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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32)화 (133/181)

132

잭은 모니터가 가득한 공간에서 자신의 목발을 마구 바닥에 패대기치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렸으나 공간에는 그 소음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공간에서 실험체 하나를 도둑맞았는데 확인할 수 있는 화면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영상에서도 침입자의 정보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묘하게 사각지대 근처를 이용해서 튀었다는 점이 잭을 더 열 받게 했다. 이런 것은 좋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곳의 위치가 어째서 노출되었단 말인가?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입가에 가져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눈으로는 끊임없이 단서들을 좇았다.

빼돌려진 실험체는 주호영이었다. 주호영. 주호영이 뭐더라? 생각하던 잭은 몇 가지 정보를 기억해냈다. 자신이 머무는 곳 근방의 실험실 쪽을 주기적으로 건들고 다니던 게 들켜 잡혀온 놈이었다.

거기다 센터 실장직을 맡고 있는 자였다. 잭은 호영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 마음에 들었다. 

호영은 모르겠지만 잭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특출 날 것 없는 비행 능력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등급을 올렸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런 존재가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는 인원’으로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 못내 흥미로웠다. 잭은 호영으로 이것저것 해 보고 싶었다. 자신이 끝까지 파헤쳐 보고 싶었던 실험체인 우민재가 죽고 없으니 대체품으로 나쁘지 않았다. 

잭은 민재를 꼭 해부해 보고 싶었다. 실험할 때는 늘 검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는데 그것이 호기심과 탐구열을 부추겼다. 그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갈 때까지는 그랬다.

계속해서 화면을 좇던 잭의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바로 화염 사이로 번져 나오는 하얀 빛이었다. 빛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도 있었지만 빛이 번지거나 뭉치는 정도가 달랐다. 

‘어둠 속을 날고 있는 것도 아닌데 빛이 튀어나왔다고?’

당황해서 능력을 마구 사용했다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굳이 자신이 있는 곳에 침입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잭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다.

잭은 다급하게 그 날의 책임이 있는 일꾼들을 불러들였다. 

“나는 몰라요.”

멍청한 놈들은 중요 기관에 침입자를 들여놓고는 계속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잭은 순간적으로 일반인과 에스퍼의 몸을 비교 분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참기로 했다. 

“빛을 내는 에스퍼 말이야. 어떻게 생겼어?”

“몰라요.”

“…혹시 빛이 나고 나서 도망치던 놈들의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어? 아니면 비틀거리다가 멀쩡해졌다든가.”

잭이 질문을 던지자 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모르겠어요.”

약간의 뜸을 들이고 나온 대답이었다. 여전히 같은 말이었으나 긍정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잭은 순식간에 환희에 휩싸였다. 우민재가 살아 있다. 잭은 놓쳤던 복수의 기회를 다시 얻게 된 것이다. 그는 화면을 다시 되감기해 빛을 보며 미소 지었다.

***

민재는 매우 익숙한 공간에서 눈을 떴다. 자신이 늘 눈을 뜨던 공간. 아주 오래 살아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기억하는 곳이었다. 익숙한 풍경을 보며 눈을 깜박이던 민재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일어났어요?”

지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민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너.”

민재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러지 않으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게 될 것 같았다. 민재는 지금 자신의 숙소 안에 있었다! 

박지환 이 미친 새끼가 자신을 기절시켜 무려 센터로 데려온 것이다. 민재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껏 치료해 주고 살려 줬더니 갑작스레 센터 한복판에 자신을 데려다놓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조금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지환은 여전히 그 멍청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민재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이미 센터에 소문이 쫙 퍼졌나? 혹시 기사까지 나갔나?

민재가 머리를 빠르게 굴리는 사이 지환은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가지고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선배. 물어볼 게 있어요.”

“누가 봐도 물어볼 게 있는 사람은 나 아니냐?”

민재가 인상을 쓰자 지환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데요? 그리고 그간 연락도 한 번 주지 않았고. 내가 당신을….”

말을 멈춘 지환은 일그러진 얼굴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곳에 있던 게 혹시 그쪽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였나요?”

주어가 모두 대명사로 변경된 질문이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민재는 잠깐 생각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환은 지금 민재가 새희망복지회에서 일하고 있었냐고 묻는 거였다. 

민재는 기분이 상했다. 자신은 억울한 처지인데 옛 동료이자 한참 어린 후배한테 잡혀 들어와 심문을 당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지환은 무표정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건 민재에게 낯선 상황이었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민재가 빈정대자 지환은 침대 맡에 두었던 가방에서 알약들을 꺼냈다. 태현으로부터 받은 것들이었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지금 너 나 취조하냐?”

“선배 상황이 어떤지 알아야 제가 보호를 하죠.”

지환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민재는 조금 누그러졌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지환은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못내 위로가 되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센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냐는 질문이었다. 민재가 계속해서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하자 지환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그러나 그는 차분하게 답을 해 주었다.

“나만 알아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지환만 알고 있다니 다행이긴 했다. 

“그럼 우선 날 몰래 내보내 줘. 너한테 설명할게.”

“싫어요.”

민재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지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재는 눈을 깜박이다 되물었다.

“뭐라고?”

“선배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을 없을 거예요. 이제.”

“야. 난 공식적으로는….”

“그래서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요.”

안전한 곳? 센터의 한복판에서 안전하다고? 민재는 지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민재가 무언가 말하려는 걸 계속 잘라먹고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이는 지환의 태도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럼 이것만 대답해 줘요. 거기에 소속되거나, 소속되고 싶어서 들어가 있었던 건 아니란 거죠?”

“…어.”

지환은 집요하게 되물었고, 민재는 떨떠름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민재는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결론이라고? 

“아니. 우선… 호영이는?”

“잘 데려다놨어요.”

묘하게 뒷내용이 잘렸다. 민재는 슬슬 짜증이 났다.

“그걸 보고라고 해?”

“제가 왜 선배한테 보고를 해야 해요?”

민재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긴 했으나 민재는 실장직을 박탈당했다. 방금 그가 스스로 언급한 호영이 실장이지 않은가. 그러니 지환이 자신에게 보고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래도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였다.

“너 말을 왜 그따위로 해?”

“내가 선배를 지금 겨우 어떻게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데 주호영 이야기를 해요?”

지환은 자신이 더 화가 났다는 듯 억울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과 대화를 하는데 호영의 이야기를 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건가? 

지환 입장에선 죽은 줄 알았던 선배가 나타났는데 그 사정 이야긴 제대로 해 주질 않고 계속 닦달만 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재는 곧이어 자신이 지환의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런 자신이 낯간지러워졌다.

“…아니. 내가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말 안 해 줘도 돼요. 선배가 원할 때 말해 주세요. 어차피 전 안 믿어요.”

지환은 담백하고 평온한 얼굴로 이상한 말을 했다. 

“…뭐?”

“전 안 믿는다고요, 선배.”

지환이 미소 지었다. 믿지 않는다는 부정적 말을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상큼한 얼굴이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지환의 입과 자신의 귀 중 어느 것에 문제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민재의 손을 지환이 잡아들었다.

손가락을 얽어오며 지환은 민재의 손바닥을 가볍게 문질렀다. 간지러움을 느낀 민재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배는 안 고파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지환이 물었다. 식사 여부를 묻는 지환은 민재가 알고 있는 옛날의 그 모습이었다. 민재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문득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기절하기 전, 그러니까 박지환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기 전에 둘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박지환은 민재를 가이딩했다!

민재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지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자꾸 몽롱하고 나른해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했다. 지환에게서 가이딩이 느껴졌다. 

“야.”

민재가 지환을 불렀다. 낮은 목소리였다. 눈웃음을 짓고 있던 지환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너 뭐야?”

민재의 질문에 지환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해 주었다.

“완전해졌다고 하던데요.”

완전하다라. 민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았다.

“…누가?”

알면서도 물었다. 민재의 질문에 지환이 눈을 내리깔았다. 퍽 처연한 모양새였다. 

“조 박사가요.”

허.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지환은 김진성이 원해 마지않던 멀티가 되었다. 그게 되기 위해 실험을 받았다. 이 센터에서 또다시 그 실험이 이루어졌단 말이지? 민재는 분노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건 민재가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하는 거였다. 이 센터에 자신이 남아 있는데 두는 작은 의미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지환은….

민재는 지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지환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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