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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22)화 (123/181)

122

“내가 찾지 않는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닐 텐데.”

한동안의 침묵 끝에 민재가 입을 열었다. 악어가 제안하는 것이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우민재는 센터를 대표하는 셈에 드는 에스퍼는 맞았지만, 그가 곧 센터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돌아가면 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꿰찰 거 아니야?”

악어가 물었다. 있어야 할 자리라.

“그건 장담 못해.”

“너 센터로 돌아가지 않을 셈이야?”

민재가 답하자 두더지가 악어의 뒤에서 고개를 슬쩍 내밀며 물었다. 민재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으나 답을 하진 않았다. 아직 그 스스로도 결론이 지어지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민재는 다른 질문을 했다. 악어는 잠시 고민하다 약간의 답을 주었다.

“따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들은 게 있어. 네가 센터에서 어떤 존재인지.”

애매한 말이었다. 민재의 미간이 좁혀졌다.

“빙빙 돌리지 마. 어차피 더 숨긴다고 뭐가 나아지지도 않으니까.”

악어는 민재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어렸을 때부터 센터에서 하라는 대로 사람을 치료했지 않아? 그리고 너도 스스로를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 잦았고.”

민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때는 자신이 치료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아파 보여서 치료해줬다. 그러지 말아달라고 민재에게 말하던 사람에게도. 민재는 그게 옳은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나서야 민재는 깨달았다. 자신이 비밀리에 치료했던 이들은 센터장의 지시 아래 심문을 당했거나 문제가 있어서 흔적을 지워야 하는 경우였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청소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민재는 한동안 환청에 시달렸다.

“죽여줘. 제발.”

“살려줘!!!”

누군가는 죽여 달라고 했고,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했다. 민재에겐 그것이 모두 살려달라는 말로 들렸다. 그랬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민재는 죽음과 삶에 점차 무감각해졌다.

“…뭘 갖고 있는 건데?”

민재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 있었다.

“파일.”

악어의 답은 간단했다. 그는 민재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민재의 눈앞에 아주 익숙한 물건이 놓였다. 주사기였다. 다만 안에 조그마한 칩이 들어 있다는 점이 색달랐다.

“잭과 무슨 관계였는지 말해주는 게 먼저 아냐?”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조금 격한 어조였다. 민재가 말하자 악어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땐 나만 발현했을 즈음이었어. 그 사람은 센터로부터 도망쳤다고 했고, 낡고 좁은 우리 집에 뜬금없이 찾아와서 꽤 길게 머물렀어.”

“….”

“엄마의 오래된 친구라고 했는데. 우릴 친근하게 대했어. 그러다 우연히 내 능력을 보게 되었고. 그는 나한테 센터로 가면 위험할 거라고 경고를 해줬지.”

“…뭐라고.”

무엇을 되묻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민재는 되물었다. 경고를 했다고. 센터에 대해서. 뭐라고?

“그곳에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센터로 보내지 말라고 엄마한테 당부도 했어. 가이드를 찾으면 될 거라고. 그 사람이 조금 훔쳐온 소량의 가이딩 약도 받았어.”

“하.”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끔찍한 일들. 잭이라는 인간은 연구실에서 꽤 핵심적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장치 개발에 관심이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민재를 실험했을 때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민재를 해부하고 싶어 했던 인간이 다른 에스퍼는 숨겨주려고 했다니. 그 사실은 민재에게 묘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능력이 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등급이 높아서?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냥 운이 없어서?

어쩌면 민재는 이들과 비슷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민재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평화를 조금 더 일찍 배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곁에 있던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아마도 엄마가 그를 숨겨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던 것 같아.”

민재는 억울함을 느꼈다. 무엇이 억울한지는 정확히 짚어 말할 수는 없으나 그는 화가 났다. 그것을 어딘가에 쏟아붓고 싶었다.

“…넌 에스퍼가 뭐라고 생각해?”

민재가 물었다.

“…뭐?”

악어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듯 되물었다.

“갑자기 능력을 쓰게 된 거잖아. 너도, 다른 이들도. 누구는 변종이라고 하고, 누구는 악마라고 하고, 누구는 신이라고 하고, 누구는 신인류라고 하잖아.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해?”

“…그냥. 초능력을 쓰는 사람?”

악어의 답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민재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내릴 수 없던 결론을 그는 이렇게나 쉽게 내리고 있었다.

악어의 대답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사람으로, 민재는 괴물로 컸다. 그래야만 했다.

민재는 잠시 말없이 악어와 토끼와 두더지를 바라보았다. 뉴스의 앵커는 아까부터 비슷한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박지환이 위험하고, 센터가 위험하다고.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늘 위험투성이였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더 알려줄 정보도 없으니 앵무새처럼 비슷한 말만 늘어놓느라 저 앵커도 피곤할 터였다.

민재는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을 센터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악어의 예상대로 민재는 그의 거래를 받아들일 터였다.

“보여줘. 네가 가진 패.”

민재가 말했다.

***

악어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가방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 안에 있던 낡은 노트북 하나를 꺼내 민재의 앞에 펼쳤다.

그는 주사기에서 칩을 꺼내 작은 부품과 연결하더니 그것을 노트북에 꽂았다. 그러자 영상 파일 두 개가 있었다.

두더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악어의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았다. 토끼는 악어의 눈치를 보더니 민재 쪽으로 와 가만히 앉았다. 그녀는 처음 보는 것일 터였다.

민재는 영상 중 하나를 재생했다.

익숙한 공간이 민재의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보다 몸집이 작은 그는 철제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몇 명이 들어와 그의 상태를 확인하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는 민재의 몸을 뒤집기도 하고 작은 봉으로 무릎이나 손을 가볍게 내리쳐 보기도 했다.

“아니야….”

영상 속의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꼬대를 하는 듯 무언가 계속 웅얼거렸고, 연구원 몇 명이 그의 말을 들으려는 듯 그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죽은 듯이 잠을 자던 그가 눈을 떴다. 그러나 어딘가 초점이 없는 흐린 눈을 한 채였다. 눈을 뜬 그는 코앞의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2차 성징이 다 끝나지도 않은 어린 남자아이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악력이었다. 한 손으로 눈앞의 연구원의 목을 틀어쥔 민재는 그를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연구원은 벽 쪽으로 처박혀 캑캑거렸다.

민재의 눈이 카메라 렌즈 쪽을 향했다. 여전히 초점이 없는 채였다. 그리고 이윽고 굉음과 함께 연구실 안이 암흑으로 뒤덮였다가 곧장 화염에 휩싸였다.

유리가 깨지고, 벽이 군데군데 파손되었다. 끝없이 분노를 쏟아내듯이 무언가 작은 민재의 몸에서 나와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그 와중에도 은은한 흰 빛에 둘러싸여 있는 민재의 몸은 온전했다. 영상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앞과 뒤가 잘린 버전인 것 같았다.

“헉….”

토끼가 작게 놀라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는 민재를 힐끔 바라보았다.

머릿속 깊은 곳에 버려두었던 순간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기묘했다. 영상 속의 그는 정말로 위험하고, 끔찍한 존재처럼 보였다.

갑작스레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해버리는 미치광이 같았다. 민재는 무감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른 영상을 재생시켰다.

의외의 얼굴이었다. 센터장이 연구실에 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에서 코피가 흘렀다. 잠시 뒤 잠에서 깬 센터장은 꽤 당황한 듯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고는 나갔다.

“…이건 뭐야?”

민재가 물었다. 잭이 중요한 파일로 분류한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이건 잘 몰라. 근데 같이 있었어.”

악어가 설명했다. 굳이 준비해뒀으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센터장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 영상이 가지고 있는 중요도가 더 클 수도 있었다.

“네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다가 눈치를 채게 된 것이 있었어. 센터가 너에게 어떤 실험을 진행했고, 그게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었다는 점이었지.”

“…그건 맞아.”

단순히 영상만으로 모든 것을 유추해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센터에 관해 경고를 했다고 했으니 무언가 이야기를 더 흘렸을 수도 있었다. 민재는 악어의 말에 긍정했다.

“…어떤 실험이었어?”

악어가 물었다. 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어떤 의도로 진행한 실험이었는지 묻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 진행되던 실험인지 묻는 걸까.

민재는 말없이 노트북에서 칩을 빼냈다. 그러고는 칩과 부품을 챙겼다.

“어쩔 셈이었어?”

민재가 물었다.

“센터에 몰래 침입할 방법을 찾아서 정보를 더 찾고, 확실해지면 전부 다 밝히려고 했어.”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걸 밝히면 사람들이 다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이지 민재 앞의 이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팠어요?”

토끼가 민재의 옷소매를 잡아오며 물었다. 동그란 눈이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이 담긴 눈동자였다.

민재는 순간 센터의 건물을 떠올렸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를 생각했다.

그는 죽었다 깨어나서, 센터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센터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센터에 있다고 해서 딱히 정의감으로 사람을 구하는 에스퍼들만 있는 건 아니야.”

민재는 손을 올려 토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토끼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지 못하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딱히 정의감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런 것이 그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민재는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찾지 않는다는 거지 숨겨준다는 건 아니야.”

민재가 말하자 악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자신이 사용하던 방으로 들어가 외투와 가방을 챙겨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칩과 부품을 휴지에 싸서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시골길이 어둠에 집어삼켜져 있었다. 뜨문뜨문 이어지는 빛을 바라보다 민재가 바깥으로 나섰을 때였다.

“야.”

두더지가 헉헉거리며 민재 쪽으로 뛰어왔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민재의 손목을 잡았다.

“…당분간은 폰 버리지 말고 혹시 많이 아프면 나한테만 연락해.”

가이딩을 해주겠다는 말 같았다. 연락할 일은 없을 테지만 민재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더지는 잠시 뒤에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 달려갔다. 민재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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