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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29)화 (13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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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면서 민재는 문득 묘한 낯섦을 느꼈다. 지환과 마주친 곳은 분명 에스퍼들을 가둔 장치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전 까마귀에 갇힌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크게 흥분했던 지환이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민재만을 바라보고, 쫓고 있었다. 민재는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너 봤어?”

무얼 말하는 거냐는 듯 지환의 눈이 깜박였다. 민재는 망설이다 다시 덧붙였다.

“그 장치들.”

지환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어디까지 알고 온 거예요?”

지환은 민재에게 몸을 살짝 붙이며 속삭였다. 계단은 빈 공간이었고 쉽게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지환은 입은 민재의 귀 가까이에 바싹 붙다시피 했다.

“…넌 어디까지 아는데?”

민재의 질문에 지환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민재가 지환으로부터 한 번도 볼 일이 없었던 종류의 얼굴이었다. 무언가 만족스러운 얼굴. 민재는 그가 알지 못하던 얼굴을 가진 지환을 목격하고 조금 불안해졌다.

“뭐야?”

지환은 민재의 허리춤을 살짝 안아왔다. 그러고는 가볍게 몸을 띄웠다. 민재가 중심을 잃어 휘청거리자 지환이 자신의 품으로 민재를 바싹 고쳐 안았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요.”

지환은 지상으로 몸을 띄운 채 층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민재가 처음 도착했던 1층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자 꽤 큰 철창문으로 지하가 가로막혀 있는 것이 보였다. 

지환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문 근처를 훑었다. 아마도 전자 잠금장치나 경보장치를 탐지하는 기계 같았다. 작은 기계에서 붉은 불빛이 일었다. 지문을 인식해야 열리는 잠금장치인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인식 화면을 제외하고는 열쇠 구멍 하나가 문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민재가 고민하는 사이 지환이 몸을 더 높이 띄웠다. 그러고는 민재를 더 바싹 끌어당겨 그의 고개가 자신의 어깨에 닿게끔 했다.

“잠시만요.”

잠시 후, 민재의 뒤통수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스스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이제 됐어요.”

지환의 속삭임에 민재는 고개를 들었다. 지환은 주먹에 무언가를 쥔 채로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민재는 자신의 오른쪽 대각선 위에 있는 작은 카메라 렌즈를 발견했다. 

카메라에 내장된 칩이나 무언가를 망가뜨리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으니 최대한 늦게 발견되길 바라야 했다. 

“다른 층에도 있었어?”

“있는 건 다 제거했어요.”

민재의 물음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름의 각오로 들어오긴 하였으나 민재는 지환이 준비한 것에 조금 민망해졌다. 시골에 있으면서 너무 무뎌졌나. 그렇게 생각하는 민재를 데리고 지환은 다시 문 앞으로 날아갔다. 

역시나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낸 지환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고 돌렸다. 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민재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지하의 내부는 위층과는 조금 달랐다. 바닥에는 전선으로 보이는 굵은 선들이 곳곳에 이어져 있었다. 철제 바닥 위로는 커다란 레일이 몇 줄 연결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레일 위에는 커다란 철제 부품들이 놓여 있었다. 모양새로 보아 위에서 발견했던 캡슐 같은 장치가 제작되는 곳임이 분명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민재는 지환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턱으로 레일 쪽을 가리켰다. 지환은 소리 없이 날아 그쪽으로 민재를 데려다주었다. 

꽤 커다란 부품은 장치의 바닥재로 보였다. 

-뉴 비전 인큐베이터

레일에는 꽤 큰 글씨로 제품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인큐베이터라고?

민재는 잠들어서 갇혀 있던 에스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장치에 민재 또한 잠들어 있었다. 부품들을 살펴보던 민재는 레일들 사이에 기둥처럼 꽤 커다란 기계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을 바라보자 지환이 알아서 그쪽으로 민재를 데려갔다. 

중앙에 있는 기계의 모니터에는 레일에 적힌 것과 같은 문구가 로고처럼 떠 있었다. 민재가 손으로 그것을 건드리려고 하자 지환이 민재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아 제지했다.

지환은 어디서 꺼낸 것인지 얇은 장갑을 민재의 손에 씌워 주었다. 장갑은 민재의 손에 맞게 살짝 조여졌다. 조 박사가 만든 건지는 몰라도 센터에 새로운 물품이 생긴 모양이었다.

민재는 화면을 건드려 보았다. 화면이 전환되면서 곧바로 낯선 이름이 눈앞에 드러났다.

-원점 순환 계획

이상한 제목이었다. 제목 아래로는 이름들이 빼곡했다. 민재가 캡슐의 화면에서 본 것과 비슷한 수치의 숫자들도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민재는 스크롤을 내려 낯이 익은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승규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였으나 그 전에 먼저 민재는 낯이 익은 이름 몇 개를 발견했다. 민재는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환과 눈을 맞췄다.

‘이게 다 뭐야?’

민재가 눈으로 묻자 지환이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민재의 장갑 낀 손을 잡아 올리고는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주호영.

지환은 익숙한 이름 앞에서 손을 멈추었다. 호영이라고? 그 주호영? 

민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의 이름 옆에 있는 숫자들을 확인한 지환은 스크롤을 다시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고는 화면을 종료했다.

“12층인 거 같네요.”

지환이 속삭였다.

호영의 이름 옆 숫자의 첫머리에 적힌 숫자였다. 바로 그렇게 유추가 된다고? 지환이 이렇게 척척 움직이는 것이 이상했다. 

“어떻게 알았어?”

“…아래위 이름들 옆에 시작하는 숫자가 같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공통된 항목 중 위치를 가리키는 숫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걸까. 지환은 속도를 살짝 올려 날기 시작했다. 민재는 몸에 느껴지는 공기의 저항을 느끼며 지환의 예측이 맞기를 바랐다.

***

12층에는 7~8층보다는 적은 수의 장치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래층과 달리 모니터에선 자주 붉은 원이 깜박이거나 하는 등 다른 표시가 보였다. 지환은 민재를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둘은 빠르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영은 눈을 감고 있었으나 무언가 고통스러운지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눈가가 이따금 떨리기도 하는 것 같았다. 

현재 센터에서 실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어쩌다 호영이 이곳에 갇혀 있게 되었단 말인가. 민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장치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민재가 호영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지환은 장치 뒤에 연결된 선들 중 몇 가지를 살피더니 그중 하나의 선에 무언가를 꽂았다. 

민재는 지환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해?”

뭐 하는 거냐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자 지환은 고개를 까딱이며 장치를 가리켰다.

“데려가야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차분한 말투였다. 호영이 갇혀 있는 장치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지환은 몸을 일으켜 모니터를 살피더니 장치 옆에 있는 레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모니터에서는 약하게 경고음이 울렸다. 지환은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장치 하나를 모니터의 스피커 쪽에 부착했다. 그러자 소리가 옅어졌다.

지환은 민재를 바라보았다. 

“…정승규는?”

민재가 물었다. 그도 네가 이렇게 구해준 것이냐고, 혹은 그럴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사람은 돌아왔어요.”

민재의 눈이 커졌다. 기사로 확인할 수는 없었으니 어떤 이유에서건 센터에서 비밀로 부친 모양이었다. 

몸에 문제가 생겼나? 그럴 만도 했다. 계획명뿐만 아니라 제품명 또한 이상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갇혀 있던 몸이니까. 

그러나 똑같은 물품에 갇혀 있던 민재의 몸은 멀쩡했다.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호영을 내려다본 지환이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선배는 날 믿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믿지 않았다면 아까 전 마주쳤을 때부터 지환을 어떻게 하려고 했을 텐데. 그러나 신뢰를 흔드는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민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이상했다. 어째서 지환은 이곳에 있는 것이며, 이 장소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을까. 그리고 저렇게 쉽게 장치들을 해제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지환도 민재에게 같은 의문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환이 무슨 의도로 이곳을 드나들었든 간에 악의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지환은 민재를 직접 해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민재가 알고 있는 지환은 그러했다. 히어로센터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인물. 그래서 은근히 재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신경 쓰이던 사람. 

민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싸늘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속삭이던 것과 다르게 지환의 목소리는 온전히 제 크기를 갖추고 있었다. 당황한 민재는 뒷걸음질을 치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소리를 낸 지환은 태연하게 모니터로 무언가 조작하더니 호영을 한 팔로 둘러업고는 장치의 문을 닫았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가 가볍게 진동했다. 과열될 때 나는 소리처럼 어딘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불길하게 지속되었다. 곧바로 발소리가 들렸다. 

민재가 무언가 행동이 취하기도 전에 지환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민재를 낚아채고는 몸을 날렸다. 

승강기는 멈춰 버렸다. 곧바로 계단으로 향한 둘은 의외의 공간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민재는 지금 자신들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이 건물 내의 인원이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둘의 눈앞에는 평범한 계단이 사라지고 화염과 날카로운 칼날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심지어 군데군데 바닥이 솟구치거나 벽이 가로막히기도 했다. 물론 그 앞에는 뭔가 묻어 있는 것 같은 찝찝한 칼날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지환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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