔다. 태현은 그의 앞에 잭이 들고 있던 파일 하나를 들이밀며 물었다.
“이걸 알고 계세요?”
경준은 태현을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기가 찼다. 자신의 아비는 자신과 자신의 누나를 포함한 모든 초능력자들을 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저는 당신 자식이 아닌가요?”
태현은 묻자 경준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를 나무랐다. 당연히 당신의 자식을 고려하고 있으며, 신태현만은 계획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달콤한 제안이라도 하듯 말했다.
태현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애초에 이것이 맞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누나가 원했던 것이 이게 맞을까. 누나도 나를 포함한 모두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랄까.
“마지막에 다 닿아서는 네 누나가 너 하나는 책임져주지 않겠니.”
그러니까 유일하게 남은 에스퍼와 가이드로서 살라는 말이었다. 그건 달콤했다. 어쩌면 태현이 지금 이 일들을 모두 모른 척한다면, 그도 피해자로 남게 된다면 서연은 정말로 그래줄지도 몰랐다.
마지막에 겨우 살아남은 태현을 모른 척하지 못해 서연이 평생 곁에 남게 될 것을 생각하면 경준이 한 제안은 태현에게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살려줄까?
태현의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버려진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쨌거나 겉으로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당신에게 충성하는 아들이었다. 근데 그런 피붙이를 버릴 정도라면 서연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신태현이건 이서연이건 경준에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내쳐질 것이다.
태현은 이전에 그러했듯 자신의 아버지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누나랑 저는 살려주세요.”
태현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은 약속을 받아냈다. 지금 당장은 서연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이곳에서 이탈할 수가 없었다. 태현은 자신이 고용한 자에게서 건네받은 서연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간 서연은 조금씩 마르고 있었다. 태현은 자신의 파트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은정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태현은 사진을 곱게 펴서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가져온 가방에서 기다란 막대 같은 것을 꺼냈다.
단순한 막대처럼 생긴 것은 잭이 새로 개발한 총기였다. 애초에 실탄이 들어간 것과 좀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었지만.
경준은 당연하다는 듯 태현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오늘 태현의 타겟은 최근 들어 실험실 쪽을 들쑤시고 다니다가 몇 가지 정보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형사였다. 즉 일반인이라는 소리였다.
결국 초능력이든 무엇이든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던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그런 존재를 해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태현의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확대경 안의 남자는 커피를 마시며 혼자 길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면 남자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그때 태현의 수많은 핸드폰 중 하나가 진동했다. 그 핸드폰은 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잭은 문자로 사진을 보내왔다. 태현은 그것을 확대해 보았다. 잭이 있는 공간 내부의 방어 장치가 작동한 사진 같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내가 누굴 찾았게?
흰 빛을 보고 저런 식의 말을 한다면 답은 하나였다. 잭은 이 사진이 우민재라고 확신한 듯했다. 좆됐다. 태현의 입에서 욕이 새어 나갔다.
가지 말라고 일러놓았는데도 우민재는 기어코 거길 갔단 말인가. 겨우 붙여 놓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태현은 복잡한 마음에 머리칼을 헤집었다.
태현은 자신의 아버지가 준 임무를 마저 수행하는 것이 이득일지 아닐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남자는 확대경 밖으로 빠져나가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태현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남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