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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은 산소 호흡기를 한 채로 누워 있는 지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박지환은 폭주 위험이 강해 출장 의사가 응급처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센터 내 민재가 자주 이용하던 병실에 누워 있는 지환은 우석만이 주기적으로 들어가 가이딩을 했다. 가이드실 분위기가 공포에 질린 것처럼 고요하고 숨이 막혔다.
“좀 어때요?”
호영은 우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우석은 호영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진 않을 거 같은데 회복이 조금 더디네….”
호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나온 호영은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뻑뻑한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폰으로 오늘의 새로운 기사들을 확인했다.
지환이 깨어나지 않은 지 3일째였다. 온갖 신문사의 1면은 히어로 박지환의 이름으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센터에 대한 부정보도도 쏟아졌다.
현 실장과 과거 실장을 비교하는 기사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호영이 생각했던 대로 센터와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동정여론이 짙어지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센터의 이미지가 실추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호영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센터장이 원하는 바는 더더욱 아니었다. 호영은 분노를 삭이며 폰을 책상에 대강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바라는 게 뭐 그렇게 많아.”
호영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 실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을 때는 좋았다.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센터장의 측근이 되는 것도, 실장 자리를 꿰차게 된 것도 마냥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맡게 된 자리가 실장이 아니라 센터장 노예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 센터로 납치되었던 에스퍼인 정승규가 능력을 상실한 채 돌아와 센터 분위기도 침체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능력을 잃어버리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한때는 호영도 센터 밖에서 평범하게 지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능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마음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승규 선배는 센터에 남게 해달라고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가 그러는 편이 호영에게도 편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어졌지만, 센터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그를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센터장이 곱게 내보내줄 리도 만무했다.
어찌 되었건 관련된 일들은 모두 지환이 저 혼자 마음대로 처리해 버리고는 통보하듯 호영에게 알려준 사안들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어떻게 시비를 걸어 보려고 해도 지환의 결정을 센터장이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한 눈치라 어쩔 수가 없었다. 호영은 자신의 입지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힘은 주지도 않으면서 무슨 일만 터지면 왜 그렇게 실장 탓을 해대는지. 의무와 책임은 모두 호영의 것이었으나 덕과 영광은 모두 박지환에게 돌아갔다.
망할 S급. 그 등급 앞에서 호영은 언제나 초라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지환은 알까? 우민재 선배는 알았을까?
어떤 때의 호영은 나름 다정한 선배였던 민재가 그리웠다. 그러나 어느 날에는 지금처럼 불쑥 이는 분노와 원망을 견디기 힘들었다.
우민재 또한 센터의 대표적인 영웅이었기에 행정업무 전반을 맡아 하진 않았다. 그런데 왜 호영이 그와 비교당해야 한단 말인가.
호영은 이제 묻히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최근에서부터 지환에 관한 기사들을 되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박지환이 표면적으로 가장 활약하는 부분은 바로 ‘새희망복지회’를 쫓는 것이었다. 언론에는 단체명이 드러나지 않도록 되어 있으나 지환은 납치된 에스퍼 추적과 도망자 에스퍼를 센터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가 센터에 데려오는 에스퍼 수가 크게 늘 때면 센터가 매우 잘 굴러가는 것처럼 꾸며낼 수 있었기 때문에 센터장은 좋아했다.
호영은 센터장도, 지환도,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공을 세우고 싶었다.
호영은 지환이 돌아다녔던 곳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 추적 작업이라면 그라고 못할 것이 없었다. 애초에 박지환의 머리가 뛰어나서 S급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센터에 더 오래 있었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자신이라면 지환이 하는 것은 모두 할 수 있을 터였다.
***
오준은 센터장이 주는 눈치를 못 이겨 다시 가이드실로 내려와야 했다. 지환이 누워 있는 시간이 5일을 넘기면서부터 김진성은 계속 날카로워졌다.
때문에 오준은 틈만 나면 가이드실로 가 지환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상처들이 조금씩 옅어져 현재는 거의 멀쩡해진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태를 확인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준은 하루에도 몇 번씩 똑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지환을 살펴야 했다.
지환의 병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릴 수 없었기 때문에-우석이 금지했다- 조금 먼발치에서 슬쩍 들여다보는 것이 다이기도 했다. 어차피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전해질 텐데 매번 우석에게 부탁해 내부를 점검하는 것도 미안해 오준은 슬쩍 확인하고 보고를 하곤 했다.
이번에는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여은정 에스퍼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은정은 힘없는 목소리로 오준에게 인사했다. 키가 보통 사람에 비해 많이 큰 편인 은정은 원래 근육질의 몸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며칠 사이에 아주 기나긴 막대과자가 된 것만 같았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우석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석의 경우 지환을 민재만큼이나 아끼는 건 아닌 것 같았으나 저번처럼 동료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래도 많이 호전되어 보여요.”
오준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보이나요?”
그러자 은정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눈에 봐도 상처는 많이 줄었으나 그녀는 타인에게 확인받고 싶은 것 같았다. 오준은 그런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
우석이 오준과 은정을 발견하고는 걸어왔다. 꽤 퀭한 연인의 얼굴을 보며 오준은 한숨을 삼켰다.
“선배 나는… 민재 선배가 되게 인기가 많은 줄 알았는데.”
은정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사람의 추모식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여러모로 감정적인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안티도 많았으니까.”
우석도 힘없이 웃으며 받아쳤다.
“근데 왜일까. 장례식 당일도 아니고 굳이 추모식에 말이야. 민재 선배가 추모를 받으면 안 될 정도로 뭐 잘못한 게 있다고. 마치 딱 준비해 놓은 것처럼….”
은정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의 턱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오준의 머릿속에 작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 추모식이 어디에서 열릴 것이라는 공지가 나갔을 때는 이미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그때는 관계자 외에는 그 장소에 드나들 수 없게끔 조치가 취해져 있어야 했다.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장소를 추천한 오준도 용의선상이나 책임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오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선은 올라가서 좀 괜찮아지시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릴게요.”
오준은 적당한 인사말을 내뱉고는 뒤를 돌아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혹시 주 실장이 센터장에게 말했으려나? 지금 박지환 에스퍼가 일어나지 않는 문제를 내게 떠넘기는 건가?
그렇다기엔 굳이 이런 식으로 압박을 줄 이유가 없었다. 센터장이라면 그저 분이 풀릴 때까지 오준에게 난리를 피우면 끝날 일이다. 주 실장은 센터장에게 몇 번 와서 깨지는 것 같았으나 오준은 따로 부르지 않았으니 생각보다 그 실장이 입이 무거운 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니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주최하는 선배의 추모식에서 폭탄이 터졌고, 자신이 관리하는 에스퍼가 크게 다쳤다. 그로 인해 상사에게 엄청나게 혼이 나기까지 했다.
오준과 주 실장은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다. 마주쳐야 할 때 기계적으로 묵례를 하거나 날씨에 관한 이야기나 어색하게 주고받는 것 외에 딱히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요 며칠 간의 난리 통 속에서 주 실장은 한 번도 오준을 의심하지 않았다. 콕 집어 오준에게 따지진 않더라도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챈 것이 없었냐고 묻는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꼭 준비해 놓은 것 같다는 은정의 말이 오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와 동시에 오준은 호영으로부터 받았던 메일에 있던 의미를 알 수 없는 x표시를 떠올렸다.
“설마….”
오준은 빠르게 폰을 꺼내 추모식 사건 관련 기사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센터장에게 보고를 올려야 해 이미 살펴 본 내용이었지만 한 번 더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역시 폭탄의 위치나 현장의 세세한 정보는 알 수 없었다.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폭탄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지환이 깨어나면 묻는 것이었다. 오준은 비서니 현장에 있었던 에스퍼 아무나 붙잡고 폭탄 위치를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우석에게 부탁하려니 자신이 괜한 말을 해 일을 벌이게 될까 걱정이 되는 것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준은 불안함을 느꼈다. 그의 팔목에 돋은 소름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준은 오돌토돌한 팔을 계속해서 손으로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