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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25)화 (126/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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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이전과 똑같이 살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호영은 지환이 깨어나자마자 기자를 소집했다. 지환이 무사히 눈을 뜬 것을 발표함과 동시에 더 이상 에스퍼를 향한 혐오 테러를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환의 유명세를 높이고, 강단 있는 실장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리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에 관해서는 센터장도 의견이 다르지 않은 듯했다. 

호영은 아무런 제재 없이 지환이 하던 일에 끼어들 수 있었다. 눈을 떴다던 지환은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으나 며칠간 아주 조용히 숙소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라고 했다. 호영은 굳이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부르거나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지환 대신 정승규를 찾아갔다. 그는 여전히 센터에 소속된 인원이 되었으나 행정실 쪽 업무를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좀 어떠세요?”

호영이 묻자 정승규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좀 낯서네.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검사 결과는 아직인가요?”

변화가 있냐는 질문이었다. 정승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변화 없어.”

능력이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심지어 정승규는 가이딩을 필요로 하는 시기도 거의 찾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지환이가 어떤 걸 물어보던가요?”

호영의 질문에 승규의 얼굴이 의아함을 내비쳤다.

“어… 보고 받지 못했어?”

순식간에 호영의 뒷목이 뜨거워졌다. 

“아뇨. 지환이 그 자식이 보고서를 아직도 서툴게 써서요.”

“아아….”

정승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양새에 호영은 다시 한번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허수아비 같은 실장이라는 걸 스스로 내비친 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기억이 정말 나는 게 없냐. 가이딩 받을 때 어떤 느낌이냐. 그게 다야.”

그와 관련된 정보는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그저 그런 질문이나 하려고 그렇게 자신이 건들지 못하게 했단 말인가. 호영은 승규의 얼굴을 세심히 살폈으나 딱히 켕기는 것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저기, 호영아.”

승규의 부름에 호영이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았다.

“나…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는 거지?”

승규는 호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이리저리해서 일자리를 준다지만 나중에 내쳐질까 걱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오랜 시간 살아왔고, 일을 한 곳에서 갑자기 나가야 한다는 게 두려울 법도 할 것 같았다. 호영은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형도 엄연히 에스퍼인걸요.”

호영의 말에 승규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호영은 그런 그에게서 더 얻어낼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다음으로 호영이 한 일은 지환이 최근 출동했던 곳들의 정보를 샅샅이 살펴보는 일이었다. 얼마 전 지환은 또 여럿의 도망 에스퍼들을 잡아들인 적이 있었다. 한동안은 미친놈처럼 뒤지고 다니느라 건물 몇 개에 손상을 입혀 그것을 보상하는 과정에서 호영이 애를 먹어야 했으므로 똑똑히 기억했다. 

센터장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결과만 있으면 뒤처리를 하는 호영이 애를 먹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삼 일 밤을 꼬박 새웠다. 지환이 잠깐 조용한 사이 누구보다 빠르게 성과를 내야만 했다. 호영은 지환의 정보를 따라 그보다 빠르게 다음 도망자들의 근거지를 찾아내 잡아들여 오고 싶었다. 

호영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지환과 똑같이 움직여선 안 될 노릇이었다. 그는 센터장의 명으로 몇 번 접촉한 적 있는 암시장 딜러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주로 흔적이 잘 남지 않는 무기를 유통시키는 사람이었다.

십오 분 남짓한 시간 내에 공기 중에 흩어져 흔적을 남기지 않는 연막탄과 살상용 마취총을 구매했다. 마취총의 경우 마취제에 독극물을 섞은 것으로 해부할 때 잘 발견되지 않는 특수 레시피가 있다며 딜러가 자랑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소형폭탄을 구매했다. 그는 지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셈이었다.

기회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설비 점검 부족으로 밤사이 화재가 발생했던 건물을 확보한 호영은 조사를 명목으로 그 장소를 출입금지 지역으로 지정했다. 

그 후 호영은 도망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한다는 정보를 인터넷에 풀기 시작했다. 지환처럼 모여 있는 장소를 추적하는 것보다는 함정을 파서 끌어들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까마귀나 새희망복지회에서 쓰는 수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호영은 이내 결심했다. 어차피 지환이나 센터장이 거두어들일 인원이었다. 자신 역시 그러했듯 에스퍼는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의무를 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비교적 아직 어린 아이들이 많을 테니 자신이 인도적 차원으로 데려오는 것이라고 호영은 생각했다. 암시장 딜러에게 얻은 연락처를 통해서 다른 종류의 암시장에도 발을 뻗었다. 

호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이딩 약품 중 일부를 부러 암시장에 가져가 판매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마련한 장소에 관한 정보를 팔았다. 

호영은 연락을 해오는 도망 에스퍼들에게 드문드문 가이딩 약품을 가져다주었다. 호영을 신뢰하게 된 에스퍼들은 주변의 아는 자들을 아름아름 데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지 열흘 남짓 되었을 때는 벌써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에스퍼를 모을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거봐. 박지환도 별거 없다니까.’

호영은 고양감에 젖어들었다. 실장이 된 후로 현장에 나설 일이 조금 줄어들면서 자신감도 떨어졌는데 막상 움직이니 몸에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의 계획으로 무언가 이루고 있다는 것에 대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그 기쁨이 호영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은신처가 있다고 했잖아요?”

“…있어요.”

“거길 보여 주면 믿을게요.”

호영은 삐딱한 자세로 서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는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경계심이 강한 타입인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다니는 거겠지만.

호영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이쯤 되면 한번에 잡아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오늘 자신을 만나러 온 자를 자신이 마련한 은신처로 안내했다. 

“여기서 당분간만 지내면 옮길 수 있게 해 줄 거예요.”

“참 나….”

사고가 있었던 공간이다 보니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거나 숨어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본 남자는 비웃음을 지었다. 호영은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본인 처지가 아직 파악이 안 되나 봐?”

“설치는 놈 하나가 있다기에 뭘 하나 했더니….”

“…뭐?”

중얼거리는 소리가 꽤 음산했다. 호영이 되묻는 순간 눈앞에 둔탁한 타격감이 들었고,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의식의 끈을 놓치는 순간 호영은 남자의 얼굴을 살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검은 눈동자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게 얼굴을 가린 남자는 묵묵히 그를 들어 올렸다. 호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지환은 시체처럼 누워 며칠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잠들어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 동안 지환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자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민재의 추모식이 망쳐졌단 사실이었다.

지환은 몸을 일으켜 센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민재의 추모식 행사가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민재가 오지 않은 것이 맞는지도 확인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새끼가 간이 부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건지 알아낼 심산이었다.

우민재는 센터를 대표하는 에스퍼였다. 지환에게 모질었다거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지환이 아는 우민재는 그랬다.

가짜라고 하더라도 우민재의 추모식이 망쳐졌다는 사실이 지환을 화나게 했다. 

역시나 센터장은 보기 좋게 포장해 지환의 희생정신에 대해 언론에 나불거려 놓았다. 덧붙여 센터를 향한 혐오를 멈추어 달라는 호소까지 늘어놓은 상태였다. 호영도 지환을 들먹이며 손 놓고 있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지환이 정말로 예뻐서 그러지는 않았을 터였다. 뭐가 그렇게 내세우고 싶은 게 많은지 모르겠으나 이미 그런 논란들로 인해 정작 일을 벌인 범인 색출은 묘하게 흐지부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환은 씻고 면도를 한 후 사람 꼴을 한 채 곧바로 행정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있는 정보관리 팀장에게 다가갔다.

“추모식 사건 정보 정리 건 저한테 파일 주세요.”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그러자 팀장은 지환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어! 지환 팀장. 몸은 좀 어때?”

“네, 좋습니다. 파일 주세요.”

지환은 그의 앞에 손을 들이민 채였다. 그러자 행정 정보관리 팀장은 조금 애매한 얼굴을 했다. 

“그게… 이거는 그 에스퍼 실장님이 자신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해서 정보나 증거자료가 그쪽으로 갔어. 아직 나도 정리된 걸 받지 못했거든.”

사고가 난 지가 언젠데 아직 정리가 안 되었다니 웃기는 소리였다. 지환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주호영 에스퍼가요?”

“어… 어… 그래.”

단호한 호칭에 정보관리 팀장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긍정해 보였다. 

“그럼 해당 당일 영상 자료 있으면 그거라도 모아서 좀 보내주세요.”

지환의 말에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사가 여기저기 나갔으니 짧게라도 촬영된 영상은 곳곳에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한숨을 내쉰 지환은 가이딩실로 향했다. 우석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얼굴로 지환을 맞이했다.

“드디어 밖에 나왔네.”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올 지경인 우석은 지환의 상태를 눈으로 슬쩍 살폈다.

“은정이가 걱정 엄청 했어. 만났어?”

“…아뇨. 근데 주호영 어디 있는지 아세요?”

“…호영이? 글쎄… 요새 바쁜 거 같던데. 자꾸 출장 나가고.”

꼴에 사건을 조사한다고 바쁜 척을 하는 건가. 그런데 무얼 하기에 아직 실마리도 제대로 못 찾았단 말인가.

지환은 호영의 무능함을 탓하며 곧장 가이딩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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