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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곳에서 민재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환은 제대로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 숨을 쉬지 못하다가 갑작스레 쉬게 된 것 같기도 했고, 숨통이 멎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얼마 전, 윤 비서와의 대화 후 호영을 반드시 잡아 모든 걸 털어놓게 만들겠다고 결심한 지환이 센터를 헤집고 다닐 때의 일이었다.
호영은 무슨 미꾸라지인 양 요리조리 지환을 피해 다녔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환은 하루 종일 눈에 불을 켜고 호영을 찾아다니는데 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쯤 지환은 자신의 숙소 문에 붙어 있는 흰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투명 테이프로 밀봉한 봉투는 어떠한 이름이나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지환은 봉투를 들고 곧바로 몸을 띄워 주변 복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러나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복도에 사람도 적었던 데다 걷고 있거나 서 있다고 해서 다짜고짜 따지고 들 수는 없었으므로 찾을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지환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려 센터 숙소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더 띄웠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몸을 숨긴 채 봉투를 열었다. 소형 폭탄이라면 자신의 몸만 날리면 되지 건물까지 터뜨릴 필요는 없었다.
지환은 아주 작은 가능성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이 안에 민재의 편지가 있다면?
그건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다. 오로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허공이었다. 구름 사이에 있으면 자신의 존재가 잠시 지워질 테니 딱 좋았다.
그렇게 하늘에서 편지 봉투를 뜯은 지환은 손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칩과 쪽지를 보고는 숨을 멈추었다. 정말로 민재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낼 수 있는 곳이 너밖에 없었어. 미안하다.
급한 상황이었던 건지 알 수 없으나 꽤 휘갈겨 쓴 필체였다. 쪽지의 내용은 누군가로 특정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지만 지환은 민재는 아닐 것이라고 여겼다.
지환에게 무언가 요청하거나 맡기려고 했었다면 민재는 지난 시간 그와 마주쳤을 때 그렇게 가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추모식이 열리게 그냥 두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환은 생각보다 손쉽게 쪽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태현. 민재와 같은 날 실종되어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존재였다. 민재가 정말로 죽었다면 모를까. 민재가 살아 있으니 어쩌면 그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이렇게 접촉을 시도해오다니.
미안하다는 말을 지환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건 자신이 어느 쪽 사람이었는지 고백하는 꼴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누나는 여전히 센터에 있는데 이런 쪽지를 남기다니.
둘이 같이 실종되었을 때, 지환은 사라진 민재에게 정신이 팔려 태현의 부재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게 지환에게 작은 부채감으로 자리 잡고 있던 터였다.
서로 나눈 이야기들이 있었고, 의지하던 게 있었다. 좋은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착잡함과 분노가 밀려들었다. 지환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맞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민재를 데려갔거나, 숨겼던 것이 태현일지도 몰랐다. 그가 새희망복지회의 심복이라 민재를 필요로 한 거라면? 애초에 그걸 노리고 접근했다면?
지환은 여러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다. 끝까지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은 지환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태현은 그가 보았던 과거의 지환을 믿고 무언가를 보낸 모양이었다.
“잘못 찾은 거 같은데.”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넓은 히어로 우민재라면 모를까. 지환은 옛정을 생각해 배신자의 사과를 냉큼 받아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그가 가장 아끼는 서연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가 사과인지 청탁인지 보물인지 모를 것을 보내왔으니 확인은 해야 했다. 지환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방으로 조용히 들어와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잠시 고민하던 지환은 컴퓨터의 모든 파일을 영구 삭제했다. 칩 안에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깔끔해진 화면을 보고 지환은 칩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usb포트에 칩을 연결시켰다.
태현이 지환에게 보낸 칩에는 몇 개의 파일만이 들어 있었다. 지환은 가장 먼저 음성 파일을 재생시켰다.
[…어떻게 찾았어?]
태현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말을 시작한 목소리는 남성의 것 같았다. 남자는 두려운지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지척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면서, 어떻게 찾았냐고?]
다른 목소리는 처음 말을 꺼낸 목소리를 비웃었다. 그의 말투와 억양은 지환이 알고 있는 자였다. 중후하고 묵직하지만 어디가 음습한 구석이 있는 성정이 배어나는.
[내가 자네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응?]
[기… 김진성! 이러지 마…. 나도 이젠 거길 나왔어.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지 않아?]
지환의 입꼬리가 삐딱한 호선을 그렸다. 예상대로였다. 지금 여유로운 어투로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목소리는 센터장 김진성의 것이었다.
지환은 잠시 음성 파일을 일시 정지 한 다음 이어폰을 찾았다.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가선 안 될 터였다.
[…친구라.]
[원하는 게 뭐야. 다가오지 마!!]
녹음을 한 남자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네는 원래부터 나를 믿었잖아. 그렇지?]
[뭐?]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건 알았잖아.]
지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상황에 하는 협박치고는 꽤 느끼한 말이었다. 이 남자는 센터장의 스캔들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를 무서워했지. 알고 있었잖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김진성은 뒷말을 줄였다. 마치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무언가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묘한 이질감이 섞여들었다. 그러니까 꼭 똑같은 두 사람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환은 음량을 키우고 되감기를 해 다시 들어 보았다. 그러자 조금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김진성의 목소리는 잠깐씩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음질의 문제인가? 지환은 뒷내용을 마저 들어보기로 했다.
음성파일에는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다시 김진성이 말했다.
[우리 쪽에서 주기적으로 가이딩 관련 물품을 보내줄게. 어때?]
[…대가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주면 되네.]
하고 싶은 것이라. 과연 그게 무얼까. 지환은 씁쓸한 마음으로 자문했다. 뒤에 김진성이 할 말이 어떤 것이든 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게 뭔데?]
[지금 내가 직접 하지 못하는 걸세. 자네도 관심이 있는 걸로 아는데. 완전한 존재에 대한 거 말이야.]
음성 파일은 거기서 끝이 났다. 지환은 이 파일이 전체 분량일지 아니면 일부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전체 분량이 아닐지라도 얻어야 할 정보가 모두 들어 있긴 했다. 지환은 뻑뻑한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감은 눈앞으로 몇몇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고통스러워하던 아이들과, 센터에서 있었던 이상한 조짐들. 민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혼자 이리저리 뛰며 무언가 막아 보려 애쓰던 것들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상기되었다. 뒤늦게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고 깨달으면서 지환은 분노했다. 이걸 녹음한 자는 까마귀 교주였던 인간이다. 쓰레기만도 못한 자가 제 살길을 마련하려고 준비한 걸 터였다. 그럼에도 그자는 죽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태현은 어떻게 손에 넣었단 말인가?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보낸 걸까?
지환은 칩에 있는 다른 파일을 열었다. 그것은 단순한 텍스트 파일이었다. 몇 개의 그림과 글자들로 이루어진 짧은 정보집 같았다.
주소로 추정되는 줄글 하나, 그리고 도면으로 보이는 그림 몇 개, 그리고 이름과 번호들이 몇 개 기재되어 있었다.
정승규를 비롯해 낯이 익은 이름들이었다. 그 옆에 있는 숫자와 동일한 숫자들이 도면 군데군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지환은 호영의 이름을 발견했다.
“하….”
한숨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잡혀 들어간 모양이었다.
다른 도면에는 이상한 장치에 대한 설명과 조작법이 기재되어 있었다. 기계의 쓰임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는데 지환은 그 정보들로 새희망복지회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치에 대한 설명 말미에 태현은 이것들은 복사본이라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복사본이라니. 원본은 자신이 갖고 있으니 필요하면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지 말라는 건가. 지환은 충동적으로 폰을 들어 태현의 옛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당연하게도 없는 번호라는 알림 음성이 들려왔다.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신태현은 왜 지환에게 이 자료들을 보낸 것인가. 심지어 숙소 문에 붙이고 갔다니 얼마나 대단한 배포인가.
이걸 다른 사람들은 보더라도 모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센터 내부에 숨어서 눈과 귀가 되어 줄 자가 있는 것일까?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자를 심을 수 있을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지환의 손에 들어왔다.
신태현이 지환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환은 자신에게 굴러들어온 귀중한 패를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센터 내의 모든 cctv를 이 잡듯이 뒤진 것이었다. 어떤 새끼가 자신의 숙소 문 앞에 이것을 가져다 놓았는지 알면 신태현의 꼬리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파일에서 약 3초간의 영상이 끊겨 있었다. 전파 흐름 때문에 이런 일이 잦다고 해도 매우 공교로웠다.
어쩔 수 없이 지환은 태현이 준 정보들을 토대로 새희망복지회를 쫓아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실장이니 호영을 빼내와 무언가 더 알아보는 것도 중요할 터였다.
그렇게 시작한 추적의 끝에서 지환은 민재와 마주했다. 기나긴 그의 끈질김이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