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지환은 우석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갑자기 열리는 문에 무언가 살피고 있던 우석이 놀란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우석이 물었다. 지환의 표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센터 내 에스퍼들 명단 좀 주세요.”
“어…?”
“능력이랑 등급까지 다 적힌 걸로요.”
“왜?”
“필요해서요.”
우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지환에게 명단을 건네주었다. 지환은 우석의 바로 앞에 걸터앉아 서류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현재 센터에 있는 힐 능력자는 한 명이었다. B와 C등급을 오가는 사람.
“이 사람 센터 언제 들어왔어요?”
지환은 그 이름을 가리키며 우석에게 물었다. 그의 이름과 능력을 확인한 우석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왜?”
“언제 들어왔냐고요.”
“…얼마 안 되었어. 얼마 전이 첫 투입이었고.”
지환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땅에서 솟아오른 흰 빛과 지혈까지만 긴급처치 된 흔적 때문에 그의 팔에는 여러 곳에 딱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있던 현장에 있었단 말이에요?”
“어. 무슨 일 있어?”
지환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분명 맞는 것 같았는데. 정체를 숨기고 싶은 듯 지혈까지만 하고 가 버린 것도 그렇고.
“가이딩할 때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뭔가 다른 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지환의 질문에 우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에스퍼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든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다. 민재가 그에게 힐을 해 줄 때 느껴지는 어떤 다른 것이었다.
“뭐 약간 다를 수는 있지. 근데 우선 상태가 더 잘 느껴져. 좋다, 안 좋다. 그런 거.”
우석이 설명을 덧붙이자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
우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환은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밖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얼마 전 센터에 들어왔다는 힐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를 찾았다.
지환이 수소문 끝에 급식실로 들어서자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하는 에스퍼들이 생겼다.
“김철수?”
지환이 작게 그 에스퍼의 이름을 부르자 중앙 쪽에 무리 지어 앉아 있던 에스퍼들이 모두 한 명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곧장 그곳으로 걸어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 알지?”
“네… 네….”
철수는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움츠린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고개를 까딱이며 바깥쪽을 가리켰다.
“잠깐 보자.”
헉.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지환의 등장에 급식실은 공기가 싸늘해진 지 오래였다. 철수는 울상인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지환을 따라나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지환이 센터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공간으로 철수를 데려가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며칠 전에 첫 투입되었던 곳 있잖아. 거기서 능력 사용했어?”
“네. 네. 그 커터 근방에 있던 시민분들 한둘 계셔서 좀 베인 상처에 사용했어요.”
“나는?”
“네?”
지환의 질문에 철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한테 능력 사용한 적 없냐고.”
“어, 없는데요.”
지환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그는 잠시 철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를 잡고 다른 곳으로 밀었다.
“훈련장 가자.”
훈련장으로 향한 지환은 철수의 앞에서 작은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팔뚝에 앉아 있는 딱지를 긁었다.
“어??”
철수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치료해 봐.”
지환의 말에 철수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지환은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지환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추측하고 있는 것이 맞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철수는 지환의 팔 쪽에 손을 뻗어 힐을 사용했다. 흰 빛은 민재의 것과 똑같았다. 그렇게 깊게 베인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는 속도도 민재가 힐을 사용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환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길에서 자신을 치료한 에스퍼는 김철수가 아니다. 무언가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내 발밑에 광역으로 사용해 봐.”
지환이 말하자 김철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광역으로요…?”
“왜?”
“저 국소 부위 제외하고 한 번에 큰 영역에, 그것도 땅에 힐 사용하는 건 할 줄 모르는데요.”
할 줄 모른다고? 순간 지환의 표정이 철수의 것과 비슷할 정도로 멍해졌다.
“보통 힐은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발생시키기가 편해서 무생물에 사용하려면 힘이 배가 들 거예요. 범위가 클수록 힘들고요.”
그러니까 자신의 능력보다는 좀 더 힘이 많이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였다.
지환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환희와 절망이 동시에 지환의 머릿속을 울렸다.
‘민재 선배가 날 구하러 왔어.’
그 날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몸을 치료한 것은 우민재가 맞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체를 숨기고 싶어 했고, 정말 급한 조치만 취해 준 다음 사라져 버렸다.
“알겠어. 가 봐.”
지환의 말에 철수는 잽싸게 훈련장을 나갔다. 혹시 다시 부를까 봐 두려운 기색이었다.
지환은 훈련실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민재 선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그는 왜 센터로 돌아오지 않는가.
그가 사라진 일 년간 지환은 그를 알아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근데 우민재에 대해 조금 알겠다 싶으면 이렇게 번번이 놓치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지환은 팔뚝에 남아 있는 다른 상처의 자국들을 헤아려 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그가 위험할 때 민재가 자신을 구해주려 했다는 것이었다.
지환은 어떻게 하면 민재를 다시 볼 수 있는지 깨달았다.
***
민재는 베인 손바닥과 풀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는 꽤 오랜 고민 끝에 인정하기로 했다. 민재는 농사일에는 재능이 없었다. 민재는 풀이 생각보다 날카롭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바위를 부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풀을 뽑는 데에 다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두더지가 선심을 베풀 듯 건네는 목장갑을 받았어야 했는데. 풀을 뽑는데 굳이 손을 아낄 필요가 있나 싶어 거절한 것을 민재는 후회했다.
“할만 해?”
“…어.”
두더지가 자신을 보고 안부를 물었다. 민재는 대강 대답하고는 옆에 있는 풀을 하나 더 뽑았다.
“거봐라. 자.”
두더지는 얄밉게 웃으며 민재에게 목장갑을 건넸다. 민재는 조용히 장갑을 받아 들어 착용했다. 두더지가 상처를 보았기 때문에 곧바로 힐을 쓸 수도 없었다. 꺼칠한 장갑이 계속해서 환부를 자극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아리고 쓰린 감각이 거슬렸다. 폭탄 여파에 직격으로 맞기도 해 본 몸이었지만, 작다고 하면 작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왠지 조금 낯설었다.
민재는 두더지와 악어의 위치를 확인했다. 둘도 비교적 시원한 시간대에 오늘치 작업을 끝내고 싶은 모양인지 밭을 열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민재가 둘 몰래 능력을 살짝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민재의 손을 잡았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몸을 뒤로 뺀 민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굳은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해요.”
민재는 빠르게 사과했다. 그러자 토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요.”
토끼는 민재의 손목을 잡고 밭 구석으로 끌기 시작했다. 민재는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 주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두더지와 악어를 살핀 토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비밀이에요.”
대뜸 비밀이라는 말을 한 토끼는 민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약간의 통증을 느낀 민재가 눈을 찌푸렸다.
장갑을 벗긴 토끼는 민재의 상처를 잠시 살피더니 그 위에 두 손가락을 올렸다.
“하나, 둘, 셋.”
주문을 외우는 듯 작은 목소리로 토끼는 숫자를 셌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민재의 상처가 아물었다.
민재는 그제야 왜 악어가 자신의 능력은 노출시키면서 자신의 동생인 토끼의 능력은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바깥에 내놓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토끼는 민재와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힐은 대체로 희귀한 능력이었다. 등급이 높은 경우는 더 귀했다. 그래서 이들은 토끼의 정체만큼은 꼭 숨기려고 한 것일 터였다.
“오빠 상처를 좀 더 잘 치료해 주고 싶은데… 연습하기가 어려워서요. 비밀로 해 주세요.”
토끼가 수줍게 말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있어요?”
시동어를 만들어서 입 밖으로 내뱉는 걸 보니 아직 능력 컨트롤이 미숙한 것 같았다. 민재가 묻자 토끼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치료해 주고 싶다고 생각을 깊게 해요.”
위급한 상황에서 몇 번 사용해 본 것이 다인 듯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가 토끼에게 작은 목소리로 조언을 했다.
“능력을 쓸 때 빛이 나오잖아요? 그걸 조종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쉬워요.”
토끼는 민재를 보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 말 없이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손가락 위에 작은 흰 빛이 일었다.
“우와.”
토끼는 본인이 해내고도 놀란 듯했다. 민재는 미미하게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센터에서 능력 사용법을 알려 주거든요.”
어떻게 힐 사용법을 잘 아는지 물을까 싶어 덧붙인 말이었다. 그러나 토끼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듯 자신의 손만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센터에 가면 또 뭘 배울 수 있어요?”
작은 목소리였다. 아직 어려서 얘한테는 센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길 하지 않은 건가? 민재는 토끼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배우지 않았어도 좋았을 법한 거요.”
“…그런 것도 있어요?”
민재의 대답에 토끼가 되물었다. 민재는 멀끔해진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웃었다.
“고마워요.”
“너희 뭐하냐?”
악어가 수상하다는 듯 민재와 토끼를 째려보았다.
“아무것도!”
토끼는 후다닥 뛰어 밭을 나갔다. 몰래 민재를 보고 살짝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재는 태연하게 다시 목장갑을 착용했다. 그러고는 잡초를 뽑기 위해 풀들을 헤집기 시작했다.