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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24)화 (12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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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살을 에는 고통을 느꼈다. 조금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천천히 기억이 돌아왔다.

지환은 폭탄을 제거하려고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폭발의 여파를 그대로 몸으로 느꼈다. 찰나는 고요했다. 먹먹한 귀와 온몸을 때리는 어떠한 충격과 함께 그는 정신을 잃었다.

지환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민재와 비행시연을 하다 격추당했던 날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민재가 그의 몸을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지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생각했다. 당신도 그 날, 이렇게 아팠을까?

순식간에 아문 상처의 흔적들을 보면서 민재의 아픔을 헤아려 보려고 애를 썼던 순간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부질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간단한 문제였다. 그도 겪어보면 되는 것이었다.

의식이 선명해졌다가 흐려졌다를 반복했다. 우석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그로 인해 자신이 센터에 도착했다는 걸 인식했다. 그러나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을 가이딩 하기 어려워 아무도 그의 곁에 오지 않을 터였다. 우석이 가이딩 하는 시늉을 하고 다른 이들이 오기 어렵게끔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선뜻 다가와 가이딩을 하고자 하는 용자도 없을 거라고 지환은 생각했다.

고통의 속도는 괴이했다. 빠르면서도 느릿하게 지환은 좀먹었다. 그 안에서 시간을 가늠해보다가 어쩌면 민재가 자신을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민재 선배는 마음이 여리니까. 어떻게든 자신을 치료하러 올 수도 있었다. 저번처럼 갑자기 바닥이나 천장에서 흰 빛이 생성된다거나.

하얀색은 지환에게 민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민재의 피부는 창백하다고 할 만큼 흰 편이었는데 그것이 그의 능력과 꼭 닮아 있었다. 흰 빛을 뿜어내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때에는 그의 생명력을 꺼내놓는 듯해서 뜯어말리고 싶기도 했다.

지환은 귀를 기울였다. 여러 기척들 사이에서 민재의 것이 없을지 찾고 있으면 고통이 조금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환은 조금씩 의문을 품었다. 혹시 자신이 다친 일이 비밀로 부쳐졌나? 그래서 민재 선배는 모르나?

몸이 조금씩 덜 아파질수록 지환은 혼란스러워졌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둔탁하고 뻣뻣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외에 느껴지는 고통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을 때 지환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텅 빈 공간과 마주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니 우석이 안으로 들어오다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 너 언제 일어났어? 괜찮아?”

우석이 물었다. 지환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는요?”

지환이 물었다.

“어?”

우석의 눈에 의문이 찼다. 지환이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하나였다. 이제 그는 센터에 있는 그 누구도 선배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니 지환이 묻고 있는 사람도 하나일 터였다.

우석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기억이 나?”

혹시 기억상실인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 반응에서 지환은 깨달았다. 민재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6일.”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환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기사 나갔어요?”

“아무래도 폭탄이 터진 장소가 그랬으니까. 나갔어.”

우석이 조금 난처한 기색을 표하며 답해주었다. 그렇다면 민재가 이미 그의 상황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환은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능성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우민재가 센터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떻게든 머물게 하고 싶다던 자신의 다짐은, 끝까지 찾겠다던 서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지환은 도망자를 잡아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민재를 혼자 무너지는 건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원망을 품은 채 그는 계속해서 도망자들을 센터로 데려왔다.

민재 선배가 도망자라면?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능했다. 지환이 현재 일을 하는 방식은 대부분 민재에게 배운 것들이었다. 그라면 이렇게 긴 기간 센터로부터 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저기. 네가 이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지만 하긴 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이거 몇 갠지와 시야가 흔들리는지 말해봐.”

우석은 지환의 근처에서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시야는 흔들리지 않고 선명했다.

“세 개요.”

지환은 그 숫자를 말하며 끔찍한 사실을 확인하고 말았다.

그는 버려졌다.

지환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민재가 지키지 않은 약속이라고 해서 그도 지키지 않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지환은 약속대로 끝까지 그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센터에 다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원래 그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

민재는 동이 틀 때까지 어둠 속을 걸었다. 흐린 윤곽들 사이를 지나는 감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따금 지치는 것 같으면 몸에 힐을 사용하고 태현에게 받은 약을 삼켰다.

효과가 확실한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그러면 몸 상태가 좀 회복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점차 밝아졌고, 민재는 풀과 흙이 많은 곳에서 시멘트로 이루어진 사각의 건물들이 많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그는 조금 큰 도로에 다다른 뒤 가장 먼저 그의 근처를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러고는 센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명을 불렀다.

도시에 도착한 민재는 우선 적당히 허름한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 채널을 훑기 시작했다. 지환의 상태에는 별 변화가 없는 듯했다.

민재의 추모식에서 일어난 일이니만큼 방송에서는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뭔가 소득이 있으려나 싶어 채널을 계속 돌리던 민재는 떠들어대는 헛소리에 지쳐 전원을 텔레비전을 껐다.

민재는 지환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깨어난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민재는 지환이 깨어나기만 하면, 하고 되뇌었다. 가능한 한 계속해서 그와 관련된 기사를 확인하면서, 민재는 지환의 흔적을 쫓았다.

가장 먼저 가 본 곳은 민재의 추모식이 있었던 공간이었다. 검게 그을린 공간은 아직 완전히 치워지진 않은 상태였다. 조사나 수사가 진행 중인지 접근 금지 표식이 있었다.

건물 외벽만 봐도 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리거나 부서진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아예 무너진 상태는 아니었다. 민재는 해당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서서 그곳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이따금 힐끔거리며 자신이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폭탄의 위력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부상자는 나왔으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센터장은 이번 일로 공식적인 인터뷰를 했다. 그가 아들처럼 생각한 에스퍼의 추모식이 이렇게 되다니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라 가증스러운 연기는 여전히 잘했다. 그는 정말로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빠르게 지워야 했다면 말끔해져 있었을 현장이었다. 그러나 상징처럼 계속해서 방치되고 있다. 이건 어쩌면 센터장의 의도일 수도 있었다. 겉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 광경을 계속 노출시키는 것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동정 여론을 잘 이용해보자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덕분에 에스퍼 신분이 아닌 민재도 현장을 조금은 살펴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민재에게 지금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이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소형 폭탄 몇 개로 겁을 주는 느낌의 현장. 테러로 보는 것이 맞겠지만 의도가 무엇일지 민재는 조금 궁금해졌다. 히어로 우민재를 추앙하는 존재도 있지만,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존재도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우민재를 추모하는 게 싫어서 폭탄을 설치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센터의 대표 에스퍼인 박지환이 중태에 빠질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폭탄이었다.

신문 기사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폭탄 쪽으로 몸을 날린 지환 덕에 사상자가 없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다면 원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 폭탄이었는데 지환이 대신 여파를 맞음으로써 해결이 된 걸까?

의문점들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민재는 계속해서 조금씩 지환의 흔적을 쫓아 거슬러 올라갔다. 기사를 통해 지환이 출동했던 현장들을 찾아가보았다.

외부에 공개된 장소들은 대부분 ‘구조’가 필요한 곳이었다. 그 외에는 그저 지환이 도망자를 몇 명을 센터로 잡아들였다거나 현장 조사 과정에서 건물에 손상을 입혔다는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민재는 지환이 손상을 입힌, 혹은 괴담처럼 목격담이 떠돈 공간을 찾아 다녔다. 중간에 정보가 필요하면 아무 피시방이나 들어가 검색을 하다가 해당 장소를 찾아다니고, 적당한 모텔을 옮겨 다니며 묶었다. 지환의 흔적을 쫓다보면 그가 찾는 정보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환이 뒤집은 현장들을 보면서 민재는 그가 생각보다 좀 더 본격적으로 새희망복지회를 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희망복지회의 근본적인 의도는 무엇일까.

까마귀는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에 알기 쉬운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묘하게 숨어서 움직이고 있어 보다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태현은 잭이 민재를 죽이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자는 민재가 죽었다고 알고 있을 테니 무언가 알아보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새희망복지회가 정확이 무엇이든 민재의 과거와 연관이 있다면 그것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일 년 만에 눈을 떴던 곳으로 다시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분명 그 근방에 좀 더 핵심적인 공간이 있을 것이다.

회색으로 뒤덮인 공간처럼 공장 건물들이 길게 이어져 있는 곳. 다시 그곳에 도착했을 때 민재는 지환이 회복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민재는 그 기사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민재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서서히 밀려드는 안도감과 함께 맥이 풀렸다. 민재는 그제야 자신이 꽤나 긴장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나 지환이 깨어났다고 해서 지금 당장 민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찾아가 보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불가능했다. 민재는 그 사실에서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무력감을 느꼈다.

지환이나 우석에게 몰래 연락을 취할 방법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재는 어쩐지 두려워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지워진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맞는 선택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민재는 건물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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