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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28)화 (12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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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있는 레일을 따라 거대한 로봇팔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재는 장치들 중 하나의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기구는 장치 옆에 부착된 화면들을 하나씩 스캔하는 듯했다. 그리고 어떤 버튼을 조작하기도 했다. 민재는 최대한 숨을 죽였다. 딱 붙은 등 뒤에서 장치의 울림이 느껴졌다. 차가운 감각이 등허리를 파고들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그리고 좀 전의 기계음과 함께 로봇이 멀어졌다. 

공간이 조용해지고 난 후 민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아내는 방법 중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저 캡슐을 열고 한 명의 에스퍼를 깨워 보는 것이었다. 

민재는 가장 먼저 정승규를 떠올렸다. 갑자기 행방을 감춘 에스퍼들 중 유일하게 민재가 알아보기 쉬운 사람일 터였다. 그가 여기 있는지 확인해 보면 뭔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승규를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면 민재가 예상한 대로 새희망복지회가 에스퍼들을 납치했다는 것이 입증될 터였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민재는 천천히 캡슐들을 들여다보았다. 아는 얼굴이 있는지를 볼 뿐 아니라 캡슐에 있는 작은 모니터에 입력된 정보 값이나 그림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니터에는 숫자와 그래프로 보이는 것들이 각각 입력되어 있었다. 만일을 대비한 것인지 항목 내용은 표시되지 않고 화면 안 숫자가 입력된 위치로 알아보는 듯했다. 

정확히 예측하긴 어려웠으나 어떤 것들이 표기되고 있을지 예상해 볼 수는 있었다. 아마도 가이딩 수치나 능력치, 생명 유지용 심장 박동이나 다른 몇 가지를 측정하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 숫자들 중 어느 것이 각 해당 값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프 또한 어떤 것들은 일정 수치를 유지하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상승, 하강 중이었다. 한마디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였다. 

민재가 처음 도착한 층에는 빈 캡슐이 두 개 있었다. 다른 곳을 확인해 보기 위해 민재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곳도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숫자의 크기도 위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래층에는 세 개의 캡슐이 비어 있었다. 빈 캡슐이 어떤 의미일지 고민해 보았으나 바로 떠오르는 게 있지는 않았다. 

그때 민재의 귀에 작은 기계음이 들렸다. 민재는 더 위층도 확인해 보기 위해 빠르게 계단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승강기가 민재가 있는 층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계단 쪽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벽에 등을 댄 뒤 바짝 붙어 섰다.

“인원이 이상하다니?”

“아니, 한 명이 비어.”

“무슨 소리야. 서류랑은 맞아떨어지는데.”

“아니 아까는….”

무언가를 끄는 듯한 바퀴 소리와 대화 소리였다. 

언뜻 듣기에도 둘의 대화 내용 속에 포함된 ‘인원 문제’는 민재와 연관이 있는 듯했다.

민재는 입을 다문 채 호흡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무언가 끄는 듯한 소리는 아마도 조금 전 민재가 눕혀졌던 간이침대일 것이다. 민재가 여기 있다는 걸 확신하지 않는다면 굳이 계단으로 이동하지 않을 거라는 게 현재로서의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상대적으로 미성을 가진 남자가 찝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야. 설사 네 느낌이 맞다고 해도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고,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뭐?”

“생각해 봐. 우리 책임이 되면 곤란하다고.”

좀 더 굵고 거친 목소리의 남자는 그냥 할 일만 해치우자고 곁의 상대를 재촉하는 듯했다. 사람들을 이곳에 데려다 놓는 일만 하는 건가? 그렇다면 현재 이곳으로 운전해온 사람과 민재와 다른 에스퍼들을 옮겼던 사람은 핵심 인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근데 문제가 커지면?”

“알 게 뭐야. 우린 서류에 맞는 수대로 데려다 놓으래서 놓았을 뿐이잖아.”

목소리가 거친 남자가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하자 목소리가 가는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뒤로 무언가 끄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금 멀어지는 듯했다. 아마도 지금 있는 층에 몇 사람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몇 명을 내려놓을까. 민재는 계단 벽면에 적힌 6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6층에는 세 개의 캡슐이 비어 있었다. 나중에 확인이 가능하다면 몇 명이 채워졌는지 알아보면 좋을 터였다.

민재는 한꺼번에 세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8이라는 숫자가 보이자 민재는 방향을 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래의 층과 별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민재는 잭이라는 연구원이 지내고 있을 공간이 몇 층에 있을지 고민했다. 가장 상층이거나 가장 아래층일 확률이 높았다. 

어디부터 향해야 할지, 두 층 아래에 있는 남자들을 어떻게 따돌려야 할지 민재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민재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민재도 느끼지 못했던 기척이었다. 뒤로 상체가 젖혀져 상대의 가슴팍에 기댄 꼴이 된 민재는 재빠르게 몸을 틀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마스크를 착용해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민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자신을 잡아당긴 사람은 박지환이었다. 

지환의 동공이 부풀었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를 알아봄과 동시에 민재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얘가 왜 여기 있어??’

지환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

둘의 소리 없는 대치가 잠깐 동안 이어졌다. 이대로 계속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민재는 섣부르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환이 민재의 팔을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민재는 순순히 그에게 끌려갔다. 지환은 공간의 구석으로 민재를 데려가 장치 뒤쪽에 몸을 붙였다. 민재를 벽에 세우고 자신이 바깥쪽에 선 상태였다.

“…역시. 맞았어.”

지환은 잠시 민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붙들고 있는 손을 움직여 쓰다듬어 보는 것 같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터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민재는 순간 자신이 공식적으로 죽은 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상치 못하게 지환과 마주치는 바람에 깜박 잊은 것이다. 지환이 귀신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지환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잘 보이는 곳이 눈이었기 때문에 민재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묘하게 다정한 듯 사나운 저 눈매는 선이 조금 짙어진 것도 같았다. 반가움과 당혹감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지환과 만나게 된 것이 믿기지 않는 건 민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간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민재는 지환에게 조용하라는 표시로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층에 사람이 있으니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지환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민재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왜 여기 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였으나 거칠고 까슬한 말투였다. 민재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물어야 할 말이었는데 순서를 빼앗겨 버렸다. 

“넌 왜 여기 있는데?”

지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환 역시 민재가 방금 느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물었어요.”

“…찾아야 할 게 있어서.”

민재가 대답하자 어깨를 붙들고 있던 지환의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계속 여기 있던 게 아니란 말이죠.”

지환이 말했다. 계속 여기 있었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민재는 지환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지환이 빠르게 민재의 등을 짚고 밀어냈다. 

“뭐가 오는 거 같아요.”

둘은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느낌상 현재 이 건물에서 사람을 나르고 있는 이들은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위로 오고 있었다. 그러니 아예 내려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민재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지환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꼭 같이 출발한 것처럼.

민재는 조금 전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최상층과 최하층. 그렇다면 이 건물의 지하공간을 찾아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배.”

소리 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민재를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민재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요?”

지환의 목소리에는 묘한 책망이 서려 있었다. 마치 혼을 내는 듯한 말투였다. 그에 민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질문이라기엔 끝이 축축 처지는 말투로 지환이 말했다. 

“어떻게….”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지환이 입을 열었을 때 바로 근방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민재와 지환의 눈이 마주쳤다. 민재는 지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곧바로 계단에서 복도로 향하는 문 뒤의 벽에 딱 붙어 섰다. 지환이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문이 열렸다. 지환이 숨을 참으며 몸을 더 벽 쪽으로 붙이는 것이 느껴졌다. 

민재는 잠자코 옆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소리가 나지 않게 기절시켜야 했다.

뒤통수 하나가 문 옆으로 삐죽 나오더니 아래위를 살펴보는 듯 끄덕였다. 민재는 손을 뻗을지 말지 고민했다.

“…뭐 없다니까. 거참.”

좀 전에 들었던 거친 목소리였다. 혀를 찬 남자는 이내 곧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잠시 후 민재와 지환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넌 여기 왜 들어왔어?”

민재가 물었다. 지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저도 뭐 좀 찾을 게 있어서요.”

지환의 눈빛이 너무 따가워서 찾는다는 것이 자신인지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무언가 찾아야 한다면 그걸 찾으러 가야 할 텐데 지환은 계속 민재만 쳐다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갈게.”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기자 지환이 다시 따라붙었다.

“같이 가요.”

지환이 속삭이듯 말했다.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는 없었다. 민재는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지하를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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